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눈뜰 때 소설Y
이윤하 지음, 송경아 옮김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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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어쩌면 길게, 때로는 짧게 느껴질 신기한 시간이다. 나만 해도 오늘 하루에 있었던 일을 낱말 하나(예를 들면 남산)로 축약할 수도 있고, 장편소설을 쓸 수도 있다. <호랑이가 눈뜰 때>는 주황 부족 세빈이 겪은 해태호(전함)에서의 하루-뿐만 아니라 해태호에 오기까지의 과정-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만 SF 장르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소설Y 클럽에 연달아 당첨이 된 기쁨을 뒤로 한 채, 내가 과연 이 책을 완독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다행히 걱정이 무색할 만큼 나는 하루만에 이 소설을 다 읽어버렸다. 토요일 하루 동안 나는 세빈과 함께 주황 부족에 있었고 해태호에도 있었다. 나는 세빈과 다른 공간에서 같은 하루를 맞이하며 그이(세빈은 논바이너리이기 때문에 소설에서처럼 ‘그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의 이야기를 읽어갔다.


세빈은 주황 호랑이 부족의 가장 어린 호랑이령이었고, 인간의 모습과 호랑이 모습을 왔다 갔다 하며 생활한다. 주황 호랑이 부족은 부족 간의 유대가 유독 긴밀했는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유대는 개인과 부족 사이의 유대보다 약했기 때문에 부족을 등지는 행위를 했을 때 그 개인은 부모를 비롯한 부족 전체와 연을 끊게 됐다. 주황 호랑이 부족은 ‘천 개의 세계’라는 세상의 한 부족으로, 이곳에는 호랑이 부족 외에 인간, 구미호, 천인 등 여러 종이 살고 있었다. 천 개의 세계가 아닌 곳에 사는 존재들 또한 있고, 천 개의 세계에 대항하는 적도 있으며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서 대적하며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우주를 항해하는 전함들은 각자의 이름(해태호, 창백한 번개호 등)이 있고, 이 전함들의 지휘자인 선장, 그 아래로 여러 계급(세빈이 속한 생도는 그 계급 중 가장 아래다.)이 전함을 구성하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전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SF 용어들은 둘째치고 마블이나 DC 영화에서 전작을 보지 않으면 줄거리 이해에 난항을 겪듯 소위 그런 어려움이 있어서다. 심완선 SF 평론가가 남긴 편지에 작가의 전작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그 전작들을 읽는다면 천 개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우주군이 싸우고 있는 적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SF에 이제 갓 입문한 나에게 이만한 호기심을 들게 한 것만으로도 나는 <호랑이가 눈뜰 때>가 잘 쓰인 소설이라고 감히 평가해본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주황 부족과 한국 가족의 연관성이다. 주황 부족과 한국 모두 가족이 가진 의미가 크다. 한국의 가족엔 유교가 큰 영향을 미쳤다. 주황 부족은 가모장이라는 부족의 지배자가 독재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하며 가족이란 크고도 높은 울타리를 만든다. 한국과 주황 부족에서는 가족과 부족이라는 울타리가 큰 만큼 그 안에서 튀는 행동, 집단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존재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념에 가까운 정신적 지배는 개인의 주체성을 자연히 박탈하며 각각의 구성원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한다. 세빈이 삼촌인 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처음에 갈등하는 것은 가모장이 한 말에서 비롯된다. 부족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그것은 세빈 개인의 신념을 위태롭게 한다. 모든 행동에 정답은 없지만, 가장 정답에 가까운 행동은 내가 내 신념대로 행동했을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세빈은 부족이 아닌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했고 이 결과가 하순 제독(세빈의 친척)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이라 해도 세빈은 후회하지 않았다. 세빈이 속한 우주군과 그들이 싸우고 있는 적, 우주군 안에서도 해태호와 세빈의 삼촌인 환과의 싸움. 그 누가 선이고 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세빈이 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고 나아갔다는 것에서 이 소설은 성장을 말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까지 나는 세빈을 응원했다. 세빈은 어른이 된지 한참이나 된 나보다 더 단단한 인물이었다. 내가 아직 벗어나지 못한 가족이란 틀을 세빈은 본인의 의지를 발판 삼아 벗어났다. 어쩌면 이 소설은 세빈을 통해 도약한 나의 성장이 아닐까.

