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착각 - 얽매이고 상처받은 가족을 치유하는 마음 기술
이호선 지음 / 유노라이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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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벤트] 가족이라는 착각은 가족이라는 표현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거나 때로는 착각하고 싶어하는 내용에 대해서 가감 없이 다루고 있다. 가족이라면 이해해줄 거야, 가족에게는 이래도 될 거야, 가족이니 그 정도는 당연해, 이런 식으로. 때로는 요구받는 입장이 되고, 또 어떨 때는 요구하는 입장이 될 수도 있는 관계. 그리고 금전을 포함해 경제적 손익이나 요금 등이 청구되면, 그것 자체로도 싸늘하게 느껴지기 십상인 관계. 이 책은 바로 그런 가족이라는 의미와 관점, 범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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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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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이라는 제목부터 심상찮다. 이 제목이 말하는 대상은 보다 널리 쓰이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바로 자살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 카톨릭 종교관에서는 아예 종교적 범죄로 여겨졌으며, 그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과 시대에 항상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던 그 자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


하지만 장 아메리는 자살을 일부러 자유죽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런 통념에 대해 대놓고 반박하는 듯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것도 읽다 보면 어느새 고개가 끄덕여지게 될 정도로 논리적으로.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부제처럼, 장 아메리가 말하는 자살이란 오롯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길이자, 그 길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결단력의 산물이다.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선택할 수 없을 일은 너무나도 많다. 오히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훨씬 더 적어 보일 정도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개인의 의지는 개입되지 않은 영역이며, 어디서 언제 어떤 가족에게서 태어날지는 절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때로는 태어난 존재가 재주껏 하기에 따라 가족관계 등이 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들어, 어느 정도는 개인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따지고보면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일이다. 그리고 태어난 뒤에도 개인이 스스로 자의로 선택할 수 없고, 타의로 결정되는 일은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장 아메리는 자살이란 오직 오롯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며,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마치, 자신의 목숨만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듯이.


19세기 중반 왕정 시대 프랑스에서는, 아이에게 하루에 열 시간쯤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아이의 건강에 좋다는 주장이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적이 있다고 한다. 한때 정신질환자의 전두엽을 훼손시키는 것이 그 사람들을 얌전하게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치료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가 떠오를 정도의 일화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비효율적이고, 야만적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방법으로까지자 여기게 된 주장. 장 아메리가 이 책에서 굳이 언급하면서 부연하듯이, 당시에는 오히려 당사자를 위하는 길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어쩌면 자살을 죄악처럼 여기며 손가락질하면서 도덕적으로 훈계할 대상으로 여기는 관념도, 저런 주장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자살은 오랫동안 도망치는 것처럼 여겨져왔고, 지금도 그런 인식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바로 그런 관념을 언급하면서, 인상적인 두 마디로 그 테마를 정리한다. 자살이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인가? 그 어디도 아닌 곳으로.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의미도 없는 곳으로. 그렇다면 그건 도망이라는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만약 도망이라는 의미가 없다면, 자살이 그저 도망이라는 것은 자살을 깎아내리고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레퍼토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개인이 자살하는 것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확연하게 손해인 일이다. 우선 자신의 자산처럼 삼을 수 있을 노동력이 줄어든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고 실행할 만큼의 행동력과 사고력, 결단력 등이 아랫사람 개인에게 있다는 것은, 윗사람으로서 결코 달갑지 않을 일이다. 자살이 신분제 시절 동안 그토록 강고하게 범죄처럼 지탄받은 일은, 아마 저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자의로 독신으로 지내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상상도 못 할 일이자, 때로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로 여겨졌던 것처럼.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것은 '윗사람' 입장에서는 궁극적 노동력이 줄어들어 손해가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다면 당사자 개인에게는? 이제는 신분제도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퍼지는 등의 이유로, 개인이 자의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인식 변화가 자살과 자살자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쩌면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자살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나, 조롱받을 일쯤으로 여겨졌다. 자살 비슷한 주제만 나와도 훈계할 자격이 생긴다고 여기기라도 할 듯한 분위기는 덤이다. 아무리 타인에게 함부로 훈계하는 것을 무례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풍조가 생기더라도, 자살에 대한 훈계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듯하다. 함부로 목숨을 버리지 말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조차 간섭할 자격과 권리가 생길 듯한 주제로 여겨질 기세이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런 분위기에 맞서서, 자살를 자유롭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을 강조해 자유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결심한다는 것에 대해, 마음가짐과 각오, 행동력 등 여러 측면에서 진지하게 살펴본다. 그리고 자살을 그저 훈계 대상으로만 여길 때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고 미처 인식되지 않던 수많은 이야기가 파생되고, 그를 바탕으로 이 책을 이끌어나간다.


