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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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요괴가 나와 밤잠을 설칠 정도로 무섭게 느껴지는 소설이 간혹 있다. 담이 작아 이런 이야기는 멀리하는 편인데 이 책은 '잔혹과 순수를 넘나들며 고요히 퍼져나가는' 호러 소설이라 해서 분위기가 궁금했다. 한 편씩 읽으면서 섬찟하기도 했고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 공포 소설에 웬 눈물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에는 일반적인 공포 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마음 저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슬며시 건드리는 느낌이랄까. 단편들 대부분 마음에 들었는데 그중 두 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은 책에 실린 단편 중 첫 번째 소설로, 어느 부부에게 나타난 귀신이 이들 생활에 미치게 된 일들을 그리고 있다. 귀신이 나타나지만 그렇게 공포스럽지는 않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를 보고 작중 인물은 기겁하지만 독자로서는 극렬한 공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만큼 이야기가 잔잔하다. 그저 종종 나타나 가만히 있는 희미한 형체는 어떤 위해를 가하지도 않고 끔찍하게 변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나타나는지 궁금해질 때쯤 주인공 부부가 본격적으로 그 이유를 쫓는다. 추리 요소가 섞여 있는 이야기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헤밍웨이가 썼다는 문장이 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이 문장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라 불린다. 주인을 잃은 신발, 세상에 없는 아이, 비통한 얼굴을 한 부모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이렇게 짧은 문장에 이야기를 담다니 감탄할 뿐이다. 이 문장이 주인공 부부의 이야기와 하나로 맞물리는 과정이 특색 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잃어버린 마음이야 말해 뭐 하겠는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온기가 스미기를 바랄 뿐이다. 상실감만을 안고 살아가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길다.

 

<이불 속의 우주>는 우연히 얻게 된 이불 속에서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 소설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풍경 묘사를 잘 하던 한 소설가가 10년 전부터 글을 쓰지 못하면서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잘 그리고 있다.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떠오르지 않는 작가의 삶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지켜보는 가족도 물론 애가 타겠지만 작가 본인에게는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일일 터. 이보다 더 공포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던 그가 예고 없이 소설을 새로 써낸다. 그것도 예전보다 더 나아진 기량을 선보여 주위를 놀라게 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매일 밤 누구나 덮고 자는 이불을 소재로 기발한 이야기를 풀어 내어 마음에 들었다. 친숙한 물건이 다른 세계의 통로가 되니 굳이 어렵고 복잡한 방법이 필요 없다. 고난 끝에 더 긴 고난이 기다리고 있지 않아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이불 속에서 체험하는 오만 가지 감각은 소설가의 환상이든 실제로 겪는 기묘한 체험이든 그 자체로 신비하다. 보리 이삭이 발가락을 스치는 간질간질함은 어떤 느낌일지, 온몸을 핥듯이 지나가는 사막의 뜨거운 바람은 얼마만큼의 기세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통에 저 이불을 구하고 싶어질 정도이니 말이다. 이 소설가는 어디에 가서든 오감을 활짝 열어 놓고 모든 것을 흡수하며 살 것만 같다. 이 세계에서든 다른 세계에서든.

 

책을 덮고 나니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남기는 여운이 제법 길게 간다. 우리가 때때로 겪는 이상하고도 기괴하고 참담한 이야기들이 한곳에 모여 오히려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가슴 아픈 경험을 애써 잊는 대신 슬퍼할 만큼 마음껏 슬퍼하라고, 떠오르는 좋은 기억들은 억지로 눌러놓을 필요 없이 그저 가만히 안고 가라고.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그 문장이 심금을 울리는 건 짧은 내용과 짧은 인생이 일치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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