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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탐탐 - 숨은 차별을 발견하는 일곱가지 시선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4
김보통 외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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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비인권만화 시리즈 중 <십시일反>을 고등학생 시절 읽고 생활기록부에 독서 기록을 남긴 기억이 있다. 인권에 관심을 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책이라, 그 후로 창비인권만화가 나올 때마다 찾아 읽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 소식이 끊기더니 11년 만에 신작이 나왔다. 나는 고등학생에서 성인이 되었고, 어느덧 서른을 앞두고 있다. 10년 사이 우리 사회의 차별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는 일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현실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또한, 살아가기 힘든 시대다. 경제와 사회 전반적으로 병든 상황 속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고, 연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들에 대해서조차 건강하게 의견을 나누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호시탐탐>은 우리가 주목하고 해결해야 할 인권 문제 일곱 가지를 다루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최후의 보호막>은 용사와 마왕,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장르지만, 그 속에 현실을 담고 있다. 용사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에테르를 채굴하는 노동자들은 모두 전직 용사들이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큰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용사로서 활약할 수 없는 그들이, 에테르 채굴 노동자가 된 것이다. 동료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노동 환경, 그저 현실을 살아내기 바쁜 동료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상부와 회사. 마법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할 것만 같은 상상과는 달리, 판타지 세계 역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후의 보호막> 속 노동자들은 회사를 돌아가게 하는 부품일 뿐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내가 주문한 택배가 문 앞에 와 있는 것은 결코 기계가 한 일이 아니다. 그 뒤에는 사람이 있다. 에테르를 얻고 내가 원하는 물건을 간단히 버튼 하나로 받아들이는 그 단순한 절차 뒤에도 복잡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청첩장 도둑>은 동성애를 다루고 있지만, 단지 동성애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가족에 대해 묻고 있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동성애를 찬반의 문제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우리가 받아들이고 허용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인데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느껴진다.

<섬>은 집주인이 월세를 올린다는 말에 놀란 주인공이 시골로 이사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서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물가는 치솟고, 좁은 집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은 결코 편리하지 않다. 그러나 시골이 정서적으로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살다 보면 그 ‘끈끈함’이 때때로 부담이 되기도 한다. 적은 인간관계 속에서 사생활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언제 결혼할 건지, 어디로 취업할 건지 묻는 질문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 그런 이유로 도시로 이사 온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도 또 다른 문제들이 있다. 월세, 물가, 인구 밀도 등. 주인공은 시골에서 자연스레 살다가 도시에 돌아오면서 2040년의 현실을 맞닥뜨린다. 도시는 빠르게 움직여야만 유지된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살다 보면 순식간에 세월을 놓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언제까지 내가 도시에 살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도시만 살아남고 시골은 사라져가는 현실에서, 나는 과연 그곳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수수께끼>는 난생처음 듣는 수수께끼 질문으로 시작된다. 정답을 보기 전에 맞춰보려 했지만 도저히 맞출 수 없어서 다음 컷을 보니 ‘돌봄’이 정답이었다. 이 이야기는 돌봄이 ‘상품’, ‘엄마’, ‘도리’ 같은 이름으로 불려왔음을 보여준다. ‘돌봄’이 필요할 때, 나는 아빠보다 엄마를 찾았다. 아빠 집안 사람들도 며느리이자 동서이자 형님인 엄마를 찾았다. '우리가 이 무게를 조금만 더 나누어 뭉툭하게 만들 수 있는 힘(145쪽)'을 위해서는 돌봄이 한 사람의 희생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돌봄이 한 사람의 몫이 되지 않도록, 사회와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하다.

<폭염 속을 달리는 방법>은 2035년 4월 첫 열대야가 찾아오는 시점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고1 은호와 장래에 대해 고민하는 세진이는 각자의 시작점에서 출발해, '기후'라는 공통된 목적지에 도달하며 고민을 해결한다. 작가는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요?(176쪽)'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으로 ‘안정적인 기후에서 다양한 동식물 그리고 사람들과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176쪽)’이라고 제시한다. 안정적인 기후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이미 기후 재난이 우리 현실의 일부가 되어 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작은 실천을 시작해야 한다.