이른바 제 3자의 눈으로 보기에 목숨보다 훨씬 하찮은 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게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의 것을 직접 내던졌다는 면에서는, 마냥 그렇게만 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책은 또다른 이야기를 펼쳐낸다. 타인에게는 별 가치 없는 것이 특정 개인에게는 추억, 개인 신념, 인간관계 등에 따라 돈으로 살 수 없을 귀중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감정적으로 공감할 정도의 사연만 있어도, 객관적으로는 잡동사니 같은 것을 개인적으로는 환금성 높은 보물처럼 여기는 것을 다들 있을 법한 일 정도로 넘어가준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 대상이 어째서 자기 자신의 목숨이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선택지여서만은 안 되는 이유가 없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만은 절대 없을 선택이지인데? 이 책 자유죽음은 단정하다시피 말한다. 그런 이유보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유가 더 많을 모습과 함께.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마음껏 자살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책 5장의 소제목처럼 '자유에 이르는 길'이 된다. 애초에 '문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적극적인' 행동이었고, '세상은 언젠가는 몰락해 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할 세상'에서 자살자는 천재만큼이나 드물 세계이며, 그런 세계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존엄함이 드러나는 행동 중의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은 자살을 부추기지도 않고, 방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살을 맹목적으로 칭송하고 찬양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저 자살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며 비난하거나 비웃고는 했던 풍조가 많았던 것과 달리, 진지한 시선에서 이해하며 그 의미를 깎아내리지 않으려고 할 따름이다. 이 책이 만약 자살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자살이라는 주제를 철학적, 논리적 등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조차 미화처럼 여겨질 정도로, 자살이라는 주제를 터부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을 인식하게 되면, 자살이야말로 누구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선택이자, 그것만으로도 존엄한 것이라는 이 책의 이야기는 더더욱 와닿게 된다. 스스로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개인의 존엄한 선택이라면, 스스로 삶에 대해 결정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 일일지에 대핸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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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써먹는 틱톡 마케팅 - 헤매는 브랜드 마케터를 위한 실행 가이드
강정수 지음 / 이은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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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톡을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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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슨 인 케미스트리 1~2 - 전2권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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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인 케미스트리라는 제목만 보면, 주인공이 화학 강의라도 하는 내용일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예측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는 넓은 의미에서 화학 공부에 해당되는 일을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에서 레슨이라고 할 만한 영역에서는 타의로 쫓겨나지만, 이내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화학 주제의 레슨이라는 분야를 개척하는 데 이른다.


1960년대라는 배경은 좀 생뚱맞아 보일지 모른다. 작중 스토리에서, 1960년대에여만 물리적이나 기술적으로 고증에 들어맞을 요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꼽자면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TV 방송에 출연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TV가 보급된 이후여야 한다는 점이나, 휴대전화가 있다면 성립되지 않을 스토리 전개가 많으니 휴대전화가 보편화된 이전 시대여야 한다는 점 정도? 하지만 그 정도가 고작이고, 하지만 그 외에는 배경이 1960년대이건, 혹은 1980년대쯤이나 그 이후이건 딱히 상관 없어 보일 것 같다. 물리적, 기술적 관점에서는 말이다.


1960년대라는 배경을 굳이 작가가 선택한 지점을 이해하고 분석하게 되면, 그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작중 배경국인 미국에서는 아이비리그 등 여러 명문대학교가 오랫동안 남자만 입학할 수 있다가 1960년 즈음부터 여성도 입학할 수 있게 바뀌었는데, 엘리자베스 조트가 작품 초반 활동하는 곳은 바로 그런 곳이다. 연구소, 특히 이른바 여성스러운 학문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있는 순수과학 연구 쪽의 화학 분야. 그 곳에서 사실상 유일한 여성.


