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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 못다 핀 천재 물리학자 ㅣ 청소년인물박물관 3
이용포 지음 / 작은씨앗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이휘소 박사 하면 박정희 정권 때 핵무기 제조법을 알 고 있었다는 설로 유명하다.
또 1977년 미국에서 그가 운전하던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박사를 둘러싼 소문은 의문투성이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회자하곤 했다.
책 <이휘소, 못다 핀 천재 물리학자>는 이박사의 일대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1935년 1월1일생인 어린 이휘소는 궁금증이 많은 어린이였다.
어린 이휘소의 궁금증을 풀어 준 것은 그의 모친 박순희 산부인과 전문의. 모든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책에서 알 수 있다는 모친의 말에 어린 이휘소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특히 과학과 수학관련 책을 좋아했지만 역사와 시도 좋아하며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6.25전쟁으로 마산에서 서울대 화공과에 입학한 그는 주한 미공군 장교 부인회의 유학장학금 수혜를 입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1955년 전공을 바꿔 미국 오하이오주 마이애미 대학 물리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피츠버그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펜실베니아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박사의 미국 이름은 벤자민 리. 벤자민 프랭크린을 좋아했기 때문에 벤자민을 빌어왔다.
이후 뉴욕 주립대학 물리학과 교수를 거쳐 시카고대학 교수 겸 페르미 램 이론물리학부장을 역임했다. 1977년 42세의 나이에 가족을 태우고 손 수 운전하여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교통사고로 운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주옥같은 논문으로 유명세를 탔다. 자타 공인 노벨 물리학상에 가장 근접한 물리학자였다. 2006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그를 2005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여기까지가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의 저자 이용포는 이박사를 천재소년으로 표현하면서도 매우 노력한 학자로 그리고 있다. 또 이박사가 20년 이상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에 있는 모친에게 보낸 100여통의 편지 중 일부를 공개했다. 이박사의 당시 심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박사의 어릴 적 사진과 미국에서 유학할 때 사진 등 일부 사진도 공개했다.
이 책을 읽은 후 아쉬운 점은 핵무기 제조와 그의 교통사고에 대한 진실이 어느 정도 거론되어있길 바랬다.
하지만 저자는 책머리에서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박사는 핵물리학자도 아니었고, 핵폭탄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핵폭탄 제조를 강력히 반대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전했다. 또 "하지만 미립자의 비밀을 찾는 일이 핵폭탄을 만드는 일보다 하찮은 일일까요?"라는 물음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핵폭탄=이휘소' 수식을 믿었던, 아니 믿고 싶었던 가능성이 무너지면서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도 그의 교통사고에 대한 의문은 더해만 갔다. 콜로라도주 아스펜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맞은편에서 오던 대형 유조차가 별안간 중앙분리대를 넘어왔고 그 중 바퀴 하나가 이박사의 자동차를 덮쳤다. 이 당시 이박사는 규정속도를 넘지 않도록 주의하며 운전 중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지만 모두 졸고 있었기 때문에 이박사가 딴 행동을 했을 리는 없었다.
과연 단순 교통사고인가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꼬리를 물고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지인들에게 이박사의 교통사고를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가 이박사에 대한 대우를 매우 미흡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박사를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만든 것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이박사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우리 정부는 아무런 진실파악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후 이박사는 우리 뇌리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어린 학생 중에 이박사를 모르는 학생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정부가 이박사와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박사 사망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무언가에 압력을 받은 듯 매우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떠난 뒤에야 우리는 이박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너무 부끄럽다. 세상은 이박사를 알고 있었는데 우리만 한국인인 이박사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아울러 이박사가 군대에 가지 않은 점과 유신을 어느 정도까지 반대했는지 그리고 결혼생활에 대해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점은 매우 유감이다. 물론 세월이 많이 지나 자료나 이박사를 알고 있던 사람이 많이 없긴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천재 학자를 잃었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아인슈타인과 이휘소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 전 미국 프린스턴연구소장 오펜하이머 박사의 이박사에 대한 전언에 또 한번 몸서리쳤다.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고 이휘소도 있었지만 아인슈타인보다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
이 책의 저자는 이박사를 우담바라에 비유했다.
"3000년에 한 번씩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가 말없이 피었다 사라지듯 그는 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많은 사람이 그 꽃이 우담바라인 줄도 몰랐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깨닫고 뉘 늦게 아쉬워하듯 그가 떠난 위에야 세상은 그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