<끄나빠>는 인도네시아어로 ‘왜’라는 뜻이다. 나는 평소 ‘왜’라는 질문을 잘 쓰지 않아서, ‘왜’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도 했다. 닐루처럼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신기했지만, 막상 내가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려웠다. 선생님들의 강요로 밴드를 결성한 닐루, 노아, 지후, 그리고 고문이 된 교생 은지선생님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한마음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번역 어플을 사용해 대화하며, 어느 순간 서로의 마음을 열고 소통하게 된다. 그들이 만든 음악은 대회에서는 엉망으로 들렸을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세상을 향해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한 첫 경험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하기 싫은 활동을 함께 하면서 자아를 찾는 주인공들의 성장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참교육>은 나에게 가장 인상 깊고 큰 도움이 된 이야기였다. 아이들이 ‘참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그 의미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달라 충격을 받았다. ‘참교육’이 이제는 또 다른 폭력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걸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학교 폭력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되면 사람들은 열광한다. '불합리한 상황을 봐버린 자신들의 답답함을 누군가 풀어주길 바랐던(228쪽)' 것일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답답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신상 공개는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소화제를 먹은 듯 내 속이 시원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피해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가 신상 공개를 원하지 않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열광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여전히 그 방법에 대해선 고민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다우의 친구(학교 폭력 피해자)는 가해자 아이들을 '참교육'해줄 친구보다는 자신의 학창 시절이 외롭지 않게, 곁에 함께 있어줄 친구를 바라지 않았을까(232쪽). 다우가 자신의 행동을 참교육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피해자인 친구를 향해 함께 있어줄 수 있도록,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할 수 있도록 교사로서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창비인권만화 #호시탐탐 #인권 #북스타그램 #최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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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 - 제4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우수상 수상작
김윤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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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놀이방과 유치원을 다녔던 시절. 나에겐 그곳들에 대한 기억이 크게 남아있지 않다. 친구들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 정도만 남아있고, 놀이방과 유치원이라는 장소는 나에게 큰 인상을 주진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달랐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학교라는 장소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웅장함을 주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기다란 복도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전학 전까지 다녔던 초등학교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곳이었다. 역사에 비례해 소문이 많았고, 소문이 많아질수록 학교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화장실 네 번째 칸 귀신,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나무 사이의 구멍 등 여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그 자체로 고유한 소문. 말 그대로 ‘학교는 언제나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로 갈수록 (신기하게도 대학교에 가서는 미스터리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소문은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갖췄다. 우리가 커가듯 소문도 성장하는 건지 고등학생 때는 소문(한국지리 교실 책상 3번째 줄에 앉아 있는 파란색 인간)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도 등장했다. 이 책의 ‘면학실’과 같은 공간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도 있었고 그곳(학습실)까지 가는 길목에 한국지리실과 (가끔 귀신이 나온다는)복도가 있었다. 학교와 학구열과 경쟁과 미스테리는 어쩌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의 주인공인 준영은 면학실(각 학년의 50등 안에 드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소속된 이른바 우등생이지만, 일반적인 고등학교 3학년이 입시에 힘쓸 시기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의식주와 생존. 준영은 돌아갈 집이 없다. 아버지의 실종(그러나 죽음에 가까운)으로 인해 돌아갈 곳을 잃은 준영은 학교를 ‘집’으로 만들기로 한다. 자율 학습을 끝낸 아이들이 집에 돌아갈 때 준영은 그렇게 ‘두 번째 등교’를 시작한다. 준영이 학교에서 의식주를 해결함과 동시에 ‘책 도둑’, ‘버려진 아이’ 소문이 등장한다. 심지어는 소문에 힘을 실어주듯 물건이 조금씩 사라지기도 한다. 준영은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은 자신과 달리 범죄의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중인 존재가 있음을 확신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의 고3은 입시와 마주한다. 준영도 피할 수 없는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시간. “준영이 너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데?”라는 교사의 말에 준영은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런 준영에게 담임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몰라도 돼 그건. 나도 아직 모르거든.” 우리는 뭐가 되고 싶냐는 말에 보통 장래희망으로 대답한다. 내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나는 하고 싶은 직업이 뚜렷하게 있었고 그 직업을 위한 전공까지 중학생 때부터 정해놓았다. 다들 나보고 부럽다고 했다. ‘목표 의식이 뚜렷해서 좋겠다.’, ‘너와 그 직업은 잘 어울릴 거다.’라며 격려해주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그런 주변의 응원에 나는 내 진로에 조금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진로가 특정 직업이 아니라는 걸 빨리 알았더라면, 나도 준영의 담임교사도 ‘되고 싶은 나’에 대해 여전히 고민 중이었을까?

다시 책으로 넘어오면, 준영의 주변에는 고유한 사연을 가진 주변인들이 존재한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극적인 스토리를 얻으려는 학생회장 신지혜, 집을 나오고 싶어하는 안소미, 대학 진학에 큰 목표의식이 없는 두홍, 마지막으로 진짜 ‘책 도둑’까지. 사연없는 인물이 없다. 입시와 고3이라는 큰 바운더리로 묶여 각자의 사연은 감춰지기 마련이지만, 이 책의 인물들은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열아홉 나에게도 나름의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었지만 고3이란 성질에 묻히곤 했다. 개개인의 이야기가 입시에 묻히지 않고 잘 드러났기 때문인지, 책을 읽으며 그 시절 나와도 뒤늦은 해후를 했다.

