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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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을 여행할 때는 탐험하는 기분이 듭니다. 새로운 풍경,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물건들을 보며 익숙한 것에서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해진 여행기간이 끝나면 안락한 집으로 돌아가 여행지에서의 기분을 떠올리며 기분전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행했던 곳에서 살게 된다면 통통 튀기는 듯한 생생한 기분은 곧 사라질 겁니다. 익숙함이 자리잡고 그곳은 일상적인 공간이 되어 버리겠지요. 미국에서 살던 안나가 남편을 따라가 살게 된 스위스 디틀리콘도 상상만 할 때는 그리 나쁜 곳은 아니었을 겁니다. 편의시설이 근처에 자리한 안전하고 깨끗한 동네는 누구라도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유럽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던 안나도 물론 그랬습니다.

9년이 지난 지금, 안나는 모든 것이 지루합니다. 언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마다 학교 밖에서 외롭게 서 있습니다. 학부모 무리에 끼지 못하는 그녀는 따로 친구도 사귀지 못한 채 일상을 영위할 뿐입니다. 벙어리가 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는 대화할 상대가 없습니다. 집안에서 모든 결정은 남편인 부르노가 하고 그녀는 수동적으로 그저 따르기만 합니다. 장을 보면서 자신이 가사 도우미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남편과의 좋은 한때가 지나간 뒤, 그녀는 급기야 다른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녀가 서서히 바뀌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외국어를 익히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언어는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기에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꼭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안나는 왜 이런 일을 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까요. 왜 자처해서 고독을 껴안고 살아 왔을까요. 그냥 독일어 수업을 받으러 가기만 하면 되었을 일인데 왜 고독이 가슴에 구멍을 내는 것을 그렇게 보고만 있었을까요.
그녀는 스위스에 온지 9년만에 드디어 이 지방에서 쓰는 독일어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하고 남편은 그녀를 지지합니다. 점차 나아지는 언어실력으로 그녀는 자신감과 친구를 동시에 얻게 됩니다. 이 일은 그녀를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어린 아이들과 예민한 남편,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한 시어머니와 좀 더 잘 지낼 수 있게 될까요.

정신과 의사인 메설리 박사가 그녀를 위해 해준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실수를 한 번 하면 어쩌다 그냥 삐끗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일탈이며 세 번째는 의지가 작용한 것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했거든요. 세 번째 이후로는 실수가 자신을 찾아온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안나의 처지에 꼭 들어맞았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던 그녀는 결국 끝에 가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남편과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고 가족들 틈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그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을 것임을 알고 있던 그녀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그녀가 더이상 언덕 위 벤치에서 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실수의 문제는 저지를 당시에는 실수처럼 보이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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