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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평점 :
오래전 미국 TV엔 '믿거나 말거나(Believe of not)'란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다. 세계적으로 기이한 일들만 모은 프로그램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세상에 이런 일이'정도 될 성싶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현상을 방송하니 제목 그대로 믿거나 말거나라고 할 수밖에…
책 '경성기담(京城奇談)'은 믿거나 말거나를 책으로 엮은 셈이다. 배경이 근대 조선이라는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이 책의 표지의 글귀를 옮기면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이란다. 살인사건 4건과 스캔들 10건을 소개한 이 책의 내용은 정말 기이하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을 되새김질한다면 순종 임금의 장인 윤택영 후작의 이야기를 반추할 수 있겠다. 빚을 지고 해외로 도피하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임금의 장인이 그렇게 했고 결국 빚쟁이가 무서워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지금부터 딱 100년 전인 1906년 황태자 순종의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여러 가문이 동궁계비 책봉 운동을 벌였다.
윤택영도 딸을 태자비로 앉히기 위해 50만원(현재 가치로 500억원)을 로비자금으로 썼다. 당시 경성의 고급 주택 한 채 가격이 만원 남짓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윤택영의 열세살 난 셋째 딸이 동궁계비에 책봉됐다. 졸지에 황태자를 사위로 얻은 것이다. 황실과 사돈을 맺은 지 1년만인 1907년 고종이 양위하고 순종이 황제로 등극했다. 윤택영은 임금의 장인이 된 셈이다. 권력과 명예가 동시에 그의 손에 떨어졌다.
그런데 황실과 사돈을 맺기 위해 뿌린 50만원 중 대부분이 빚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빚 갚을 생각보다는 또 빚을 얻어 호의호식하는 재미에 빠졌다. 돈을 빌려준 채권자는 설마 임금의 장인이 돈을 떼어 먹겠느냐고 생각했고, 일부는 눈치만 볼 뿐 면전에 대고 돈을 갚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느새 빚이 300만원(현재 가치로 3000억원)으로 늘자 윤택영은 왕비인 딸, 심지어 왕인 사위에게도 빚을 갚아달라고 떼를 썼다. 하지만 황실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큰 빚이었다. 결국 빚쟁이의 눈을 피해 중국 북경으로 도망쳤다. 그는 순종이 세상을 떠나 국상을 치를 때만 잠시 경성에 다녀갔을 뿐 이후 해외 도피행각을 벌여야 했다. 1935년 어느 스산한 가을 윤택영은 중국 북경의 한 허름한 병원에서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지키는 가족도 없이… "
이 내용은 <신동아> 1932년 10월호에 '영화에서 몰락으로 조선 귀족 행장기'라는 제하로 실렸던 실화다. 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친왕 대우를 받았으며 해풍부원군이던 후작 윤택영씨가 금일에 왜 300만원의 큰 채무 때문에 몸을 베이징 객창에 두고 파산신청을 받고 있을까? 이와 같은 신세에 있는 귀족이 어찌 윤택영 후작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마는, 윤택영 후작이 순종의 장인 되는 이로 영화가 뭇 귀족을 대표할 만한 지위에 있었던 만큼 윤택영의 이야기가 뭇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코너를 상기하자면 '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이란 소제목의 미스터리 살인사건을 소개한 부분이 떠오른다. 1933년 몸통 없는 아이의 머리가 발견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부검결과 한 살 내외의 남자 아이였는데 이 아이의 몸통은 사건 발생 후 21일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어린아이가 왜, 어떻게 죽었고 머리가 잘렸는지 수사하는 21일간의 내용은 섬뜩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이런 기이한 내용을 묶은 책이 경성기담이다. 괴담이 허무맹랑한 것이라면 기담은 있을 법한 실제 일을 바탕에 깔고 있어 더욱 이목을 끈다. 이 책의 저자 전봉관 작가에 따르면 당시 경성 아니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임에도 역사책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 이 책의 내용이다. 또 그 중에서도 기이한 것만 골랐다고 한다.
이렇게 따지면 야사(野史)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검증도 되지 않아 사실 확인이 되지 않아 정말 말 그대로 '믿거나 말거나'식의 기록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의 객관성과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당시 언론 보도 내용에 기반을 둔 사건을 모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할리우드 액션 드릴러 영화를 보듯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겨도 좋고, 행간을 읽으며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분위기를 느껴도 좋다"고 전했다. 이 책을 아무 생각 없이 대할 수도 있지만 또 그 시대의 정황을 느끼면서 읽으면 더욱 진한 시대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을 권한다. 특히 밤이 긴 겨울, 이 한 권의 책을 손에 쥐면 밤이 짧게 느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