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유일한 것은 '죽음' 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고 나약하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인간은 그저 죽음 전에 찾아오는 노화와 고통을 떠올리며 죽음이 두렵기만 하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신도 찾고 종교도 찾는 것이 인간이다. 소위 말해, 잘 나가는 커리어를 가진 저자에게 갑작스레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다. 딱히 죄지은 일도 없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왔는 데, 억울하다. 이제 좀 살만하다 싶을 때, 그것도 타지에서 찾아 온 병마는 원망스럽기만 하다. 한없이 울고만 싶은 데, 울고 있을 수 만은 없다. 조금이라도 더 삶을 영위하고 싶다면 살고 싶다면 해야할 일이 산더미다. 암전문의를 찾고 병원을 예약하고 보험도 살핀다. 이제는 병마와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해야한다. 나의 아픔을 날 사랑하는 이들에게 알리는 것은 병만큼이나 아픈 일이다. 고통스런 항암을 견디며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고 함께 있어주는 엄마와의 관계까지 힘들어진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또 다른 형식의 아픔이다. 이 고통이 언제나 끝날까? 그 끝이 있기나 할까? 고통의 끝은 죽음일까? 함께 응원하며 병마와 싸우던 이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 간신히 붙들고 있던 용기도 무너져 내린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가장 빠르게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들은 의외로 긍정주의자들이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희망을 품고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주던 사람들이 끝이 없다는 것을 알자 오히려 가장 먼저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는 것이다. 기대는 나를 살리기도 하지만 충족되지 못할 때 더 큰 절망이 되어 쓰나미처럼 덮치기도 한다. 그 순간을 감내하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하나보다. 암환자의 투병일지를 본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다르기도 했고 더 무섭기도 했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조차 조심스럽다 병이라는 것이 환자의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겨냈고 이겨내고 있었다. 인간의 인생사가 그렇듯, 모든 것에는 본인의 마음과 의지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과도한 희망고문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내 삶을 선택할 정도의 의지는 있어야 했다. 저자는 '다시 삶을 선택했다' 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