#호랑이가눈뜰때 #창비 #소설Y #소설Y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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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부 종이접기 클럽 (반양장) - 천 개의 종이학과 불타는 교실 창비청소년문학 118
이종산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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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중학교의 도서부이자 종이접기 클럽 멤버인 세연, 모모, 소라. 이 세 명의 단짝친구들이 풀어가는 이야기인 <도서부 종이접기 클럽>은 그들이 과거로 여행한 것처럼 나를 십여년 전의 중학교 2학년 시절로 이끌었다. 중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넘었기 때문인지 굵직한 기억들이 아닌 이상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내가 도서부원이었던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23년 풍영중학교의 도서부엔 세연, 모모, 소라 이 세 사람이 있었다면 2011년의 모 여자중학교의 도서부엔 내가 있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사실 내가 도서부에 가입한 게 중학교 2학년인지 3학년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도서부의 부원인지 부장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도서부였다는 것. 그 사실 하나를 떠올리자 잊고 있던 기억이 솨아아 몰려왔다. 당시 도서부 담당 선생님은 우리 학교로 발령받은 새내기 선생님이었고 국어를 담당하셨다. 나이는 생각해보면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는데 그땐 선생님이 무척이나 어른같았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처음 선물해주신 책은 김려령 작가님의 <완득이>. 책마다 앞장에 학생 개개인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써주셨는데 문구가 기억나지 않는데도 깨끗한 필체로 써주신 글귀가 흐릿하게 떠오른다. 다시, 나는 도서부 당번 책상에 앉아있다. 2층 맨 오른쪽 끝의 투명한 도서실 문을 열면 그 바로 오른쪽에 있던 도서실 대출반납 책상. 그곳은 각 시간마다 당번이던 도서부원이 대출이나 반납을 도와주거나 책을 정리하거나 하며 자리를 채웠다. 뭉터기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음에도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내가 종종 그 자리에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떨고 반납된 책을 정리했던 기억은 또렷하다. 그땐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책을 지금만큼 좋아한 것도 아니면서 도서부엔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세연이가 소라를 동경하는 마음처럼 당시 내가 동경했던 친구(그 아이는 책을 굉장히 좋아하고 대식가처럼 책을 마음으로 먹으며 양분삼던 친구다)를 조금이라도 따라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거다.

도서부에 얽힌 본인의 이야기를 쓰다보니 너무 장황해졌다. 그때는 세연, 모모, 소라 삼총사의 경험처럼 환상적인 일이 아니었어도 갈색빛이 감도는 고요한 도서실이 주는 이미지 자체로서 이미 환상 속에 들어와있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기억 덕분에 굳이 책을 빌리는 목적이 아니어도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도서관, 책엔 항상 친구들이 있었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로가 읽은 책을 소개하거나 책을 선물하거나. 우리는 책으로 이어지고 통하고 있었다. <도서부 종이접기 클럽>에 나오는 ‘일심상조불언중’이란 말은 중학교 한문수업 때 고어를 해석했던 시간을 떠오르게 하며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나중에 이 뜻을 알고 나니 중학교 시절부터 내 곁에 계속 머물러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한마음으로 말이 없는 가운데 서로 비추어 주는 사이. 친구란 그런 관계를 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세연이의 말에 동감하게 된다. 과부하 상태에 빠진 것도 모른 채 지내다가 어제 기어이 내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는데 이것을 멈춰주고 덜어내준 사람이 바로 중학교 친구였다. 1937년의 풍영중학교로 향하는 세연이에게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용감하다.’며 응원을 건네는 소라처럼 어제의 나는 세연이가, 내 친구는 소라가 되어 우리만의 응원을 해주었다. 덕분에 오늘의 나는 어제처럼 여전히 힘든 상황에서도 무언가에 든든히 업혀 있는 것처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소설Y 클럽의 첫 미션인 인증을 위해선 종이접기를 해야 했다. 미션이었던 팬더와 단풍, 물고기, 새 접기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종이접기의 세계가 이리도 다채롭구나 느끼면서 한편으론 소설 속에서 팬더가 세연이의 길잡이를 해주고 단풍이 풍영중학교를 상징하는 것 등 소설의 숨은 묘미를 찾는 재미가 있었다. 그처럼 도서부가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면, 종이접기 클럽은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이자 중요한 상징이 된다. 종이학을 접어 달라는 종이학 귀신(윤경희 선생님)과 그와 함께 보이는 어떤 여자아이(수이)가 붉은 기운(거짓말 탐지)을 느낄 수 있는 세연이에게 나타난 이유는 약속을 이어나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수이와 세연, 윤경희선생님 세 사람의 개인적인 약속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과거의 우리(수이, 삼정, 혜민, 윤경희선생님 등)를 잊지 않겠다는 현대의 우리(세연, 모모, 소라 등)의 약속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우리가 계속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현재를 있게 한 과거의 우리다. 책의 끝에 다다르면 세연이는 붉은 기운에 휩싸인 삼정이와 아이들을 일본군에게서 재치있게 구해낸다. 책엔 세연이의 이러한 행동이 역사를 바꾸었는지, 혹은 사람들 개인의 인생을 변화시켰는지 서술되어 있지 않다. 또, 세연이가 이들을 구해내지 않았어도 역사적, 개인적으로 지금과 달랐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세연이의 행동은 과거와 현재를 연대하게 만드는 용기있는 행동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태도이자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서부 종이접기 클럽>은 역사의식이 사라져가고 인간 불신이 기본이 되는 현대사회에 따뜻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 아닐까.

