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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4월
평점 :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을 동화 형식으로 바꾼 책을 읽으며 어린 마음에도 말괄량이를 길들이는 내용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내를 복종시키려고 하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뒤로 이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이 희곡이 영주의 장난으로 잠깐 귀족이 된 주정뱅이 남자가 연극을 관람하는 내용이라는 걸 알고 다시 읽어보았다. 이 희곡이 쓰일 당시에는 여성들의 위치가 남성보다 확연히 아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는 부드럽고 순종적인 여성을 원하는 남성들의 생각이 완벽하게 충족되는 곳은 연극 속에만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동물이 아닌 사람을 길들이겠다는 남자를 보며 호응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내용이라 생각하면서 보면 속이 한결 편하다. 상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대화로 해결해도 될 일을 굳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덤벼들면서 해결하려 할 것까지야.
아내를 길들이는 극중극의 내용보다는 모든 것을 가진 영주가 하는 행동이 더 기억에 남는다. 맨바닥에서 자는 주정뱅이를 곯릴 생각을 하며 즐거워하는 그를 보니 옛날 유럽 왕실에서 눈요기용으로 두었던 광대, 기형아들이 떠오르며 물질적인 어려움 없이 살면서 느끼는 권태로움을 해소하는 귀족층의 권력이 엄청난 것이었겠다 싶었다. 술집 여주인에게 내쫓기며 박대당한 슬라이가 술에 곯아떨어졌다 눈을 뜬 뒤 근사한 방에서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어리둥절하면서도 꿈과 헷갈리지 않았을까.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극진히 대하는 하인들의 연기에 속아 자신이 영주라 착각하는 그가 우스우면서도 안됐다 싶었다. 자신이 연극의 등장인물이 된 것도 모른 채 또 다른 연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는 내쫓길 테니 말이다. 다시 돈 한푼 없는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가서는 잠깐 멋진 꿈을 꾸었다고 여기게 될까. 남은 생을 그 꿈에 기대어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