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이나 가지. 뭐."
이런 말을 자주 한다. 마치 여행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갈 수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정작 여행 한번 가려면 걸리는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시간과 돈이 없다. 시간과 돈이 있어도 여행 후 일상으로의 복귀를 고민하지 않을 만한 배짱이 없다.
이런저런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이내 "다음에 날 잡아서 가지"라는 결론을 낸다.
결국 여행은 계획으로만 그친다.
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들은 휴식을 위해 여행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꼽았다.
그러나 정작 여행을 가는 직장인은 많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간이 가장 큰 이유이다.
여행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설사 용기 있게 직장까지 포기하고(휴직·퇴직 등) 여행을 간다손 치더라도 여행 후 사회 복귀가 걱정이다.
취업이 안 된다는 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까지 여행을 간다는 것은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은 행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책 <On the road_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또는 미래를 설계하기보다 일단 하고 싶은 여행 실컷 한 다음 미래는 그때 생각하자는 무책임한 사람들로 비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돈이 적게 들기 때문에 소일거리를 하면서 장기 여행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면 그런 여행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또 대부분이 미혼인 상태이거나 아직 40대 이하의 젊은층이므로 장기여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그런 고정관념을 깨라고 설득한다. 시간을 내서, 돈을 모아서, 자식이 어느 정도 큰 다음에, 퇴직한 이후에… 등 여러 가지 조건을 달아 여행을 뒤로 넘기면 그때 가서 또 다른 문제에 걸려 정작 여행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박준은 태국 방콕에 있는 카오산거리에서 만난 14명의 여행자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여행자들의 시작점이자 출발점이라는 카오산에서 만난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의 삶과 생각을 그대로 표현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여행에 나선 30대의 한국인 부부, 자신이 여행한 나라 국기를 가방에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길 좋아하는 17살 미국 소녀, 물건 흥정하는 것을 즐긴다는 25살 이스라엘 아가씨까지…
그들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정말 카오산의 한복판에 서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카오산 거리의 후끈한 온도와 사람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 같다. 세계가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잘 살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대부분 사람처럼 하루 온종일 회사에서 일에 치여 살다 여름 한철 며칠 여행 다녀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가. 물론 이런 삶이 딱히 잘못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삶이 교과서적인 삶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 삶이 성공적인 삶인지, 대안은 없는 것인지, 그런 삶을 살아야 후회 없이 이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은 꼭 그 자리도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서 삶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주장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만이 진정한 삶이냐는 것이다. 다른 대안도 있지만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여행에 나선 17살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인도를 여행하는 게 대한민국 평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건가요? 내가 특별하게 살고 있다고 느낄 때는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어른들이 나를 특별하고 이상한 아이로 바라볼 때, 그때뿐이에요. 이렇게 여행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내가 그렇게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p237)
38살에 여행길에 나선 한 독일 여성은 행복을 찾아 여행을 나섰다며 이렇게 말한다.
"회사에서 하루종일 일하며 사는 것, 그런 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잖아. 나는 내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어.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 거야."(p132)
28살 독일 청년은 조금 독특한 이유 때문에 여행을 떠났다. 사람들과의 관계, 섹스, 마약으로 자신의 삶이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는 그는 하루 종일 비디오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지내는 삶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행을 떠났단다. 여러 나라를 여행한 그는 지금 독일로 돌아가 자전거 배달 일을 하며 새로운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여행은 이렇다. 세상을 사는 시각을 넓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 어떤 이의 삶을 통째로 바꾸기도 한다. 여행이 주는 선물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무의미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여행을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것 저것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다. 거리는 것도 적지 않다. 여행을 위해 여행을 떠나지 않는 한 일반인이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발길을 옮길 수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여행할 준비를 마치려면 정말 오랜 시간,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또 여행 한번 할라치면 이것저것 모든 것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 '가져가면 요긴하게 쓸 텐데'라는 생각에 챙기다 보면 여행가방이 아니라 아예 이삿짐이 되어 버린다. 혹자는 이런 말은 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는 것이 여행이라고. 다 갖추고 여행을 하면 여행이 아니라고 말이다. 필요하니까 여행지에서 사라는 것이 아니라 없이 지내라는 말이다. 그래서 불편함을 깨닫거나 없어도 큰 불편이 없다는 것을 터득하는 것이 여행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장기여행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여행자들이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돈과 시간이 많아 복에 겨워 여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라는 것이다. 돈과 시간을 걱정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 무엇을 해 먹고 살지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책 곳곳에 숨겨두었다.
보물찾기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들고 그 이유를 찾다 보면 어느새 여행준비 계획을 짜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작 용기가 없어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