<도서부 종이접기 클럽>은 나의 전성기(?)였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따스한 소설이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들이 대부분 중학교 시절에 갖추어졌고, 그때의 사람들이 지금껏 곁에 남아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버팀이 되어 주었다. 누구에게나 힘든 지금이다. 지금을 버티게 하는 건 어쩌면 다가올 미래보다는 지나온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도서부종이접기클럽 #창비 #소설Y #소설Y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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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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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없다.’는 말을 요즘 꽤 자주 쓴다. 누구에게나 기본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경우 없는 경우를 자주 마주한다. <경우 없는 세계>란 분명, 내가 겪은 것처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출 청소년, 학교밖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대학교까지 포함하면 그 햇수는 늘어나겠지만, ‘학생은 학생답게’ 지내야 한다는 말은 보통 이 초중고 12년 동안에 많이들 들었을 것이다. 공부머리쪽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어렸던 시기에는 두들겨맞는 수준으로 나에게 핀잔이 날아왔다. 집이 싫었다. 그러면 집을 나가면 된다. 선택지가 있음에도 집에 계속 머무른 것은 용기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집을 나가면 더 고생한다는 암묵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차라리 부담스러운 기대를 받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을 땐, 스스로가 한심해서 속상했다. <경우 없는 세계>의 ‘인수’에게 초장에 안타까움을 느낀 건 이런 이유 때문이겠다.


소설에선 10대와 30대의 인수가 함께 등장한다. 사람의 본질은 그대로겠으나 30대의 인수는 10대를 지나오며 후회했던 것들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의 기억 속 A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한 ‘이호’는 과거의 자신처럼 가출 청소년이다. 이호는 일부러 차에 뛰어들어 다친 다음 운전자에게 받아낸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인수가 이호를 모른척할 수 없던 이유에도 분명 A가 있었다.


이호를 자신의 집에서 기꺼이 지내도록 한 30대의 인수를 만든 것은 10대 시절에 만난 친구 ‘경우’다. 경우 또한 가출 청소년이었으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훔치거나 부당하게 얻은 돈으로 생활하지 않았다. 가게에서 사람들의 신임을 받으며 생활비를 떳떳하게 벌었다. 똑같이 먹고 살기 힘든 입장에서 경우가 정도를 잃지 않은 것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수를 포함한 성연, 지민 등의 아이들은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저 시간에 삶에 자신을 맡겨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아이들이 시간과 삶의 존재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면 경우는 달랐다. 경우는 언젠가 엄마와 함께 살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떳떳하고 깨끗한 삶을 만들기 위해 주체적으로 살아간 경우. 이런 그가 인수에겐 눈부실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 경우는 인수 삶의 기준이 되었다.


‘경우 있는 세계’에서 경우를 닮아가려던 인수는 다양한 사건에 휘말린다. (휘말렸다기에는 본인이 선택한 것이지만)악덕 사장에게 열정페이를 받아가며 의심없이 무보수로 일한 것, 같이 생활하는 여성 가출 청소년의 성매매 현장을 급습하여 성매수자에게 돈을 받아내는 것에 가담하는 등 경우라면 하지 않을 일들에 스스로 가담하게 된다.


