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찾는 뇌 - 종교는 어떻게 진화했는가 Philos 시리즈 38
로빈 던바 지음, 구형찬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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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나약함이 종교를 만든 것 아니겠습니까. 이성적으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이나 사건들을 여전히 믿고 있는 인류...2천년 동안 일어나지 않는 재림과 심판, 아무리 수행해도 도달할 수 없는 부처의 경지...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그곳을 지향합니다. 인간이 나약한 증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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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佛經)
이중표 편역 / 불광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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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무엇을 위해 수행하는가? 깨치기 위해 수행한다. 뭘 깨친다는 것인가? 제법무아를 깨치는 것이다. 나(我)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 대승경전 표현에 의하면 오온이 공하다는 것은 깨치는 것이다.

 

여기서 깨친다는 것은 문자나 언설에 의한 공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참이다. 실제 오온이 공하여 나라고 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잠시 어떤 인연에 의해(연기법) 조합되어 있는 지극히 찰라적인 존재라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이다. 그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 즉 無我를 실참하면 탐진치 문제는 사실 저절로 해결된다. 분별과 집착도 사라진다. 내가 없는데 무슨 욕심이 있고 분노가 있고 어리석음이 있겠는가? 무슨 분별이 있고 집착할 것이 있겠는가?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무아를 ‘실참’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2,600년전 6년의 고행과 수행을 거쳐 그걸 체득하셨다. 그리고 45년간 자신이 본 그 경지를 뭇 대중들에게 설파하셨다. 그게 바로 이중표 스님이 엮어서 내놓은 바로 이 책이다. 니까야는 100% 정확하지는 않을지는 모르지만 부처님의 말씀이 오롯이 담겨진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깨침의 경지란 중도로 정의한다. 중도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부처님은 중도를 팔정도라고 정의하셨다. 초전법륜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건 명확하게 다가온다. 중국선사는 평상심이 도라고 했는데 사실 이 평상심은 중도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 평상심에 이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저 밥먹고 잠자고 똥싸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 단견이다.

 

중도를 알면 무아를 실참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 경지, 이것이 부처의 경지이자 부처님이 대중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궁극의 경지이고 역대 선사들이 할과 방으로, 손가락으로 가르친 달(月)이다. 매우 어려운 경지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예전에 성철 스님은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후 수백년 후에 만들어진 경전이기는 하지만 중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니까야(아함경)와 다를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근본불교 입장에서 보면 파격적이고 이상하기까지 한 선불교의 선사들도 결국 강조한 것은 중도이다.

 

그렇다면 니까야든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등 대승경전이든 중도 즉 깨침에 이르는 수단이다. 뗏목인 것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다. 대승경전을 폄하는 사람들도 있고 특히 남방에서는 경전 취급도 하지 않는데 그것도 과연 바른 견해인지 의문이기는 하다.

 

대승경전은 혹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새로운 교통수단 아닐까? 부처님 당시에는 오로지 뗏목과 배 밖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비행기로도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선불교는 다분히 장자의 사상이 많이 들어온 것인데 혹시 그게 더 언덕으로 건너가는 새로운 방편일 수 있지 않겠나?

 

만일 혜능 조주 임제 등 중국의 선사들이 이른 경지라는 것이 부처님의 경지와 동일하다면 단박에 저 언덕으로 가는 새로운 방편이자 효과적인 수단인 선불교도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100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우리가 그걸 점검하고 확인하기는 어렵다.

 

불교가 수행의 종교이고 피안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면 결국 저쪽 언덕에 이른 사람 즉 부처, 아라한에 이른 분들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 이쪽 언덕에서 막 출발한 사람들, 저쪽 언덕은 아예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저쪽 언덕을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실제로 중도를 체험한 사람, 제법무아를 실참한 사람,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본 사람, 그런 분들의 말씀을 듣고 싶다. 부산에 앉아서 서울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실제 남태령을 넘어 한강을 건너, 남대문에 들어와 경복궁과 청와대를 가본 사람의 말에 목이 마르다.

