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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K의 미필적 고의 - 이춘길 소설집 ㅣ 걷는사람 소설집 3
이춘길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1월
평점 :

제목에 '미필적 고의'라는 말이 들어갔다. 미필적 고의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범죄 상황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용인하는 심리 상태를 뜻하는 말로 일부러 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판단 가치가 된다. 즉, '고의' 유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제목을 보니 살인 사건, 변호사, 법정 등의 단어가 떠올랐고 영화 <A Few Good Men(어 퓨 굿 맨)>이 생각났다. 미필적 고의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누군가의 누명을 벗기고 범인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저자의 단편들에는 치열한 법정 공방이나 숨 막히는 추격전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별생각 없이 선택한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인데 읽고 있자니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타인의 미필적 고의가 나를 흔들고 나의 미필적 고의가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음을 시사하는 다소 음울한 이야기는 서로 얽혀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책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이에 좋지 못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다양한 인물들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형에게 차를 빌려줬다가 낭패를 당한 '나'와 '나'가 어떤 범죄 행위에 연루되었다 짐작하고 계속 그를 압박하는 형사 K가 나오는 표제작, 이혼을 앞두고 애인과 피신한 곳에서 자신의 열정이 식어가는 것을 깨닫는 내용의 <동파>, 원장이 사라진 병원에서 파산 절차를 밟아야 하는 관리인이 뭔가를 감추면서 협조하지 않는 직원들에게 휩쓸리는 내용의 <관리인>, 동생이 사정이 생겨 양보한 카라반에 묵은 뒤로 신경증에 시달리는 여자가 나오는 <카라반> 등 다양한 인물들이 전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인상적이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하고 사라지면 그 잘못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되는 양상이 현실적이기도 하다. 명의를 빌린 사람이 불법을 저지르면 그 책임은 빌려준 이에게 있는 것이 당연하고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일을 하며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면 진정한 사랑이라 칭송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형이 설마 내 이름으로 차를 빌려 불법적인 일을 할까, 기분 좋은 밤바람으로 시작된 관계가 설마 문제가 될까 하면서 행한 일들이 해피 엔딩을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이야기들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