인수는 점점 살이 빠진다. 20kg이나 빠지며 홀쭉해지지만 마음의 허기는 커져만 간다. 자신이 집을 나오게 된 계기인 아버지. 인수는 그를 마주하기 싫지만 어떻게든 가족이 자신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가족의 삶에 자신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은 욕구에 몇 번씩 집을 찾아간다. 집에는 자신의 대체재인 (대체라기엔 인수보다 더 대접받으며 사는) 고양이가 살고 있었다. 마주한 현실에 허기는 커져만 가고, 인수는 가출한 동료들이 있는 ‘우리집’으로 돌아간다. ‘우리집’은 주영이라는 인물이 소유한 반지하방이다. 정작 집주인인 주영은 밖을 배회하며 살았고, 그 집은 잘 곳 없는 가출 청소년들이 오고가며 생활하는 터전이 되었다. ‘우리’라는 말이 주는 친근감과 소속감에 비해 ‘우리집’에 사는 아이들에게 유대감은 없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우리집’에 머무는 아이들. 인수에게도 ‘우리집’ 현관문에 붙은 구름 모양의 ‘WELCOME! 행복한 우리집’ 스티커는 거슬려 눈에 밟힌다. 단 한 명, 경우만이 더럽고 쓰레기가 넘치는 ‘우리집’을 청소하고 그곳에서 요리도 하며 생활한다. 살아간다는 것과 생활하는 것이 주는 미묘한 차이를 경우가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은 앞서 언급했던 A의 죽음으로 인해 끝을 맞는다. A 또한 누구나 올 수 있는 ‘우리집’에 몇 번씩 머물렀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외관으로 인해 다들 그를 멀리했다. 인수는 예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A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들었다. 30대의 인수가 만난 이호처럼 A는 움직이는 차에 몸을 들이받으며 운전자에게 돈을 뜯어냈다. 생존 방식이라기엔 너무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날도 A는 차에 몸을 내밀었지만 운전자는 멈추지 않고 A를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뺑소니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집’을 찾은 A는 분명 길바닥에서 쓸쓸하게 죽기는 싫었을 것이다. 죽더라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길 바라지 않았을까. 바깥에서 상처를 입고 들어왔지만 결국 ‘우리집’에서 죽은 A. 그의 몸에 남아있는 흔적들은 가출 청소년이라는 ‘우리집’ 멤버들의 취약성과 더불어 그들이 폭력적일 것이라는 편견에 맞물렸다. 경찰은 분명 ‘우리집’ 아이들이 A를 때려서 살해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가 A의 죽음 이후의 삶을 두려워했다. 이 모든 두려움은 인수의 결정적 한 마디로부터 시작됐다.
“믿어줄까? 안 믿어줄 것 같아. 우리가 죽였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결국 몇 명의 아이들이 주도하여 A의 시체를 유기한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경우가 있었다. 어쩌면 경우는 A가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리집’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엄마와 함께 하는 삶은 끝났을 것이라고 예감했을테다. 아이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상황도 예상했을까? 시체를 유기하기로 했을 때 아이들은 경우가 허튼 짓(아마도 신고)을 하지 못하도록 그를 데리고 갔으나, 결국 경우에게 시체 유기 장소를 알려주는 게 되었다.


얼마가지 않아 모두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경우가 자수했기 때문이다. 인수는 아버지를 통해 ‘우리집’ 아이들 중 유일하게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다. 변호사는 인수가 무죄를 받을 수 있도록 질문을 퍼붓는다.
“그래. 그럼 네가 그애 시신을 묻자고 했니?”
인수는 생각했다. ‘내가, 그랬나? 그런 적은 없었다. 나는 다만,’


아마도 뒤에 올 말은 ‘경찰에 신고하려는 경우를 말리고 다른 아이들의 약점을 끌어올려 시체를 묻을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다.'는 것일테다. 시체를 직접 묻지 않았어도, 인수가 그때의 어수선했던 ‘우리집’ 분위기를 전환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로인해 결국 A의 시신은 땅에 묻혔다.


인수는 무죄를 받았다. 경우는 이 일을 최초로 신고하여 자백한 것을 감안하여 8호 처분을 받았다. 그날은 엄마와 함께 살기로 한 경우 삶의 목표가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A의 시체를 묻고 난 후로 인수는 귀신을 본다. 몸에는 알 수 없는 추위가 몰려들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된다. A가 자신을 묻도록 유도한 인수를 저주했다는 오컬트적 사고보다는 인수 본인의 죄책감 때문에 귀신을 보게 됐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A는 죽었고 그런 A를 계속 떠올리며 자신의 죄를 상기하기 위해서는 이미 죽은 존재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경우 없는 세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경우는 죽었다. 경우는 오토바이로 치킨을 배달하다가 차에 치여 즉사했다. 인수는 경우가 죽은 후에도 경우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경우와 가장 친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오래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경우가 집을 구하고, 그애의 소원대로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더라도 그때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두운 마음 한편에는 저렇게 가식적이고 답답한 애는 도무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고, 그애에게 과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며 경우에게 정을 떼기 위해 마음속으로 고군분투했다.’


