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닐다 ㅣ 샘터 우리문화 톺아보기 1
류정월 지음 / 샘터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어린 정주영이 무작정 상경 길에 강을 만났다. 빈털터리로 나루터에 도착한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배에 오른다. 그리고 뱃삯이 없어 사공에게 뺨을 맞고는 욕을 얻어먹는다.
"네, 이놈, 어떠냐? 후회되지?"
"네, 아저씨."
"후회될 짓을 왜 해, 이놈아! 조그만 놈이 공짜로 배를 타다니."
"뺨 맞은 게 후회되는 게 아니라 뺨 한 번 맞으면 배를 그냥 탈 수 있는데, 탈까말까 망설이며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서 후회하고 있어요."" (120페이지)
위 상황을 그리면, 정주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또 그 시대를 알아야 미소를 지을 수 있다. 하물며 조선시대에도 농담과 우스갯소리가 있었겠지만 전부 현대인이 이해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상황을 모르면 농담과 우스개가 아니라 '암호'가 될 수 있다.
책 <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닐다>는 조선시대 우스갯소리를 집대성하고 이를 설명한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유행어나 '한 번 해보자는 거지요'라는 우스개도 그 자체만으로는 전혀 우습지 않다. 그 특유의 음색과 상황을 알아야 웃을 수 있다. 조선시대 선조가 이 말을 듣고 웃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저자 류정월은 '펀치라인'이니 '닫힌 우스개'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옛 우스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최근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 중에 '올드 앤 뉴(Old &New)'라는 코너가 큰 인기를 끌었다. 기성세대가 모르는 신세대의 말, 또는 신세대가 모르는 기성세대의 말을 게임으로 풀어나가는 코너다. 하물며 동시대를 사는 사람 사이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있는 데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 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이 부분에 역점을 두어 선조의 우스개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 제목만 보면 조선시대 우스갯소리를 묶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또 책 표지엔 '조선시대 우스개와 한국인의 유머'라는 부제를 달아 두어 더욱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짧은 생각이다. 설사 조선시대 우스개를 소개했다고 한들 이해하지 못하는 우스개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우스개를 찾아 소개하고 친절한 해설을 달았다. 그 해설을 읽은 후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띠게 된다.
맞다. 얇은 미소가 맞다. 우리 선조의 우스개는 박장대소하게 하는 우스개가 아니다. 비칠 듯 안 비칠듯한 여인네의 속저고리처럼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게 우리 선조의 우스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선조의 잔잔한 풍유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처럼 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니는 것과 같다. 이 책을 분석하기보다 노닐듯 읽으면 좋다. 그 시대를 살아보진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그려볼 순 있다.
음담패설은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나보다. 이 책에도 많은 조선시대 음담패설을 소개했다. 성적인 묘사는 오히려 지금보다 자유로웠던 듯하다. 그럼에도 전혀 상스럽지 않다. 절제할 줄 아는 선조의 지혜와 해학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성적 표현의 자유가 구속되면서 음성적으로 변질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이 책에 소개된 음담패설을 통해 선조의 시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양반과 하인 모두 사람이지만 사회적 신분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부분을 우스개나 음담패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눈치 빠른 사람을 알겠지만 이 책은 우리 선조의 우스개를 소개하면서 우리 민족의 풍류를 들려준다. 또 그 시대의 관습과 문화와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다. 또 선조의 언중유골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은 싸워도 치고 막고 싸우지 않고 점잖게 싸운다. 또 평민이 양반의 이중성을 꼬집을 때도 에둘러 표현한다. 그만큼 여유와 풍류가 있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여유와 풍류를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