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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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넓은 땅에서 배부르게 살아보고자 러시아 땅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초기에 정착한 이들은 땅을 받고 농사를 지으며 조선에서보다 풍족하게 살았으나 몇십 년이 지나 늦게 소문을 듣고 간 이들은 땅은커녕 거주권도 받지 못한 채 정착민들의 땅에서 일을 해주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한다. 그러는 사이에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땅은 모두 국가의 소유가 된다. 모든 사람은 땅을 재분배 받았으나 조선인 같은 소수민족에게는 척박한 땅만 주어질 뿐이다. 그래도 묵묵히 땅을 고르고 농사를 지어 쓸만한 땅으로 만들어놓으면 다시 다른 땅으로 몰아내니 힘없는 조선인들은 그저 한탄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인들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진다. 며칠 뒤, 식량만 챙겨 열차에 타라는 것. 가진 것을 모두 뒤로 한 채 조선인 17만 명은 한 달에 걸쳐 옮겨졌다. 이 소설은 그렇게 강제로 열차에 태워진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취가 떠도는 열차 안에서 목적지도 모른 채 불안에 떠는 사람들의 현재와 과거가 한데 얽혀 이주민의 생이 어떠했는가를 속속들이 보여준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 아니라면 어디가 고향일까. 일본의 속국이 된 조선인은 일본인일까 조선인일까. 그렇다면 조선인이지만 러시아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조선말보다 러시아어에 익숙하지만 외양이 다르므로 러시아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멸시의 눈초리만 끝없이 받는 처지이다. 물론 조선을 알지 못하니 조선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러시아가 고향이지만 러시아인은 아닌 조선인들이 기댈 곳은 오로지 땅뿐인데 이제 그마저도 없다. 러시아 혁명에 일조한 조선인 공산당 간부들도 숙청되는 마당에 일반인들이 붙잡을 끈 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을 수밖에. 열차가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또다시 땅을 일궈야 할 그곳은 군인들의 말대로 집과 가축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살만한 곳일까. 책을 읽으면서 가축을 태우던 짐칸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배고픔과 싸우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 처참해 가슴이 먹먹했다. 이들이 도착할 곳은 지내던 곳보다 낫기를 바라고 바랐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을 짐승만 못하게 대우하는데 온전한 땅을 줄리가 있겠는가. 나라 잃은 민족을 살뜰히 보살필 나라가 어디에 있다고. 몸을 뉠 땅을 찾아 멀고 먼 길을 달려왔던 사람들은 또다시 먼 길을 달려만 간다.

소설에는 열차에서 내린 뒤의 상황은 얼마 나오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힘들게 겨우 목숨만 이어나갈 거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정권이 바뀌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조선인들이 러시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을 테지만 그런 순간들은 이미 한순간의 꿈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나갈 사람들에게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춥고 메마른 땅, 버려진 땅에 던져진 사람들은 맨손으로 땅을 파고 얼마 안 되는 씨를 뿌려 어떻게든 땅을 일굴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병들고 죽고 굶주리며 처참한 삶을 살겠지만 그래도 질긴 목숨을 어떻게든 이어 나갈 것이다. 몇 대째 뿌리내리고 살아도 이방인 취급을 받겠지만 끝까지 버티며 아이들을 기를 것이다. 하늘 아래 평등한 세상을 꿈꿀 자유만은 언제까지고 가슴에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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