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 - 새하얀 밤을 견디게 해준 내 인생의 그림, 화가 그리고 예술에 관하여
이세라 지음 / 나무의철학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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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상력을 키워 주는 것에는 미술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미술관과 작품에는 항상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보다는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는 제목이 많은 매혹을 뿜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책의 겉표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모방송사의 도도한 영화에 나왔었고, 지금은 토요일 그 시간마다 그 목소리가 떠오른다. 책 한 권을 통해서 미술품으로 보게 되는 상상 속에서 덤으로 따라와서 알게 되는 근황 너머로 당당했던 그 목소리를 연상한다. 그녀가 보여 주는 세상 속에서 그림들이 보여 주는 삶의 모습을 만난다. 그 옛날 것에서 요즘의 것까지 망라하는 공간에서,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기에 당연히 변해야 하는 것이 있고, 그러지 안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반대 현상이 발생하면 갈등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란 것 쯤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 틈새 사이로 그녀만의 가장 강력한 최후의 발언권(19페이지)을 찾아본다.

 

인생의 어느 시기를 지날 때 나를 구하고 위로 해준 작품(8페이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과 영화가 주는 최대의 혜택을 보여 준다. 예술을 통해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사이의 접점을 찾아 슬픔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 보여 지고 있다. 그 과정에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 아름다움은 때로 사람을 눈멀게 한다는 것을(45페이지). 아주 익숙하지만 들을 때마다 다시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말이다. 방송 이미지만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에서 미술의 자리와 인간의 자리라는 뜻밖의 원초적인 질문을 만나게 된다. 미술사, 그것도 익숙함보다는 생소함이 더 진하게 우려 나오는 미술가와 그 속에 담긴 인생과 현재 우리 사회, 정치에 대한 자기만의 비판적 고찰, 그리고 연애담과 때로는 거칠고 격정적인 어조는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만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도 뼈대 있게 들려온다. 내 남자의 연대기, 웃음과 슬픔, 웃픔의 얘기가 백김치 속의 고춧가루처럼 꽂아 있어서 진지함이 갈피를 못 잡게 한다. 그렇게 삶의 가벼움과 무게를 느끼게 하는 36개의 일화로 채워져 있는 에세이에는 사람 냄새 나는 감흥을 찾아 가는 자신만의 인본주의적인 삶의 몸부림이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모자이크 그림은 소개되고 있지 않지만, 그녀의 글쓰기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표지를 덮고 모자이크를 완성하고 보니, 웃음은 웃음이 아니라 헛깨비였고 삶의 문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거기에 버티고 있었다. 미술 작품이 주는 감상(感想)은 현실의 감상(感傷)1밀리미터도 넘지 못했다.

 

미술품을 자기 나름대로 감상하려면 자신은 철저하게 맨 얼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속 시원하게 보기가 어렵다. 그렇지 않으려면 남이 소개해 놓은 책이나 인터넷을 뒤지면 된다. 이미 거기에는 백과사전이라는 이름과 블로그 속에는 누군가 이미 내 고향 7월의 포도처럼 주저리주저리 적어서 해석의 딱지를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보려고 한다면, 자신만의 감정과 이해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그런 것들은 이미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그녀가 보여 주는 공간에는 두 개의 세상이 있다. 하나는 그녀의 눈에 비춰진 그림과 영화 등의 세계와 그녀 자신의 세계가 그것이다. 이 별개의 다른 두 개의 세상은 연결되어 공유의 과정으로 만들어 간다. 두 개의 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을 통해서 그림과 교감하면서 우리도 그 세계로 끌어들인다. 거기에는 작가만의 현실관과 인생관이 중요한 몫을 한다. 그 어딘가에 필히 읽는 이도 마음을 비빌 언덕을 마련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 (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텐트) ; 트레이시 에민. 1995作. 20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함. 책(231페이지)에 설명은 되어 있으나 소개되어 있지 않아서 인터넷 검색으로 펌.>


미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결국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보는 것이 아닌가? 언제나 마음에 오래 남는 건 사람과 삶을 말하는 작가이고 작품이다.----247페이지

 

그림은 말이 없다. 설명하는 글자 하나도 없다. 심지어 제목은 그림과 별도로 붙어 있다. 그것도 말해지 않으면 절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그저 보여 주기만 할 뿐이다. 그 보여줌이 무슨 의미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하게 해석하고 이해되기도 한다. 공통의 관점이 생겼다는 것에서는 나도 그들의 일부라는 안도감과 씁쓸함이 함께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그게 진짜로 그린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글로 표현되는 시의 경우도 작가 자신도 모르는 해석이 붙는 경우가 허다한데, 말도 글도 없이 그저 모습만을 보여 주는 것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을 것인가는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그림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오직 보는 사람의 가슴 속에만 있어서, 수 십 가지의 의미를 보여 줄 수도 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보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보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예술품이나 문학보다 보기 편하다. 객관적인 세상을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그리고, 감상하는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에는 나만의 세상이 있다. 공통의 관점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161페이지]