 

그런 분을 부처라해도 좋고 선지식이라 해도 좋고 장자라고 해도 좋다. 금강경 말씀대로 명칭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니까. 입으로만 부처와 선사의 말씀을 설법으로 전하는 사람, 글로써 방편을 설하는 사람보다 실제 그곳에 가본 사람, 실제로 내가 가보니 이렇더라, 이렇게 가면 된다, 이런 가르침을 우리는 갈구한다.

 

어디 그런 분은 안 계신가? 이 시대 왜 그런 분의 말씀은 들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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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육성 도마복음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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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참 많다. 하지만 진짜 크리스챤이라고 평가할만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없고 그저 부활과 대속만 믿으면 천국에 가고 구원받는다고 목청을 높인다.

 

떠드는 자들은 많아도 정말 자기를 희생하고 예수처럼 되려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왜 이런 언행을 보이는가? 이유는 명백하고 또 단순하다. 부활과 대속을 믿는 것은 쉽다. 자기에게 손해도 없다. 그저 그렇게 믿으면 되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어렵다. 왜 어려운가?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싫은 것이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정통에서 벗어난 사이비 종교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아니라고? 마태복음 제7장 21절을 보라. 나에게 주여, 주여 라고 외치는 사람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2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썩 물러가라.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인가? 바로 그 앞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이른바 산상수훈이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생생한 육성이다. 도올은 도마복음이 예수의 육성이라고 했는데 나는 산상수훈이야말로 진짜 예수님의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정말 구원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시라. 지구상에 부를 축적하지 말고, 하늘 나라에 쌓도록 하라. 원수를 사랑하시라. 그리고 남이 나에게 해주길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도록 하시라.

 

그러면 후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수 있다. 그저 부활과 대속만 강조하는 바울식 교리가 지배하는 한국교회, 뭘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바울에 의해 오염된 교리를 넘어 예수의 말씀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다들 아는 일이지만 바울은 인간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음은 물론이다. 아니 멀리서 뵌 적도 없다. 다만 환상에서 봤을 뿐이다. 그 환상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바울은 후에 예수님의 직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등을 만났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물은 적도 없다. 바울은 다만 예수를 신화화하여 자신의 유대교 개혁운동에 이용한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챤들은 바울의 자의적인 교리를 넘어 예수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건 바울이 쓴 전도서를 넘어 복음서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전도서에는 답이 없다. 특히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상수훈이야말로 예수님의 로고스다. 불교로 말하자면 부처님의 법신인 셈이다.

 

우리 같은 인간들은 예수님처럼 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 예수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조금이라도 실천하려고 애써고 노력해야 한다. 그저 부활과 대속만 강조하면서 ‘믿습니다’만을 외치는 사람들은 종국에 이르러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매우 비의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도마복음 역시 그런 길로 걸어가는 하나의 안내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뜻이 애매한 도마복음에 너무 얽매일 일도 아니다. 누가 읽어봐도 명백한 가르침 즉 마태복음 제5장에서부터 7장에 답이 들어 있다.

 

산상수훈이면 족하다. 그게 명백하고도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바울을 넘어 예수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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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조성진 - 2015 쇼팽 콩쿠르 우승 실황앨범 (10주년 기념) [2LP]
쇼팽 (Frederic Chopin) 작곡, 조성진 (Seong-Jin Cho) 연주 / DG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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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연주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이쯤되면 정말 사골국물 수준이다. 우려 먹고 또 우려 먹는다. 우승 이듬해인 2016년 2LP 로칼반이 출시되었는데 일부 팬심에 기대어, 1백만원 내외로 중고시장에 내놓은 사람들이 보인다. 금번 출시가 그런 터무니 없는 거래 시도를 근절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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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공부 - 감옥에서 쓴 편지
조국.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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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조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질러 유죄가 확정되어 복역 중인 사람이, 마치 義人인양 목청을 높이는 이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깝고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文學人은 혼탁한 사회에서 바른 지표를 제시하는 깨인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정래, 정여울 2人, 한숨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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