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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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불어 살아갑니다. 혼자 살아갈 수 없으니 남을 의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쓰며 살아가는 사람이 가끔씩 보입니다. 좀 피곤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평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 가족은 굶주리지만 매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사람, 가족에게는 더없이 차갑지만 손님에게는 우아하고 세련된 태도로 다정하게 구는 사람. 벨기에의 귀족인 느빌 백작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럼 주인공인 느빌 백작은 어떨까요.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누나를 방치한 아버지를 증오하던 어린 소년은 이상하게도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며 살아갑니다. 파티가 열리면 모든 손님을 동화 속 세계로 이끌어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그는 접대의 귀재라는 명성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속한 세계에 그도 여전히 속해 있으니 그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기는 그는 아버지의 행동을 환경의 탓으로 돌리고 정당화시킨지 오래입니다. 사랑하는 누나를 잃고 고통을 느꼈던 그 어린 소년의 마음은 어디로 간 걸까요.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비틀린 귀족의식을 고수하며 겉치레에 연연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느빌 백작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성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우아하고 재치 넘치는 귀족인 그는 아무리 생활이 어렵더라도 파티를 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라벤스테인 성을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마지막 파티를 준비하는 그는 그 중요한 파티에서 초대 손님 중 한 명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예언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합니다. 파티를 취소할 수는 없으니 누구를 죽일지 선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그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의 고민을 알아챈 셋째 딸 세리외즈는 살아가는 것이 의미 없다며 자신을 죽이라고 설득합니다.

첫째와 둘째에게 아가멤논의 자녀들 이름인 오레스트와 엘렉트르라는 이름을 지어준 느빌 백작은 셋째에게는 세리외즈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피제니라는 이름을 짓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요.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며 막내 딸을 바다에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의 운명만은 피해가려는 것이었을까요. 파티가 시작되고 파티는 점점 환상적인 모습을 더해갑니다. 모두가 감탄하는 파티 속에서 예정된 살인 시간은 점점 다가만 옵니다. 느빌은 결국 막내딸을 죽이게 될까요. 아무 것도 죽여보지 못한 그가 제대로 해낼 수나 있을까요. 아가멤논의 운명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그를 이대로 말리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편의 희극을 감상하듯 느빌 백작이 일으키는 일들을 감상했습니다. 그 속이 어떻든 결코 겉으로 비루함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행동은 참으로 대단해보입니다. 귀족의 품위를 잃는 그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 귀족 세계의 일원이자 훌륭한 본보기가 되는 인물! 그의 삶은 상상도 못한 결말 이후에도 지금과 같이 그대로 유지될 게 분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느빌을 보면서 우습고도 슬픈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위선을 위선이라 느끼지 못하고 바꿔야 할 악습을 고수하는 사람이 책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삶의 의미를 잃은 세리외즈가 죽음 앞에서만 눈을 반짝이던 모습이 계속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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