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책이나 영화에서만 접할 수 있는 직업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 킬러라는 직업이 등장할 때마다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든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치밀하게 계산된 살인 장면과 킬러의 냉혹한 표정, 죽음을 당하는 사람의 공포어린 시선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60대의 여자 킬러인 조각의 일상과 과거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죽음 앞에서 공평하게도 약하디 약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조각은 방역업자로 불린다. 누군가의 생을 제거하는 일은 그 대상을 해충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해로운 벌레를 죽이는 것쯤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 의뢰인도, 이유도 모른 채 방역 대상을 해치우는 조각은 벌써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세월은, 한때 날아다녔던 그녀의 몸을 천천히 무너뜨리는 중이다.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 한 순간의 판단이 자칫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그녀는 매사 신중해지려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나누는 존재 없이 살아가는 그녀의 인생은 회색빛으로 보인다. 그런데 냉철한 이성 틈으로 언뜻 비치기 시작한 알지 못할 감정은 그녀를 점점 다른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녀가 도달할 그곳은 어디가 될까. 파과, 흠집이 난 과일이 거치는 절차대로 그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인가. 책을 읽는 내내 약간의 행복만이라도 느끼기를 바랐던 그녀의 회색빛 삶은 이제 어떤 색을 띠게 될까. 인간에 대한 동정, 연민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무너뜨릴 줄 알기에 극도로 경계했던 세월이 지킬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 되짚어보기를 바라는 수 밖에.

사랑도, 우정도, 그 어떤 따뜻한 감정도 배제한 채 살아야 하는 이의 무미건조한 삶은 별다를 것 없는 나의 삶을 아주 아름답게 느끼게 한다. 두둔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조각이 거쳐온 길 속에서 생의 소중함을 발견하면서 쉽게 바스라지는 삶 속에서 그녀도 무언가를 건져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던 그녀라도 꾹꾹 눌러놓은 인간성을 조금씩 다시 느끼며 남아있는 나날들을 그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살아있는 자의 고통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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