분명, 경우 없는 세계를 슬퍼하고 그의 죽음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경우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30대의 인수는 이호를 만난다. 그가 A처럼 죽음을 맞지 않도록, 연약한 삶을 지지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수는 자신의 죄를 덜 수 있을까. 다만 그는 기회를 바랐다.
‘부디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햇볕을 쬐면 정화되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경우 없는 세계>를 읽으며 떠오른 동창이 있다. 사실 동창이라 하기엔 애매한 것이 그 아이는 우리 학교에 3개월 정도만 있다가 다른 학교로 다시 전학갔고, 계속 그 아이와 연락을 이어오던 몇명을 통해 그 아이가 가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반만 알고 있던 그의 가출 소식은 전교로 금세 퍼졌고, 전학을 올 때부터 심상치 않았던 그에 대한 소문은 그가 학교에서 사라지자 더 무성해졌다. 나도 그랬듯, 중학교 2학년이라는 나이는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소위 노는 아이가 되는 것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시기였다. 전체가 정해놓은 규율의 장에서 혼자 균열을 일으켜 틈을 만드는 그 아이의 존재는 멋져보이기까지 했다. 미성년자임에도 담배와 술이 익숙하고, 성인 남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그때는 우리와 다른 경지에 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그때로부터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한참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오른 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그 아이에게도 경우같은 아이가 곁에 있었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그가 무사히 살고 있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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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쫓아오는 밤 (양장) - 제3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수상작 소설Y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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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한 달 동안은 독서에 쏟던 시간을 글쓰기에게 양보했다. 하루에 정해진 양은 없어도 매일 자유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쉽지는 않았고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을 낸 모든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지는 나날이었다. 글쓰기 챌린지가 끝나갈 무렵 창비 소설Y 클럽 5기 소식을 접했고 내가 생각보다 여유롭게 독서하는 시기를 기다려왔다는 걸 실감했다. 마침 오늘 있던 약속이 취소됐고 한동안 평일에도 바빴던 시기를 감안해 오늘 책을 다 읽어나갔다. 가독성이 굉장히 좋은 책이라 읽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여러모로 암시하는 바가 많았다. 서평을 잘 쓰진 못해서 아마 감상평이 될 듯한 <폭풍이 쫓아오는 밤> 후기를 시작한다.

비가 올 것 같은 저녁에 이서는 아빠와 동생과 함께 낯선 장소에 와 있다. 그들은 캠핑을 하러 온 수련원에서 갑자기 인터넷 연결이 끊기는 곤란함을 겪고 아빠는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관리동으로 향한다. 아빠가 나간 방 안에서 이서와 동생 이지는 둘만 남아 고요히 자리를 지키지만 옆 숙소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떠들며 그들만의 세상을 즐기고 있다. 이때 창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리고 이서는 이지와 함께 바깥에서 안 보일 만한 장소에 숨는다. 소리 내며 다가오는, 동물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기괴한 모습을 한 ‘그것’은 옆 숙소의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습격한다. 이서는 여섯 살 동생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그것이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을 때쯤 아빠를 찾으러 밖으로 나선다.

한편 수련원의 또 다른 곳에는 수하가 있었다. 수하는 교회 사람들과 이곳 수련원으로 왔고 저녁이 되어 따분해지자 바깥을 걷다가 관리동 부근에서 피 묻은 흡입기를 줍는다. 피 묻은 물건이 심상치 않았던 수하는 약주를 한 관리동 직원에게 유실물을 전해주고, 이때 아빠를 찾아 관리동으로 온 이서, 이지 일행과 만나게 된다. 이서는 자신이 본 그 ‘동물 같(70쪽)‘은 것에 대해 관리동 직원에게 말한다. 직원은 “혹시 꿈 같은 걸 꾼 거 아니니?”(71쪽)라며 이서의 말을 믿지 않지만 바깥을 순찰하기 위해 관리동을 나선다. 관리동에 남은 이서, 이지, 수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과 마주한 관리동 직원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숨으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것이 ‘정확하게 관리실 2층을 쳐다보고 있었(78쪽)’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그것’과 이서 일행의 쫓고 쫓기는 관계가 계속된다. 숨을 곳을 찾아 수하의 교회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로 가지만 대학생 인솔자 중 한 명인 성광이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은 술 냄새를 따라오기라도 한 듯 단숨에 그들의 은신처를 찾아내고 이서 무리는 위기에 처한다. 이서는 ‘그것’과 대치하면서 자신의 ‘붉게 변해 일그러진 왼손의 화상 흉터(98쪽)’를 드러내고, ‘그것’은 자기 ‘얼굴 반쪽과 몸 곳곳을 덮은’ 흉터와 비슷한 이서의 팔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때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를 들은 ‘그것’은 숙소 바깥으로 단숨에 몸을 빼낸다.

