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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참선 1~2 세트 - 전2권 ㅣ 참선
테오도르 준 박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19년 12월
평점 :
선불교는 중국화된 불교라고 생각한다. 장자적인 사상도 꽤나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마 모르긴해도 우리가 소승불교라고 하는 상좌부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선불교는 무척이나 낯선 종교일 것이다. 참선을 통해 어느날 문뜩 깨닫는다니...이게 대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둘기는 소리란 말인가?
불교는 결국 부처님법을 배우는 것이다.
2600년전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은 경지를 지향하고 궁극적으로 그 자리에 가는 것이다. 생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만일 부처님의 견처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수단과 방법은 문제되지 않는다. 저 피안으로 건너감에 있어 뗏목을 타든, 수영을 하든, 비행기를 타고 가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달마를 초조로 해서 혜능이 완성하고 임제가 꽃을 피운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선불교는 과연 중생들을 부처님이 도달한 저 피안으로 인도하는 충분한 수단이 될까? 솔직히 이건 검증된 바가 없다.
달마 혜능 황벽 조주 임제 그리고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선승 태고 서산 경허 만공 그리고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셨던 전강 청담 성철 향곡 진제 그리고 테오도르 준 박의 스승이신 송담 스님까지...과연 그들은 부처의 견처를 선을 통해 본 것일까? 그 자리에 오른 분들일까?
선불교에서는 이른바 인가를 말한다. 그런데 대체 누가 누굴 인가한단 말인가? 인가를 해주는 스승이 부처님 자리에 오른 정각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만일 정각자도 아니면서 자신의 제자를 깨달은 사람으로 인가해준다면 이거야말로 부처님 앞에서 대죄를 짓는 일 아니겠는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선사 성철 스님은 스스로 오도송을 짓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분도 분명 어떤 견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부처님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또 성철은 법문에서 깨달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고도 하셨다. 어느 토굴에는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은 못 봤다고 하셨다.
성철은 소시 적에 효봉과 만공 그리고 자신의 스승인 동산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은 분이다. 그리고 청담과 향곡과는 다시없는 도반이었다. 후배인 진제와 송담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철이 깨달았다고 인정한 스님은 없었다.
많은 선승들이 스스로 오도송을 지을 만큼 깨달았다고 하는 견처 그게 과연 부처의 경지일까? 혹시 뭔가 특수한 정신적 경험을 깨달음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나는 솔직히 달마나 혜능 그리고 임제가 오른 경지가 과연 부처님과 같은 견처인지의 여부 자체가 의문스럽다.
20세기 한국 최고의 선지식 중 한분으로 손꼽히는 만공선사는 생전에 세 차례 깨달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깨달음은 단박이고 일회성이다. 완전한 깨달음이라면 1회로 족하다. 3번이나 깨달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미완성의 깨달음임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건 일종의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소위 선문답이라는 것도 그렇다.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1)뜰앞 측백나무니라 (2)마른 똥막대기다 (3)판치생모니라...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이런 말들을 놓고 견처를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고들 한다. 무문관의 48측 공안이 일거에 타파된다나? 그러면서 그게 생각을 뛰어넘는 깨달음의 경지라고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 어느 경전을 봐도 이런 엉뚱한 이야기는 단 한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만일 부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런 중국식 선문답을 팔정도 가운데 正語에 어긋나는 妄言이라고 야단치시지 않았을까. 부처님은 덕산처럼 몽둥이질을 하시지도 않았고 임제처럼 느닷없이 할을 하지도 않았다.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中道를 얻어 깨달았다고. 중도란 무엇인가? 무슨 양변을 여윈다느니 쌍차쌍조라느니...이렇게 어렵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중도는 그냥 팔정도다. 팔정도가 중도다. 팔정도가 부처님의 견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동시에 정각자의 경지다.
성철 스님이 생전에 불교의 요체를 중도로 파악하고 중도를 강조한 것은 탁월한 혜안이다. 하지만 그분은 중도를 난해하고 폭이 좁게 설명하였다. 중도=팔정도...얼마나 심플하고 명확한가? 백일법문에서 성철이 설법한 것과 같이 양변을 여윈다는 식의 설명은 세상 만물을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팔정도 가운데 정견에 해당된다. 즉 깨달음의 견지에서는 1/8에 불과하다.
물론 성철은 당대 최고 수준의 학승으로 해박한 불교이론을 공부한 스님이다. 일어판 니까야를 숙독하셨을 것이다. 즉 남전대장경에 나오는 팔정도의 내용을 몰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성철의 중도에 대한 이런 아쉬운 인식은 기본적으로 중국식 불교를 몸담은 선승의 한계 아니었나 싶다.
3조 승찬대사의 저술로 알려진 신심명도 그렇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간택을 버리면(싫어하면) 된다...이렇게 가르쳤는데 이 역시 부처님이 설하신 팔정도와는 거리가 있다. 역시 정견에 국한했을 뿐이다. 정견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온전한 팔정도일 수는 없다. 정견 즉 불이, 분별하지 않는 것만으로 불지인 정각에 오른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초전법륜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선불교의 수행방식이나 선불교가 깨달았다고 보는 경지가 팔정도가 아니라면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과 구분되어야할 중국식 종교일 뿐이다. 이른바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무애자재라는 명목으로 기행을 하고 심지어 음행까지 합리화한다면 그건 부처님법이 아니다. 부처님을 빙자한 망동일 뿐이다. 원효이든 경허든 간에 생전에 부처님과 다른 언행을 보였다면 그건 정각자가 아니다.
선불교가 피안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다. 아마도 뭔가 있기에 달마 이후 지난 1500년동안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 면면히 동양불교의 중심으로 존재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이뭣꼬 화두도 결국 중도 즉 팔정도에 이르는 길이어야 한다.
팔정도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지름길이자 깨달은 후 응당 실천되어야 하는 실천행이기도 하다. 나는 제 아무리 유명한 선승이라도 팔정도가 몸에 체득되어 자연스럽게 그게 실천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짜라고 생각한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원효나 경허 스님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반드시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팔정도는 계정혜로 치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정혜가 완성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참선을 통해 뭔가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피안에 건너간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 시대의 대표적 선승 송담 스님에게서 30년을 공부한 테오도르 준 박의 고민도 혹시 이런 류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