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
장석주 지음 / 마음서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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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일에 지친 저자는 호주로 떠났습니다. 휴식이 필요했겠지요. 그는 조용히 여행하면서 천천히 생각했고 새벽마다 편지를 썼습니다. 정성스러운 편지들. 부칠 수 없는 그 편지들이 이렇게 제 손에도 들어오게 되었네요. 편지를 받고 설렜던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두세 장 되는 편지글마다 끝에는 빼먹지 않고 인사를 남겼습니다. '당신, 잘 있어요.' 이 한마디에 매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책장을 넘기며 그가 다녔던 자취를 떠올려봅니다.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이럴까요. 마음을 비워내고 새로움을 담아낸 그 기간이 눈에 선연합니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들을 상상하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생깁니다. 모든 것을 비추는 투명한 호수, 천 년이나 산 나무가 있는 공원, 고즈넉한 시골 길. 이렇게 평온한 글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 풍경 속에서 저만의 풍경을 담아보고 싶습니다.

책의 갈피마다 어떤 것을 보았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모두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당신'과 일상을 함께하고픈 마음이겠지요.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다른 글도 잘 쓰는 것일까요. 그의 시가 여행 중의 사색과 조화롭게 엮여 편지글이 되었습니다. 잔잔한 글이 마음을 조용히 흔드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는 '당신'을 떠올리며 그와 '당신'의 다름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당신'의 생각을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각자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모여 당신과 그가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그 중 하나라도 바꿔버렸다면 그들은 서로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얼마나 큰 불행이었을까요. 함께 한 순간들이 모여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힘들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기쁨이 되는 것을요. 그래서 저 또한 제 어떤 모습도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담담한 글이지만 아픈 날들을 떠올리며 쓸쓸해하는 부분은 참 아련합니다. 그러나 다행입니다. 그는 미워하는 사람은 용서하고 착하게 살기로 다짐도 하면서 그렇게 잘 살아가고 있네요. '봄날 종달새의 노래'를 듣고도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기적'은 아직 저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이 저에게 다가오는 날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날이 온다면 말입니다.

와이타케레 공원에 있다는 카우리 나무는 무려 천 년을 살아냈는데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은 그보다 훨씬 많다고 하지요. 그 나무의 시선으로 인간이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인간이 하루살이의 삶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일까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백 년은 하루살이의 하루. 그 생물에게도 그 시간이 우리의 삶만큼이나 긴 시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루만 산다고 불쌍하다 생각할 필요도, 더 많이 산다고 우쭐댈 필요도 없겠습니다. 남은 천오백 년을 카우리 나무는 천천히 살아가겠지요. 영원과도 같은 그 시간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짧은 생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일 겁니다.

그는 '당신'에게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은 따뜻한지 묻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잘 살기를 바란다고도 하지요. '당신'을 대신해 제가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따뜻할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지만 대체로 살 만합니다.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이곳에서 잘 살아내겠습니다. 환경에 맞서 싸우는 그 작은 식물들처럼, 길고 긴 기다림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그 들꽃들처럼. 따뜻한 말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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