나는 보다 분명한 나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7페이지).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한두 건의 사건으로 한 인생을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단초를 찾아가며 생각의 연결 괴를 찾는다. 초등 시절에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좋아했던 소녀는 지금은 인생이라는 외줄에 매달려서 자신만의 색깔로 그림을 보며,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려고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는 대부분의 그림과 얼마간의 영화, 그리고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매달렸을 경험이지만, 머릿속에 많이 각인되어 않아 그저 흔한 일상쯤 이상으로 라고 생각되는 것 이상으로 색다른 경험의 기억을 주고 있다. 그 기억은 이제는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있다. ‘그림 앞에 서는 시간’, ‘나의 모든 시작의 순간들’, ‘다시는 망설이지 않겠다’, ‘아름다운 날들은 언제라도 온다는 네 개의 소제목은 그저 허투루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생소한 화가들이 아주 많이 나온다. 아니 대부분이 생소한 작가들이다. 이미 봤던 작품,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보다는 그녀만의 전문성이 깃들여진 작품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모르지만 각각의 자리에서 빛내고 있는 미술품들은 그 내용에 맞게 제 자리에 서서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회문제에 포커스를 다루기도 한다. 미술의 세계는 또 하나의 판박이 세상이다. 두려워하면서도 끝까지 미술과 영화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의 연속선을, 세상과 현실을 자신과의 접점을 찾아간다.

 

지난 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러가게 두고, 넘어진 지금 이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지나이다의 그림을 통해서 배운다.(203페이지)

 

현실보다 더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은 없다(68페이지). 멀쩡한 남자들이 나한테 오면 어딘지 이상해지는 건가. 아니면 내가 그런 놈들만 골라 만나는 건가(240페이지). 모자이크를 완성하기 전에는 웃음이 나오는 장면 중의 하나였다. 후자의 문장에 더 관심을 주었고, 그저 그런 연애생활의 푸념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직장 생활에서, 남자로부터 생채기를 많이 받은 그녀를 만나게 되는 순간에는 독립심이 강한 그녀도 인간관계가 거의 블랙홀 수준이다. 특히나 어떤 시람을 만나고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현재의 기쁨이 달라진다는 것을 익히 알기에 허투루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현재를 밟고 서 있는 과거, 지나온 과거도 하찮은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만남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가장 일반론적인 얘기로도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만의 특수한 얘기라면 또 다른 느낌으로 읽힌다. 현재를 이겨내려는 자기만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할 수 있다. 자신만의 자기 고수하는 비법이 여기에 있었다. 그림 너머 어떤 것에서 느껴지며 배워지는 것들은 아련하기만 하다.

 

한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힘은 대단하고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일상을 꾸준하게 살아내는 반복학습에서 나온다(62페이지). 그림 너머로 불가해하고 새로운 것과 그 옛날의 것이 혼재하는 것들을 일상 속에서도 만난다. 그렇게 방점은 미술관이 아니었다. 일상의 맨얼굴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 왔으나 갈수록 무거운 마음이 자라 잡게 하고 있었다. 개인의 감정으로 왔으나 구조의 감정으로 변했다. 미술은 조연이었고, 슬픔이 주인공으로만 몰아가고 있었다. 제목과 분량과 비례하지 않은 분위기이다. 미술, 그녀, 세상. 리뷰의 초점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아직도 100년 전 문화를 지키려는 자와 나 자신을 고수하려는 그녀 사이에서는 특히 그랬다. 사실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를 새로 시작하려는 출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반갑지만은 않은 이야기는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야마시타 기요시<나이아가라 불꽃과 구경꾼들> 306페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삶, 혹은 그런 상태(219페이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시간과 간절함은 수시로 찾아온다. 삶은 익숙해지기 어렵고 엇박자를 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문명의 변화가 가장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나라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그에 동반하여 정신문화도 그런 것 같다. 이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그저 덜떨어진 일부 사람들만이 그러는 상상속의 구닥다리 퇴물로 여겨졌던 ‘1982년생 김지영‘1987년생 김지영을 직면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개인의 복이라는 생각이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살 뿐(332페이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무겁고 잔인하게만 다가온다. 감히 인생을 즐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어디서 베낀 듯, 표절 아닌 표절로 끝맺음을 하려고 하였으나, 그녀의 현실 앞에 오만이었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그녀가 숨겨둔 맨얼굴의 모자이크는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게 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오직 나만의 생각 비뚤어진 감상(感傷)이길 바랄 뿐이다. 극복되어야 할 상황이 아니라 극복된 상황으로 인도하여 나이아가라 불꽃과 구경꾼의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공간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자리에 있을 그녀만의 자화상이 어떤 세상을 보여 줄지 궁금해진다. 인생에 내려진 저주를 걷어내고 마침내 행복해진, 그 기적 같은 순간(339페이지)은 고르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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