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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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비상식을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법, 규범, 윤리로 보장되는 생각과 행동이 아마도 그 기준이 될 것입니다. 사회 구성권들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상'과 '상식'은 우리의 행동을 커다란 틀 안에 가둡니다. 우리는 사실상 모두를 위해 그어둔 안전한 선 안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선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바로 상식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식적인 행동과 정상이라 생각되는 범위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배경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치관은 아주 다른 세계입니다. 이곳에서 아이는 오직 인공수정으로만 태어나고 부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제한 채 오누이처럼 살아갑니다. '사랑과 성욕은 가정 밖에서 처리하는 배설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 밖에서 각자 자유로운 연애 활동을 합니다. 각자의 애인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입니다. 이는 합법화되어 있기 때문에 혹시나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되면 그는 곧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게 됩니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연애상대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연애를 하든지 만화 속 캐릭터와 연애를 하든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며 만화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캐릭터 인형이나 포스터를 구입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놓아둡니다. 어른이라고 이와 다를 것은 없습니다. 때로는 캐릭터 열쇠고리를 손에 쥐고 허구의 연인과 산책을 즐기고 때로는 인간 연인과 손을 잡고 걸어 다닙니다. 사람들에게는 연애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냐 캐릭터냐 하는 선택의 문제일 뿐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가치는 동등하니까요.

그런데 실험도시가 생기면서부터 결혼과 출산, 가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도시에서는 아무도 결혼하지 않습니다. 가족을 이뤄 아이를 키우는 방식은 더 이상 이 실험도시에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두 혼자서 살아가며 여성과 남성이 모두 출산을 하고, 태어난 아이들은 시설에서 자라며 모두의 '아가'가 됩니다. 동시에 이 도시의 모든 성인은 모든 '아가'의 '엄마'가 되지요. 똑같은 흰색 아동복을 입은 아이들은 똑같은 표정으로 웃습니다. 공동육아를 하며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모든 어른들의 얼굴도 점점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됩니다.

실험도시에서는 이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곧 다른 도시들도 이렇게 변해 가겠지요. 사람들은 달라진 현실을 점점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겁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존재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겠지요. 백 년 전쯤에는 상식으로 통하던 가치관은 책 속 세계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이제 비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책 속에서 존재하는 세상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상식을 저울질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이런 개념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벗어난 것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같은 표정의 아이들과 어른들을 보며 섬뜩함을 느끼지만 이십 년, 오십 년 뒤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싶은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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