총을 쏜 사람은 수련원 인근 개 농장에서 일하는 ‘박 사장’이었다. 그는 이서 일행에게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떨떠름한 태도로 요청을 받아들인다. 꿍꿍이를 숨기는 듯한 박 사장에게는 위험한 비밀이 있었다. 그는 어느 노쇠한 회장이 소유한 개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곳은 표면상 개 농장일 뿐, 사실은 회장이 아끼는 수집품인 ‘그것’을 관리하는 공간이었다. 박 사장은 회장에게서 그것에 관한 일화를 듣는다. 죄를 지은 사람만 잡아간다는 악마. ‘그것’은 악마였다. 그렇게 2년 정도 농장에서 일해오던 박 사장은 비바람이 미친 듯이 몰아치던 그 날 회장의 비서로부터 갑작스런 해고 전화를 받는다. 그가 전화를 받는 동안 악마는 자신의 사육장 창살을 휘어버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 사장은 이서 일행에게 이런 얘기를 하진 않았다. 이서와 수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수련원 차를 타고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박 사장은 그때까지도 ‘신고를 받고 들이닥친 경찰이나 전문 엽사들한테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저 괴물이 사살되어 버리는 경우(184쪽)’만 걱정하고 있었다.

이서와 수하, 박 사장은 악마를 한 곳으로 유인하여 총을 쏴 재기불능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서는 악마가 술에 이끌려 이동함을 깨닫는다. 매점에서 최대한 챙겨온 술병을 강당 바닥에 깨버리니 바닥이 술 냄새로 진동한다. 술 냄새에 이끌린 악마는 강당 앞까지 오지만 이서가 강당의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때까지 강당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강당에서 이서와 마주한 악마는 처음에는 이서의 반격에, 나중에 가세한 수하의 반격과 박 사장이 쏜 마취총에 잠시 정신을 잃는 듯 했지만 더 분노한 모습으로 일어서고 마침내는 이서가 던진 라이터의 불에 타 고통스러워한다. 이서와 수하는 박 사장을 이끌고 강당을 벗어나 다른 생존자를 찾게 되면 소리쳐 알려주자며 잠시간 흩어진다. 이서가 계곡 밑에서 정신을 잃은 아빠를 찾고 수하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올라왔을 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써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폭풍이 쫓아오는 밤>은 영어덜트 소설이라 그런지 고등학생인 이서와 수하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들이 낯설지 않았다. 몸은 성장해가지만 과거의 기억과 행동에 머물러 자라지 못하는 내면의 아픔이 안타까웠다. 더 행복해지자고 마법처럼 말하던 엄마는 지금의 아빠인 새아빠와 만나 재혼하고 이지를 낳는다. 이서는 열한 살 차이가 나는 동생 이지와 엄마, 아빠를 보며 ‘진짜 가족이구나. 저 셋은.’(103쪽)하고 느낀다. 어느 날 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이지를 챙길 새도 없이 잠이 들어버린 이서는 퇴근한 엄마와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 그리고 울고 있는 이지와 마주한다. 거기서 이서는 ‘목이 조여드는 느낌(113쪽)’을 받고 집을 나서려 하지만 엄마가 그런 이서를 붙잡고 드라이브를 가자며 함께 나간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서는 엄마에게 그동안 담아왔던 이야기들을 퍼붓는다. 이런 이서의 모습에서 나를 겹쳐봤다.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한꺼번에 터뜨리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이서의 엄마는 한쪽으론 이서를 달래고 다른 한쪽으로 운전을 하다가 음주운전 운전자의 차에 치여 운명을 달리한다. 이서는 찌그러진 차체에서 자신을 끌어 올리던 운전자의 술 냄새를 맡은 후부터 술 냄새가 기분이 나쁘고 역했으며 그 사건으로부터 왼팔에 화상 흉터를 얻는다. 그날 이후로 몸과 마음이 모두 상처투성이가 된 이서였다.

