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 김난주 옮김 / 소담출판사

 

아주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은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강산이 두 번쯤 훌쩍 변한 시간이 흘러

좋은 기회를 얻어 다시 만난 책,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 그 때 당시 유행했던 것처럼

일본 소설에 탐닉하던 시절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고

작가의 묘한~ 글 분위기에 빠져

이 책을 찾아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 내용은 어쩜 이렇게

마알~갛게 기억이 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니,

그 시절엔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충분히 느끼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은 단편 모음집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남자, 그리고 여자들의

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지요.

어쩌면 평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삶의 모습이건

삶을 살아가는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뭔가 무기력하고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

한 마디로만 정의내릴 수 없는

삶의 껄끄러움 같은 것들을

작가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추정컨대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읽었을 이 책을

그때 당시엔 제대로 체감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도, 인생도 온통 너무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시절,

뜨겁지 않은 무언가의 상태를 잘 용납하기 못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담배 나누어 주는 여자>편은

재혼 커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쫓아 다시 결혼을 하지만, 신의를 저버리기도 하고

신의를 저버린 이와 헤어지진 않지만

완전히 용서하지 못하기도 하는

중년 부부들의 이야기 속에

결혼이란 굴레와 사랑이란 감정의

조용하지만 깊은 파문이 느껴집니다. 또  

견디기 힘들면 헤어지면 된다고,

이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나 싶어서 좀 충격이었지.”

라는 남편의 뒤늦은 고백 앞에

주인공이 꺼낸 첫 마디는

그건 좀 맛이 강해. 가운데 있는 게 맛있어,

마늘크림치즈라서

라고 친구에게 치즈를 권하는 말을 꺼냅니다.

이 전개양상은 에쿠니 가오리 고유의 서술 방식 같습니다.

어떤 문제를 툭~ 던지지만

그 문제에 대해 뜨겁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지극히 너무나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들과 교차합니다.


그게 젊은 20대 때에는 지극히

무기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저를 축~ 늘어뜨리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책을 읽고 한동안 침체의 늪에서 허덕였던 기억은 납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는 지금은

그때만큼 마음의 동요가 크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설 속 일상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인생의 엄청나게 중차대한 문제도 결국 일상 속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부터도

수시로 희석되고 묻히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또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고

불쑥불쑥 되살아나 나를,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죠.

<>이라는 단편은

이혼을 앞둔 부부가 남편의 부모 집에 방문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람 같은 거 안 피워. 피운 적도 없고,

하지만 당신하고는 헤어지고 싶어.

이런 마음, 바람피우는 것보다 더 잔인하지.”

라고 여자 주인공은 무덤덤하게 남편에게 말합니다.

 

내가 배우자에게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바람을 피운다는 말보다

어쩌면 더 깊이 페부를 찌르는

한 마디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충동적으로 헤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진짜로 오래 켜켜이 쌓이고 쌓여

헤어지고 싶어진 상태라는 게 온전히 느껴집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선정되기도 한 단편,

<울 준비는 되어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동거를 했던,

끝난 듯 끝나지 않은 어느 커플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다카시의 친절함을 저주하고

성실함을 저주하고 아름다움을 저주하고

특별함을 저주하고 약함과 강함을 저주했다.

그리고 다카시를 정말 사랑하는

나 자신의 약함과 강함을 그 백배는 저주했다.”

 

끊어진 듯 끊어지지 않은 남녀의 관계,

마음에서 온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변화한 그와 애매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인공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입니다.

놓아버려야 하는 인연이 맞는데도

놓지 못하는 고통...

 

어른이 되면 누구나 저절로 다 현명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른을 되고도 남아,

내가 낳은 아이들은 아직 꼬꼬마들이지만,

십년 이내에 할머니라고 불릴

친구들도 있을 법한 나이를 살아내고도

저 역시 여전히 현명하지 못합니다.

인간관계는 내가 상상하던 것들과 달리

엉키기도 하고, 옅어져버리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


무엇보다 심하게 모난 돌로 살아왔고,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갑게 살아왔던 저마저도

세월이 쌓일수록 더 현명해져서

삶의 모습이 또랫해지기 보다

뒤죽박죽 애매모호한 경우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상태가

극도로 숨 막히게 느껴졌던 젊은 시절과 달리

그럭저럭 뜨뜻미지근한 상태의 엉킨 실타래에

발이 감겨 불편하고 걸리적거려도

또 그런대로 살아내지기도 합니다.

 

20대에 읽었던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인생의 그런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게 버거워

이 책을 읽고 그렇게 침잠했었나 싶기도 합니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읽은

<울 준비는 되어 있다>는 반대의 이유로

조금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변하지 않은 듯 변해온 저의 지난 세월을 느끼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되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울 준비는 되어 있다>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도

많은 세월이 흘러, 저처럼 다시 읽어보면

또 새로운 느낌과, 공감을 얻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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