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 지음 / 사이드웨이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두환은 갔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이 세상에, 대한민국에 남겨놓은 흔적과 상처는 너무나 크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의해 저격당한 직후 12.12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5.18을 계기로 권좌에 올랐다.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행위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5공의 전두환 정권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성공, 88 올림픽 유치 등을 감안하더라도 사실 태어나서는 안될 정권이었다. 최초의 문민정부인 YS정권은 반란군 수괴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에 따라 심판했다.

 

오히려 전두환과 노태우 단죄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DJ였다. 국민화합이라는 명분이었다. 5.18의 한을 정치적 기반으로 집권에 성공한 DJ가 5.18 문제에 오히려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역설적으로 호남정권의 한계였다고 본다. DJ는 정치보복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벌어진지 43년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진실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DJ의 집권으로 완전한 마침표가 기대됐던 5.18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매년 그때가 되면 5.18을 둘러싼 국민 사이의 견해 차이가 갈등으로 드러나는 양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정치보복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호남의 한, 5.18의 분노를 기반으로 집권한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있을때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DJ가 대통령직에 있을 당시에만 해도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증인과 자료들이 상대적으로 풍부했다.

 

왜 DJ는 5.18 문제를 역사적으로 종결짓지 못했던 것인가? 이건 자신을 한결같이 지지하고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호남 민심에 대한 결례 아닌가. 도대체 우리 국민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5.18 문제를 언제까지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처럼 서로를 짓누르며 가야만 하는 것일까.

 

이제 5.18 문제에 대해서는 전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시 말해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동의하는 평가와 해법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나 싶다. 일부에 5.18의 역사적 의미가 너무 과대평가됐다는 의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4.19와 같은 대의적 민주화운동이라기보다는 5.17 계엄확대에 따라 연행된 김대중이라는 호남의 지역맹주 구하기적 성격에서 출발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또 일부에서는 80년 광주는 79년 부마항쟁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두 항쟁은 동일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야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5월 당시 사태가 악화된 원인에 대해서도 의견이 구구하다.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이 가장 큰 원인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일부에서는 광주시민들의 순수한 의사와 무관하게, 북한이 혼란상황을 악용하여 혼란을 부채질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논란 속에 실체적 진실에 대한 규명 작업은 더욱 미궁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전두환은 5.18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 사과나 사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전술한 바와 같이 호남의 한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DJ는 5.18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YS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43년이 지난 지금도 5월만 되면 아물지 않은 상처에 상처가 더해지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리되지 않고 끊임 없이 국민적 갈등이 지속되고 또 온전한 수준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것이야말로 전두환이 남긴 가장 큰 역사적 과오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답답하다. 대체 우리 국민들은 언제까지 5월만 되면, 아물지 않는 고통의 포로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데리안 2024-02-13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히 DJ의 의지 부족이기보다 밀실 야합과 타협을 중시하는 국내 정치의 한계,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30년 군부 독재로 인한 추종세력이 건재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1997년 IMF의 폭발로 인하여 독재 청산보다 경제 회복이 우선이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IMF 이전에만 해도 국민들에게 독재는 자유와 민주를 억압하는 절대 악으로 묘사되었던 반면, IMF는 그렇게 떠들던 민주화가 속빈 강정이었으며 차라리 독재 시절이 살기 좋았다는 향수로 이어졌습니다. 대중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첫번째이니까요. 물론 IMF도 따지고 보면 소위 한강의 기적 시절부터 수십년 동안 쌓이고 쌓인 모순이 YS대에 와서 한꺼번에 폭발한 결과지만 어떤 이유이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것은 YS의 몫이죠. 결국 가장 큰 책임은 경제적인 무능으로 국민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실망감을 안겨주었던 YS에게 있지, 임기 내내 그 똥을 치워야 했던 DJ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