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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파트먼트 리뷰대회] 아파트먼트의 시대적 배경은 20세기 후반, 그 중에서도 1996년 즈음의 1-2년이다. 그래서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 오늘날에도 기억될 정도로 유명한 당시의 인기 영화 및 인기 배우, 화제가 된 재판 사건 등 여러 이야기가 현장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배경 요소처럼 언급된다. 그래서 이게 수십 년 전 이야기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째서 굳이 20년도 더 넘은 옛 시대를 배경으로 했을까? 이런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책은 중반부까지만 해도 현대 배경과 별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보여준다. 2020년 즈음으로 배경을 옮긴다고 해도, 1996년 즈음의 역사적 사건 등이 실시간 뉴스처럼 언급되는 장면이나 컴퓨터의 성능이 현대 제품보다 훨씬 낮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위화감이 별로 느껴질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1990년대에 대해 전혀 몰라도 얼마든지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심 테마는 높은 평가를 받는 문학작품을 쓰고 싶어하는 문학도라는, 시대와 배경 장소를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공감되고 이해될 만한 이야기이기에 더욱 그렇다.
아파트먼트의 굵직한 줄거리를 아주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문학도인 주인공 화자가 문학작품 감평 모임 등을 다니면서 이른바 훌륭한 작품성을 갖췄다고 인정받고 칭송받는 작품을 쓰고 싶어하다가, 비슷한 문학도 입장인 빌리와 만나고 가까워진다는 이야기이다. 화자는 빌리에게 사실상 집세 없이 홈 셰어링까지 해 주겠다고 하고, 그 뒤로도 많이 도와준다.
처음에는 화자가 오히려 빌리보다 조건이 좋은 입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빌리가 문학적으로 부쩍 뛰어난 작품을 내놓기 시작하자, 문학도로서 입장이 달라졌다고 화자는 느끼기 시작한다. 막상 빌리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와중에빌리가 자립하기 위해 수천 달러의 장학금에 도전하려 하자, 주인공은 방해하기 위해 집에서 원고가 도둑맞은 것처럼 꾸민다. 그리고 빌리 는 결국 그걸 알아내고, 둘의 관계는 씁쓸하게 깨지면서 끝나버리고 만다. 절도신고 결과 편법으로 홈셰어링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주인공이 값싼 집세로 수십 년 지낼 수 있었던 주거지를 잃게 되는 결말과 함께.
아파트먼트의 이 결말이 특히 씁쓸한 것은, 화자가 교묘한 음모를 꾸미는 교활한 인물이었거나 빌리가 이기적이었다면 이런 파국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빌리는 자기가 자립할 수 있다면 친구인 화자에게 더 이상 손벌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화자는 빌리와 계속 같이 있고 싶어서, 그저 빌리가 자립할 만한 장학금을 받는 것을 방해하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이 결말은 합당하기도 한데, 빌리는 예전에 제출한 사본 같은 원고로 장학금을 받고, 화자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뿐 자신이 직접 잃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화자는 물질적으로는 편법으로 값싸게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정신적으로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다는 죄책감에 짓눌리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화자는 빌리에게 자기 돈과 시간을 일부러 쓰면서 많은 호의를 베푼다. 그 정도로 같이 있고 싶어했기에, 오히려 도중에 깨지지 않다가 그런 파국을 맞았다는 것이 역설적이면서도 인상적인 구도를 만든다. 그리고 한 번 깨지게 된 뒤 많은 시간이 흘러 조명하자, 문학 장학금을 받은 빌리는 조금씩 문학적 명성이 높아지고, 화자는 문학창작 영역에서 제자리걸음 이상은 나가지 못한 이야기가 보여진다. 마치 현대에서 20년쯤 전에 일어난 일을 바라보는 듯한 에필로그와 함께. 그 순간 이 책이 굳이 거의 한 세대 전을 배경으로 삼은 덕에, 본편의 사건이 일어나고 세월이 지난 뒤의 이야기를 결과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