이서와 악마는 여러모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악마의 몸을 반쯤 덮은 흉터는 이서의 화상 흉터와 비슷하다. 악마는 이서를 공격하려다가도 이서 팔의 흉터를 보고 멈칫한다. 악마는 이서에게서 무엇을 읽어내려고 했을까.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악마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신화 속의 이야기처럼 전해오는 악마에 대한 추측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리저리 팔리고 고문을 당하고 술을 억지로 먹으며 사랑받지 못한 존재를 악마로 만들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악마는 박 사장을 고용한 회장의 수집품이 되기 이전에 어디에서 무얼 하다 온 존재인지 알 수 없지만 <폭풍이 쫓아오는 밤>을 환상문학처럼 보이게 만드는 큰 장치가 된다. 박 사장은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쇠약한 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농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회장은 ‘십 년은 젊어지기라도 한 듯 힘이 넘치는 것 같’(170쪽)은 모습을 보인다. 아마 그는 악마의 피를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먹으면 이렇게 손발에 힘도 차오(175쪽)’른다는 회장의 말에서 짐작하면 회장은 정기적으로 악마에게서 피를 착취함을 알 수 있다. 피를 뽑히거나 여러 상황에서 저항하는 중에 악마는 몸의 반쯤이나 되는 흉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이서에게 묻고 싶지 않았을까. 네가 겪은 아픔도 나와 같은 것이었냐고.