작중에서 엘리자베스 조트는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부인인 밀레바를 언급하는데, 아인슈타인과 캠퍼스 커플이자 모교인 취리히 공과대학에 다니던 시절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밀레바의 처지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밀레바는 아인슈타인과 결혼하게 된 후 가정주부 노릇에만 머무르게 되었고, 훗날 아인슈타인과 이혼한 뒤에도 옛 공과대학 경력은 전혀 살리지 못한 채 피아노 교사 같은 직업만 맡을 수 있는 정도였는데, 엘리자베스는 그런 길을 굳게 거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서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엘리자베스는 전도유망하고 유능한 연구원과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하면 남편의 이름에 가려지고 자신의 연구가 남편의 이름에 귀속되는 것처럼 여겨질 거라면서 청혼을 받았는데도 거절했고, 그것으로 완전히 남남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연인의 아이를 가지고 연인이 죽었어도, 연구하던 노트에 손을 댈 자격조차 없는 남남 취급을 받으면서. 그리고 타의로 아예 쫓겨나게 되고 만다.


엘리자베스의 화학 경력은 공식적으로는 거기에서 끊겼다.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연구소에서는 엘리자베스의 도움을 받아야만 진행할 수 있는 연구가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소 측의 해결방법은, 엘리자베스를 다시 불러오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잠깐씩 일을 맡긴 후 매절처럼 돈을 좀 던져주고 끝내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화학 연구 자체를 그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다고 여긴 게, 연구소 측에서는 궁극적으로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이 소설의 결말까지 감안하면 모호할 지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엘리자베스는 바로 그 때문에 그런 일을 겪고도 스스로 불행하게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새롭게 일어나는 것까지 포함해서. 엘리자베스는 그 모든 일을 겪고도 꿋꿋했다. 꿋꿋하게 화학 연구를 계속하는 것도 포함해서.


엘리자베스는 소중한 딸이 학교에서 겪은 해프닝을 계기로, 방송 코너 하나를 맡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에서는 대놓고 애정으로 요리하는 주부를 연출하며, 적당한 요리를 만들라는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그 상황에서, 화학자로서의 면모를 한껏 선보인다. 요리의 재료,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 등을 화학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해 이야기하는 방송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과감하다 못해 터무니없게 느껴질 정도의 시도. 다행히 새롭고 독특하고 개성적인 발상 정도로 받아들여져, 프로그램의 인기는 높아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엘리자베스를 은연중에 쭉 제한했던 시스템 요소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방송 책임자 측에서 이른바 가정주부 스테레오타입에 충실한 모습을 연출해야 인기를 끌 테니 그렇게 연출하라고 했으면서, 화학 관점 요리 기획으로 훨씬 더 인기를 끌어도 오히려 처음 기획을 계속 밀어붙이는 것이다. 마치 거기에서 벗어나는 건 용납할 수 없고, 벗어나서 더 성공하는 건 더욱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는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맞선다. 꼿꼿하게 맞설수록 상대가 오히려 더 위협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진정성 있는 노력이 끝내 보답받으면서, 그 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것도 모두 밝혀지는 후반부와 결말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에게 선물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호감으로 조금씩 인연을 쌓았던 것이 후반부에서 엘리자베스가 도움을 받거나 뜻밖의 사실이 밝혀지는 전개로 이어지는 대목은, 선량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마음씨 넓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좋았다. 그리고 그 구성이 촘촘하면서도 정교해서, 새로운 인연과 상호 호감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성이라서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하고 이해하며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눈앞에 그려질 듯이 생생하고, 엘리자베스라는 인물과 그 주변의 상황 등도 입체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보여 준다. 도식적인 구도는 꽤 단순한 편인데, 막상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게 딱히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남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심리묘사가 섬세하고 상황 묘사도 인상적이어서 마치 엘리자베스의 심정이나 각오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한 서술 역시 책에 더욱 몰입하도록 이끌고 있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1960년대같은 시대에 화학을 연구하고 싶어한 여성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이자, 유능한데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등 성공하며, 부당하게 빼앗겼던 업적을 나중에 비로소 당당하게 인정받게 되는 등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을 뒤늦게나마 누리면서 해피엔딩을 맞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추구하던 것을 모두 얻게 된 결말은, 엘리자베스에게 합당한 대가이자 독자를 위한 선물처럼 느껴지게 만다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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