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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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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흔히들, 그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잘 살펴보면 주인의 삶의 태도나 감수성을 얼핏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세계관을 이루는 아름다운 질료들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윤대녕 작가는, 그런 공간의 결과 그 결 안의 감수성을 읽어내고, 그것으로서 세계관을 이루는 질료는 탄탄히 해 온 사람이 아닐까 한다.


윤대녕 작가의 문학세계야, 워낙 고독한 정신적인 정신 세계를 글의 아름다움으로 극복해온 것으로 펼쳐져 온 것이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 공간이란 때로는 사람이 없어 외로운 와중에도 나를 보듬어 주었던 따뜻한 곳이기도 하고, 사람이 그리워 그 자취를 더듬어야 했던 공허한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삶의 권태를 투영해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내쫓기는 지리멸렬한 자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짐나 그런 많은 공간들 중에서도 작가의 부엌에 대한 소회는 그가 공간에 가진 감수성이 대충 어떠했는지 짐작케하는 대목인 것 같다. 아무래도 작가 윤대녕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의 언급으로서는, 어린시절에 이미 부엌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남자가 부엌 출입하는 것이 흔하지도 않거니와 그지 긍정적이지도 않던 시절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가 부엌에 오는 것을 싫어하던 조부모께서,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곳이 부엌의 아궁이리라 생각하셨단다. 그리고 그의 외로움은 후에 어머니와 함께 붙어지내며 딸만큼의 살가운 옆살이로 외로움을 달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부엌 식탁에서 지금 윤대녕 작가가 글쓰기가 가장 행복했던 것도, 그 유년의 공간의 기억과 품들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일 거다.


내게는 어떤 공간이 의미있을까?


새벽에 무한한 나만의 상상과 낙서나 글쓰기 같은 엉뚱한 공작을 가능하게 했던 문 꾹 닫아놓은 새벽녘의 책상도 좋고, 아침에 일어나면 햇살이 두 볼을 두드리는 커다란 창 밑의 마루도 좋다. 이 서로 다른 닫혀진 공간, 열린 공간을 둘다 열렬히 사랑한다. 나중에 내 집을 갖는다면, 문을 활짝 열어 바로 마당으로 튀어나갈 수 있는 소박하지만 목가적이고 아기자기한 마당딸린 집을 사 풀로 가득채운 마당에서 뒹구르리라, 생각하는 참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의 공간이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타인으로부터, 사회의 체계잡힌 시스템으로부터 나만의 세계를 아기자기하게 가꾸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것은 나만의 것을 아끼고 지키고 싶어하는 일종의 소녀같은 자기애일지도 모르겠는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새벽녘에 가꾸고 앓고 애지중지하게 그려낸 모든 것을 햇살도 바람도 풀내음도 어떤 손님도 모두 환영하는 너른 마당에 유리창을 크게 열어 두고서, 함께 나누고 싶은 열망도 있다.


꿈이 되살아나는 이유

 

시인이 자신의 세계를 끓이고 고아서,, 아주 오랜시간 끙끙 앓고 써낸 시가, 아주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듯이 - 나또한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고아내며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내 고독과 타인의 고독이 그 모습 그대로 공존하는 - 광장까지는 아니어도 소박한 꽃밭딸린 마당정도는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것이다.


윤대녕 작가의 고독이 문학으로 펼쳐질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개인의 세계의 성장에 대한 생각은 - 공간에 대한 나의 열망을 바라보면서 내 스스로에게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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