그럼에도 악마는 악마에 불과하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고 늑대와 곰을 합쳐 놓은 얼굴에 네 다리의 길이가 다 달라 걷는 모습조차 기괴하기 짝이 없는 외형.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인간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고 회장은 악마가 더 많은 사람(먹이)을 먹어 훗날 자신이 이 괴물의 피를 먹었을 때 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인터넷을 끊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만한 권위를 지닌 사람이라면 분명 수련원 부근의 인터넷을 막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학살의 현장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이서와 수하가 쌓는 우정과 우정이 쌓이면서 허물어지는 마음의 장벽도 인상적이다. 수하는 아빠로 예상되는 인물에게 학대를 당한 것으로 보이고 이서는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자신의 위치로 인해 타인에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서로의 상처에 가장 순수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이 둘은 결국은 맞잡은 두 손으로 각자의 마음에 자리를 내어 준다. 괴물은 이서와 수하가 가진 상처의 집합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안고 있는 트라우마는 그들에게 더 커 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밤이라 실제보다 더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71쪽)’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우연한 밤에 괴물이라는 트라우마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서와 수하는 성장한다. 마지막에 일상으로 돌아간 수하와 이서는 재회한다. 이제는 웃는 방법을 아는 이서와 다시 축구를 시작하는 용기를 낸 수하. 그 우연한 밤은 이 두 아이가 앞으로 마주할 다채로운 세상의 초석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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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창비청소년문학 112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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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쯤 신종플루가 발병했을 때 나는 중1이었다. 등교하면 선생님들이 계단마다 서 계셨고 그때마다 멈춰서 체온을 재야 했다. 그 관문을 모두 통과하면 그날의 학교생활이 가능했던 그런 시기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KF94 마스크와 같은 동그랗고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등교했고, 며칠에 한 번씩 몇 반의 누군가가 신종플루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내 일은 아니지만 언제든 내 일이 될 수 있는 두려움에 빠졌던 몇 달이었다.
신종플루가 어떻게 사그라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신종플루에 걸렸던 아이는 자기 이름이 다른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두려워했고 매번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 아이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리고 2019년 말, 또다시 도래한 전염병의 시대에 나는 취업을 앞두고 있었다. 코로나19가 2009년의 신종플루처럼 몇 달 안에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있다. 처음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했을 때 겁에 질려 직장과 집만 왔다갔다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답답해 보였을지 몰라도 불안에 떠는 것보다는 삶이 지루하고 혼자인 편이 나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니 마음이 병들어가는 것조차 몰랐다.
작년에는 아픈 가족을 떠나보냈다. 병문안은 갈 수 없었다. 병원에서 간병인 1명을 제외하고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전국적으로 그랬지 싶어 나처럼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가족이 여럿 되었을 것이다. 2022년이 되어서는 사실상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었고 그것에 해방감을 느꼈나면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확진자 수가 늘어났고, 나같은 겁쟁이는 더욱 겁을 내며 몸 사리기 바빴다.
<페퍼민트>의 세상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프록시모 바이러스라는 것이 세상을 뒤덮었고 그 후 몇 년이 지난 세상을 비추고 있다. 프록시모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전, 해원과 해일 남매는 부모님이 일을 하는 동안 시안의 집에서 시안의 엄마(해원과 해일은 시안의 엄마를 ‘이모’라고 불렀다.)와 시안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외국에 사는 막내이모를 보러 갔다가 프록시모 바이러스에 걸린 해원과 해일의 엄마는 계약직이라는 자신의 처지로 인해 바이러스 의심 증상이 있었음에도 이를 숨기고 일상생활을 계속해 나간다. 그렇게 해원과 해일의 엄마는 슈퍼 전파자 N번이 되었고, 해원의 가족은 신상이 털리고 고소를 당하며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기에 아무도 몰래 지방으로 도망을 간다.
‘1호’와 ‘슈퍼’는 뒤에 어떤 말이 오느냐에 따라 어감이 확 달라진다. 전파자라는 말이 왔을 때, 그리고 그 1호 전파자나 슈퍼 전파자라는 말이 나에게 해당했을 때 주어지는 무게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실제로 엄마 지인의 딸이 내가 사는 지방의 1호 코로나 확진자였다. 엄마의 친구는 지역 병원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병원 사람들의 따끔한 눈길과 친하게 지내던 이웃까지 날카롭게 돌아섰던 그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주변 친구들도 많이들 떠났다고 했다. <페퍼민트>의 해원 가족의 이야기는 현실의 엄마 친구가 겪은 일과 다르지 않았다.
해원과 해일이 매번 시안의 집에 들렀기에 프록시모 바이러스는 시안의 엄마에게 발병하고 뇌손상이라는 후유증을 남기며 시안의 엄마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6년이란 시간이 흐른다. <페퍼민트>는 식물인간 상태인 자신의 어머니를 간병하는 시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3인 시안은 같은 고3인 해원과 다른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보편적인 고3의 학생들이 고민하는 진학, 연애, 친구관계 등은 시안에게 먼 나라의 일이다. 교실 칠판을 바라볼 일도 없는 시안은 자신이 주번인지도 모를 만큼 간병만이 자신의 일상이다. <페퍼민트>는 시안과 해원의 파트로 나눠져 진행되는데 시안은 1인칭으로, 해원은 3인칭으로 서술되어 처음에는 시안의 입장에 공감이 되고 가깝게 느껴졌다. 보편적 고3일 뿐인 해원의 고민이 조금은 철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점차 해원의 파트가 늘어나면서 해원의 상황에도 공감이 되었는데 입시와 학원선생님으로부터의 은근한 무시와 압박 등 고3을 지나왔던 사람이라면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독자에게는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시안과 해원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안은 간병하는 삶에 지쳐있었고 해원의 탓이 아닌데도 모든 것을 해원에게로 돌리고 싶어한다. 해원은 고3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시안의 알 수 없는 태도와 식물인간의 된 이모의 상태를 알게 되며 혼란스러워 한다. 시안은 해원에게 엄마의 산소통을 잠궈 주길 부탁했지만 실제로는 시안의 아빠가 산소통을 잠그고 이를 해원이 막아서며 시안의 엄마는 다시 숨을 쉬게 된다.
간병에 지친 보호자가 환자의 목숨을 끊은 사례를 뉴스로 종종 접한다. 그런 뉴스를 접하면 살인은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호자를 탓할 수만은 없어진다. 간병인이 20년 넘게 환자를 돌보면서 간병이 자신의 몫으로만 돌아가며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때를 상상하면 환자의 목숨을 끊은 간병인을 탓해야 할지, 간병을 간병인의 몫으로만 남게 한 사회를 탓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시안은 마지막으로 해원을 만났을 때 영원히 죄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를 아빠를 말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그들은 카페에서 만나 페퍼민트 차를 마신다. <페퍼민트>의 제목이기도 한 ‘페퍼민트’는 시안의 엄마가 좋아하는 차다. 엄마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기에 페퍼민트 차를 우려 엄마의 입술에 묻혀주는 시안의 행동은 엄마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또, 엄마가 페퍼민트 차 맛을 느끼고 있을 것이란 기대감처럼 언젠가는 엄마가 일어나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러난다. 시안은 “서로의 영혼을 해칠 것이다.”라며 해원과 더이상 만나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서로의 영혼을 해쳤을지는 몰라도 해친 영혼이 아물어지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용서와 화해가 바로 페퍼민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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