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타와 오토와 러셀과 제임스
엠마 후퍼 지음, 노진선 옮김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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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삶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때는 내 것이었던 경험과 시간들이 허공에 사라지는 것을 보는 느낌은 얼마나 허망할까요.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이 책의 주인공, 에타가 이 일을 겪게 되었듯이 치매는 누구에게나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이라 기억을 잃는 사람들을 보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습니다. 

에타는 기억을 잃어갑니다.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게 되겠지요. 그녀는 어느 날 새벽에 집을 떠납니다. 바다를 본 적이 없어서 보러간다는 쪽지만 남겨 놓은 채. 남편인 오토는 쪽지를 보지만 그녀를 따라나서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없는 글을 보고 에타가 어디로 갈지 짐작하는 그는 그녀가 여행하는 목적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행동을 통해 에타의 여행이 단지 바다를 보고자 하는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바다를 향해 가는 걸까요. 기억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혼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구나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이름과 가족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넣고 다니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떠올리는 그녀는 어떻게 혼자서 여행할 생각을 했을까요. 도중에 여행하고자 하는 장소나 목적을 잊게 될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에게는 걱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행길에서 만난 코요테, 제임스가 그녀에게 심적인 안정을 제공하기 때문일까요. 먹을 것이 없을 때 작은 동물을 잡아와 에타에게 나눠주고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돕기도 하는 제임스가 없었다면 그녀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을까요. 말하는 코요테가 실제든 환상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요.

여러 명의 이름이 들어간 이 책은 겉으로 보면 코요테를 데리고 다니는 여든 두 살 노인의 도보 여행기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에타와 오토, 친구 러셀의 젊은 시절, 꿈과 사랑, 아픔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이 세계대전에 휘말리던 그 시기에 청춘을 보낸 이들이 전쟁을 직접, 간접적으로 겪어야 했던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힘있게 이어져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평온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을 뒤로 한 채 열 일곱이 되자마자 전쟁터로 향하던 소년들, 그리고 그들을 보내야만 했던 가족과 친구, 연인들까지.

책을 덮은 뒤, 전쟁으로 인해 달라진 에타와 오토와 러셀의 이야기가 계속 가슴 속을 맴돌았습니다. 인생을 정리하는 에타의 여행길을 뒤따라가며 제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기도 해 그 여운이 오래 간 것 같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어찌 이들뿐일까요. 살면서 하는 선택으로 고뇌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요. 에타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마주보았듯 우리도 그렇게 용기를 내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잔인한 묘사를 배제하면서 전쟁의 잔혹함을 일깨우는 표현력과 호흡이 긴 색다른 문장, 오랫동안 가슴을 울리는 결말까지 마음에 드는 소설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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