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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노그라퍼 - 1975-2015 공연.영화.전시 공간을 창조하는 사람들
뤼크 부크리스 외 지음, 권현정 옮김 / 미술문화 / 2017년 2월
평점 :

십여 년 전, 런던에 있는 극장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봤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고 노래는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중요 장면마다 바뀌는 무대는 그야말로 정교해 실제로 배경이 되는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배우와 무대가 함께 어우러진 멋진 공연을 보고 나니 무대의 역할이 정말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감정은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나서도 생기곤 했지요. 등장인물이 있는 공간이 바로 내가 있는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곳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인지 궁금해지곤 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은 물론 인물들의 내면까지 세세하게 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같아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프랑스 시노그라퍼>에는 그동안 궁금했던, 무대와 배경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책은 무대미술을 담당하는 사람인 무대미술가가 프랑스에서 '시노그라퍼'라고 불리게 된 이유와 시노그라퍼의 활동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려주는 것은 물론 1975년부터 2015년 사이에 활동한 프랑스 시노그라퍼를 4세대로 구분해 그간 발전해온 무대미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대를 어떻게 구성할지를 생각하려면 일단 대본을 봐야 합니다. 지문을 보고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하는 과정을 거쳐 무대가 만들어지지요. 이 일은 창조적인 과정입니다.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는 이 공간에서 연기하며 관객과 이어집니다. 그런데 1960년대까지는 무대미술을 무대 장식, 무대 디자인, 데코레이션 등으로 부르며 텍스트를 단순히 묘사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단순한 일로 이해했던 게 사실입니다. 무대를 적절히 구성하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고 수동적이기만 한 일일까요? 무대미술가가 없다고 상상해본다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텅 빈 공간에서 배우들이 열심히 공연을 한들 관객에게 제대로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1960년대 말, 무대미술이 수동적이고 작품의 창조기능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인식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이 르네상스 시기에 쓰이던 '시노그라피'라는 말을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건축과 무대미술이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작품을 공간으로 표현하고 관객과 배우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무대미술을 표현하기에 적합해 보입니다. 1970년대 이후로 더 이상 무대미술은 장식에 불과한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시노그라피 교육기관에서는 인문과 예술을 교육하고 건축, 공간디자인, 조형예술 같은 분야의 시노그라피를 교육해 창조적인 '시노그라퍼'를 육성하고 있지요.

무대미술을 관장하는 사람인 시노그라퍼는 연극, 오페라, 무용 등 다양한 공연과 영화는 물론 박물관, 미술관 등의 전시회와 도시를 기획하는 일에서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시노그라퍼 57명의 작품을 실어 작업방식과 과정을 알 수 있게 했는데 데생, 모형, 초벌 그림 등을 통해 이들의 생각이 어떻게 무대에 생생히 나타나는지 감상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각각의 시노그라퍼가 창조한 공간을 보면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은 정말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창의적인 상상력과 그것을 실제로 나타내는 재능을 모두 가진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로랑스 빌르로는 '시노그라피는 배우가 움직이고 연기하기 좋은 장소, 배우가 머무를 장소를 만드는 작업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연기하는 공간은 배우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지요.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도 이와 같았기에 그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앞으로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볼 때 배우들이 머무는 공간을 더욱 유심히 살피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