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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모모 / 2021년 6월
평점 :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극단적인 배경 설정에서 예상되는 것에 비하면 꽤 담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욱 감정을 고조시키는 연출 역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은 중반부까지만 해도, 겉으로 보기에는 여주인공에게 특이한 기억상실증이 있는 것 외에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만 이어지는 것 같다. 여주인공 히노 마오리는 매일 기억이 사라진다. 그리고 남주인공 가미야 도루는 평범하고 무난한 캐릭터성만으로 조합한 듯한 인물로, 특이한 기억상실증이 있는 또래 여성 캐릭터와 어울린다는 것 말고는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동안 매일 기억이 사라지는 여주인공이이라는 소재와 상황을 별 기복 없이 밍밍하게 진행하는 듯하다가, 그 기복 없는 평탄함 자체가 이 상황에서는 특이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쯤 깊이 있게 와닿고 공감 되는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도루는 마오리에게 진지한 감정도 없었다. 나름대로 고백하기는 했지만, 좋게 말해야 장난 같은 것이고 대놓고 말하면 사람의 감정을 놀리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오리는 그 장난이나 다름없는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은 매일 기억이 사라지고, 도루는 자신에게 항상 처음 보는 사람이며, 그 전의 추억이나 경험 같은 것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싹 사라진다는 말과 함께.
도루의 심정이 미묘하면서도 꾸준히 변화하는 모습을 소설은 더없이 섬세하게 잡아낸다. 마오리의 고백을 듣고 기억에 대한 비밀을 처음 알았을 때만 해도, 도루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인다. 감정이 있다면 차라리 거짓 고백을 해도 어차피 잊어버릴 테니, 뒤탈 같은 건 없겠다는 안도에 엄청나게 가까워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도루의 그 심드렁한 감정과 기분은 마오리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 계속되고 다시 나타날수록, 조금씩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변하는 지점에서는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미묘하고 작은 변화지만, 그 미묘한 변화가 계속되면서 마침내 초반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바뀌는 부분을 자연스럽고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결말 자체는 웬만해서는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도루와 마오리에게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 같이 간다면 그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고, 도중에 달아날 기회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미묘하게 변하며, 마침내 서로 맞닿게 되는 그 지점까지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담담하고 기복 없이, 평탄하게 쭉 진행되는 듯한 줄거리를 지닌다. 그리고 그런 평탄해 보이는 분위기 자체가 이 소설의 마오리와 도루에게는 절절한 감정의 결정체나 마찬가지이고, 그 독특한 구성이 이 작품을 더욱 깊이 있고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도록 힘을 보태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