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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佛經)
이중표 편역 / 불광출판사 / 2024년 9월
평점 :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무엇을 위해 수행하는가? 깨치기 위해 수행한다. 뭘 깨친다는 것인가? 제법무아를 깨치는 것이다. 나(我)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 대승경전 표현에 의하면 오온이 공하다는 것은 깨치는 것이다.
여기서 깨친다는 것은 문자나 언설에 의한 공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참이다. 실제 오온이 공하여 나라고 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잠시 어떤 인연에 의해(연기법) 조합되어 있는 지극히 찰라적인 존재라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이다. 그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 즉 無我를 실참하면 탐진치 문제는 사실 저절로 해결된다. 분별과 집착도 사라진다. 내가 없는데 무슨 욕심이 있고 분노가 있고 어리석음이 있겠는가? 무슨 분별이 있고 집착할 것이 있겠는가?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무아를 ‘실참’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2,600년전 6년의 고행과 수행을 거쳐 그걸 체득하셨다. 그리고 45년간 자신이 본 그 경지를 뭇 대중들에게 설파하셨다. 그게 바로 이중표 스님이 엮어서 내놓은 바로 이 책이다. 니까야는 100% 정확하지는 않을지는 모르지만 부처님의 말씀이 오롯이 담겨진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깨침의 경지란 중도로 정의한다. 중도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부처님은 중도를 팔정도라고 정의하셨다. 초전법륜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건 명확하게 다가온다. 중국선사는 평상심이 도라고 했는데 사실 이 평상심은 중도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 평상심에 이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저 밥먹고 잠자고 똥싸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 단견이다.
중도를 알면 무아를 실참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 경지, 이것이 부처의 경지이자 부처님이 대중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궁극의 경지이고 역대 선사들이 할과 방으로, 손가락으로 가르친 달(月)이다. 매우 어려운 경지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예전에 성철 스님은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후 수백년 후에 만들어진 경전이기는 하지만 중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니까야(아함경)와 다를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근본불교 입장에서 보면 파격적이고 이상하기까지 한 선불교의 선사들도 결국 강조한 것은 중도이다.
그렇다면 니까야든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등 대승경전이든 중도 즉 깨침에 이르는 수단이다. 뗏목인 것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다. 대승경전을 폄하는 사람들도 있고 특히 남방에서는 경전 취급도 하지 않는데 그것도 과연 바른 견해인지 의문이기는 하다.
대승경전은 혹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새로운 교통수단 아닐까? 부처님 당시에는 오로지 뗏목과 배 밖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비행기로도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선불교는 다분히 장자의 사상이 많이 들어온 것인데 혹시 그게 더 언덕으로 건너가는 새로운 방편일 수 있지 않겠나?
만일 혜능 조주 임제 등 중국의 선사들이 이른 경지라는 것이 부처님의 경지와 동일하다면 단박에 저 언덕으로 가는 새로운 방편이자 효과적인 수단인 선불교도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100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우리가 그걸 점검하고 확인하기는 어렵다.
불교가 수행의 종교이고 피안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면 결국 저쪽 언덕에 이른 사람 즉 부처, 아라한에 이른 분들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 이쪽 언덕에서 막 출발한 사람들, 저쪽 언덕은 아예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저쪽 언덕을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실제로 중도를 체험한 사람, 제법무아를 실참한 사람,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본 사람, 그런 분들의 말씀을 듣고 싶다. 부산에 앉아서 서울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실제 남태령을 넘어 한강을 건너, 남대문에 들어와 경복궁과 청와대를 가본 사람의 말에 목이 마르다.
그런 분을 부처라해도 좋고 선지식이라 해도 좋고 장자라고 해도 좋다. 금강경 말씀대로 명칭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니까. 입으로만 부처와 선사의 말씀을 설법으로 전하는 사람, 글로써 방편을 설하는 사람보다 실제 그곳에 가본 사람, 실제로 내가 가보니 이렇더라, 이렇게 가면 된다, 이런 가르침을 우리는 갈구한다.
어디 그런 분은 안 계신가? 이 시대 왜 그런 분의 말씀은 들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