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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 깊고도 가벼웠던 10년간의 질주
척 클로스터만 지음, 임경은 옮김 / 온워드 / 2023년 8월
평점 :
훗날 기억하는 90년대는 내겐 축복과도 같은 시기였다. 흔히 문화 르네상스라 일컫는 이유는 경제 성장으로 호황기를 맞았던 기간과 맞아떨어진다. 이름만 대면 아는 가수와 그룹들이 장르와 무관하게 사랑받았고 눈부시게 발전하는 컴퓨터로 인해 설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감수성 짙은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채웠고 아직은 순수함이 남아있을 때였다. 언론에서는 X세대, 오렌지족, 낑깡족 등 온갖 수식어를 붙여 세대를 규정지으려 했다. 케이블이나 종편 채널도 거의 없었고 스마트폰 보급은커녕 PC 통신 정도만 활발했을 때라 정보를 얻는 건 무척 귀한 일이었다. 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살만했던 때라 여길 지 모른다. 어려워도 이웃 간의 정이 살아있고 희망이 있었을 때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비록 미국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시절을 추억 소환할 수 있었다. X세대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건 역사학자인 폴 피셀의 1983년 저서인 <계급 : 미국 신분제에 관한 안내서>에서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
"하지만 계급이라는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오자는 그의 주장 하나하나는 내가 X세대라는 개념을 생각하던 방식과 일치하는 듯 느껴졌다."
1994년에 306페이지 분량의 <X세대 읽기>라는 책이 나오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늘 그렇듯 기성세대는 세대를 규정짓고 그 틀 안에서 젊은 세대를 정의하려고 한다. X세대 이후로 밀레니엄 세대, MZ세대, Z세대, 알파세대 등 흔히 출생 시기로 분류하는데 내 기억으론 X세대가 가장 자유분방했고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신세대였다. 그런 문화적 토양 위에 전 세계적으로 찬란한 문화의 부흥을 주도할 수 있었다.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며 90년대를 맞았고 2001년 9월 11일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며 90년대는 끝났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보다 더 큰 사건이 있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사고,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지존파, 신창원도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이 책은 대중문화와 시사를 함께 아우르면서 폭넓게 되짚어본다. 그리고 중간중간 아는 내용이 나올 때면 다시 90년대를 되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과 영혼>, <저수지의 개들>, <타이타닉>, <매트릭스>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90년대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다시 돌아본다는 점에서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90년대를 살았던 사람에겐 옛 향수에 젖게 만들고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겐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굵직굵직한 일들이 있었고 우린 그 시대를 살아왔다. 90년대는 특히 대중문화에서 IT 기술, 사회, 경제할 것 없이 격동기였으며 변화가 그 어느 시기보다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때였다. 그래서 흥미로웠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을 때였다. 할매니얼, 힙지로, 레트로, 뉴트로 등 복고 열풍이 식지 않는 이유도 우리 기억에 가장 행복했던 시대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혼란스럽다기 보다 점점 발전하는 사회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깊고도 가볍게 10년간 질주했던 것 같다. 인간미 넘치던 90년대의 문화와 주요 사건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