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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 최악의 탐험 그리고 최고의 기록 - 삶과 송두리째 바꾼 남극 탐험 500여 일의 기록
로버트 팔콘 스콧 지음, 박미경 옮김 / 나비의활주로 / 2017년 3월
평점 :

새하얀 설원에서 펭귄이 무리지어 움직이는 풍경을 볼 때면 참 신기했습니다. 뒤뚱거리는 펭귄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날렵하게 수영하는 모습 또한 그러했지요. 남극의 모습이 잠깐 나오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몇 번 보고는 거대한 빙하, 녹았다 얼었다 반복하며 생긴 아름다운 얼음 조각들, 파란색과 흰 색이 가득한 눈부신 풍경들이 그 전부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눈으로 가득한 대륙, 추위에 적응한 동물들이 평온하게 살아가는 곳'이 남극에 대한 생각의 전부였지요.
어릴 때 아문센의 남극탐험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상당히 추운 곳인 것 같다는 생각만 하고 넘어간 기억이 납니다. '상당히 추운 곳' 정도로는 묘사할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몰랐지요. <세상 끝 최악의 탐험 그리고 최고의 기록>은 이때껏 해왔던 생각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영국의 남극 탐험가 로버트 팔콘 스콧. 이 책은 그의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스콧은 '남극점 정복과 남극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목표로 한 테라노바 호 탐험대의 극점팀 소속으로, 이 팀의 대장이었습니다. 남극으로 출발한 시점부터 죽음에 이른 때까지 꼬박 오백일 가량을 매일 기록한 일기장은 귀중한 여행기입니다. 100여 년 전의 일인데 지금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처럼 생생한 것은 이 일기 덕분이겠지요.

펭귄, 범고래, 도둑 갈매기가 나오면서 활기차게 시작하는 이 책은 곧 수많은 사건과 죽음으로 뒤덮여 남극이 생각만큼 안전하지도, 아름답지만도 않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 번 보는 사람에게는 멋진 곳이지만 몇 달 동안 탐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험천만한 곳이 바로 남극입니다. 얼음이 깨져 썰매가 바다에 빠지고 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에 사람이 떨어져 부상을 입습니다. 크레바스라고 하는 이 틈은 눈으로 덮여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여기에 갇히는 일이 잦습니다. 살을 에일 듯한 추위를 견디며 눈 위를 걷다 동상에 걸리고 눈밭이 반사하는 햇빛 때문에 눈병에 걸린 이들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묵묵히 썰매를 끌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이들의 여정 자체가 위대한 일 같습니다.
스콧은 동료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한 명씩 바라보며 그들의 능력에 맞춰 일을 배분하고 일행을 이끌어 나갑니다. 여러 가지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대장은 막중한 책임감과 더불어 누구보다 더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하고 자기 팀에 속한 사람들을 잘 파악하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탐험 중에 작성한 기상 기록표와 지질학 표본들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그의 모습에서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탐험의 목적을 잊지 않은 그 책임감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깨닫게됩니다.
1차, 2차 지원팀을 돌려보내고 계속 전진하는 극점팀 5명은 힘든 와중에서도 남극점을 정복할 생각에 희망에 찹니다. 그러나 남극점을 최초로 정복하고자 했던 그의 꿈은 한 달 앞선 아문센에 의해 좌절되고 말지요. 더 큰 비극은 남극점에 깃대를 꽂고 돌아오는 길에서 벌어집니다. 스콧의 동료들이 한 명씩 목숨을 잃는 와중에 연료와 식량부족, 이상기온까지 겹쳐 결국엔 극점팀 5명이 모두 사망하기에 이릅니다. 결말을 알고 책을 읽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네요. 너무나 힘든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서 본다는 것 자체가 미안한 마음마저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