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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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으로 무장한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비열함을 이렇게 잘 드러낸 글이 있을까. 말의 무거움, 문학의 순수성을 교묘히 이용해 미성년자들을 노리개로 삼는 자의 모습은 양의 탈을 쓴 괴물 그 자체로 대단히 공포스럽다.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를 어릴 때부터 학습한 아이들이 막다른 곳으로 몰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가슴 깊이 느끼게 하는 이야기에 손이 떨린다.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성을 터부시하는 곳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성폭행을 당해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작은 소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팡쓰치는 사회가 만들어낸 피해자이다. 사실을 알린다고 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게 만든 것은 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이다. 가정이, 학교가, 직장이, 이 모든 것이 속해 있는 사회가 수많은 팡쓰치들을 모른 체한 결과는 실로 비참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과 다른 점은 등장인물들의 이름뿐이다. 이런 일이 알려졌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어쩌면 이렇게나 똑같은지.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피해자에게 비난을 퍼붓는 상황은 없어져야 마땅함에도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여전히 이 상황을 부추긴다. 이 책은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방관자로 사는 것은 대단히 편리한 일이다. 그러나 눈을 돌리고 산다고 해서 성을 제 편한 대로 이용하는 일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방관자가 많은 사회는 결코 변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 걸까. 나보다 힘없는 존재를 눈 깜빡하지 않고 눌러버려도 되는 세상은 없다. 성에 폐쇄적인 이 사회를 바꿀 길은 수많은 팡쓰치들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싫은 것을 당당히 싫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는 사회,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는 우리 모두가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 본다. 억압된 채 눈물 흘리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때 힘을 실어주는 이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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