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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부터 한 사람이 여덟 가지 인생을 살았다고 대놓고 말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입부에서 묵미란 할머니를 보면서 그 할머니가 여덟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곧바로 생각이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묵미란 할머니는 그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계획을 철저하고 복잡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묵미란 할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무려 여덟 가지의 인생을 살았던 그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그토록 평범해 보이던 묵미란 할머니, 인적사항을 여럿 만들여서 동시에 여러 인물로 행세하면서 들키지 않는 일 같은 걸 해내지는 못할 것 같던 할머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니. 혹시 평범해 보이던 모습마저도 혹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철저히 위장한 연기였던 걸까요?
그리고 진상은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묵미란 할머니가 덜 안쓰럽고 덜 처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묵미란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격랑 그 자체였던 여러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당장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내고는 했는데, 그런 일이 반복되자 어느새 평범한 여인은 사용한 신분이 여덟 개가 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덟 인생은 묵미란 할머니가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야 할 정도의 상황을 일고여덟 번이나 겪어야만 했다는 상징이자, 묵미란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다사다난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신분을 동원하면서 결국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했던 치열하고 처절한 삶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묵미란 할머니의 첫번째 인생, 두번째.... 그리고 여덟 번째 인생까지. 이 책은 20세기 초중반을 살아간 평범한 여성이 어떤 역사적 사건에 휘말릴 수 있었는지, 동시에 평범한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대였다는 것을 여러 에피소드를 각자 하나씩 풀어내면서 들려줍니다.
할머니가 되었을 때는 묵미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그 평범한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어서 어떤 연유로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야 했는지, 이런 식의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반복된다는 느낌은 딱히 없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새로운 신분까지 만들 정도로 위험을 겪어야 했던 사건이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이, 다종다양하다는 표현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 양상의 갖가지 사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단순히 팔자가 기구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 한국에서 살았던 평범한 서민들의 이야기로 느껴지게 되고,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당대 역사의 파노라마처럼 체감하게 되며, 역사 속 이야기가 생생하게 와닿으며 어느덧 공감하게 됩니다.
묵미란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저 한 개인이 유난히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거라고 정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그 반대였습니다. 묵미란 할머니는 운 좋게 새로운 신분을 만든 덕에 살아남아서 다음 사건을 또 겪게 됐을 뿐, 그런 위기에 처했을 때 불행한 결말을 맞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여러 사건, 그런 사건 속 개인의 이야기를 인상적이면서도 극적으로 엮어내며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