‘언제까지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내가 어디서 나고 자라 어떤 가족이 있고, 무슨 실패를 겪었든 계속해서 뛰쳐나가다 보면 비로소 자신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서야 우리는 제대로 된 방향을 정할 수 있다.’ _242쪽

나는 이제 잠시 길을 잃더라도 괜찮다. 내게는 돌아올 곳과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과의 추억이 내 영화고, 이정표다. _257쪽

가짜 책 도둑인 준영이 친구들과 힘을 합쳐 진짜 책 도둑을 찾는 여러 사건이 긴밀하게 얽혀 있고, 각 과정에서 인물들은 서로를 치유한다. 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기꺼이 펼쳐보면 좋겠다. 성장소설이 주는 감동은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과거의 나에게로 이동한다.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두가 오래 전 지나친 자신의 과거를 보듬어주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 이 글은 창비 스위치 <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 서평단 선정으로 인해 책을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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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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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맞아 고향에 왔다. 일주일의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며 특별히 한 것은 없다. 그러다 문득, 가족들과 보내는 이 시간 자체가 그 이상으로 특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를 읽으며 더더욱.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지나간 학창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고등학생인 선우혁과 그의 친구 강도운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장면에서 나 또한 남일같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서도 내가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고, 관계란 그렇게 서로의 이면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마냥 웃을 수 없던 부분은 강도운의 왕따 경험이었다. 도운은 왕따를 당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선우혁이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위해 이곳에선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덕분에 도깨비바늘이라는 별명이 생긴다. 그러나 눈치가 부족했던 도운은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주희의 마음을 모르고, 그에게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해 오해를 사고 만다. 결과적으로 도운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들이댄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에게는 머리가 셋 달린 괴물, 케로베로스라는 별명이 붙는다.


별명은 보통 타인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나 행동으로 인해 사람마다 나를 이해하는 범위가 다르다. 친구 A가 나를 B라는 별명으로 불렀을 때, 또다른 친구 C는 이 별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고등학생 때 별명이 여럿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다중이', '오덕'이었다. 왜 오덕이냐고 묻는 친구와 다중이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친구가 있었다. 그들에게 내가 보여준 이미지가 달랐기 때문이겠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의 도운이가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모두에게 친절한 것만이 정답이라고 여긴 것은 슬프지만 공감됐다. 도운이 모두에게 친절하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별명은 치명적일 수 있다. 별명은 그 사람의 일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다. 별명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강도운이 자신의 과거를 선우혁에게 말하며 혁이 도운의 새로운 면을 보았듯, 앞으로 그들이 서로의 여러가지 모습을 발견하며 나아가길 기대한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가족의 부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선우혁은 13살 터울의 형이 있고, 불의의 사고로 5살 때 그 형을 잃는다. 고1이 된 선우혁이 죽은 형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되며 형이란 퍼즐을 맞춰나간다. 책에 간간히 나오는 선우진(혁의 형)이 선우혁에게 보이는 태도는 참 따스했다. 아기 대하듯 때론 친구 대하듯 하는 그 모습에 진이 살아 있었다면 정말 좋은 형이 되었겠다는 생각, 나 또한 8살 터울의 내 동생에게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지금이야 말로 어느 때보다 성실하게 말이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오랜 시간을 건너온 화해를 다룬다. 귤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해송은 진의 죽음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며 귤을 싫어하게 된다. 해송이 귤이 먹고 싶다고 지나가듯 한 말에 선우진은 해송에게 귤을 전해주러 밤 중에 나가고, 그 길에 사고를 당한다. 가장 좋아했던 것이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다 부정하고 싶어진다. 선우진의 동생인 선우혁이 마지막에 해송에게 귤을 건네는 장면은 13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해송을 치유한다. 선우진과 똑닮은 선우혁이 형의 죽음은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더이상은 그 죄책감을 안고 가지 않기를 바라며 건넨 그 귤이 해송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기를 바란다.


#여름의귤을좋아하세요 #이희영 #창비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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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는 요일 (양장)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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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창 바쁜 9월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난 2주 동안은 책 읽을 시간도 모자라는 느낌이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내서 독서하면 되는 건데, 글자를 보는 게 힘들 정도... 바쁜 게 얼추 끝나고 나니 <네가 있는 요일> 서평의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책은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있지만 아직 끝까지 읽지 못하고 글을 쓰게 된 것에 양해를 구한다. 서평 마감일 후에라도 이 글에서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다시 작성하도록 하겠다.


<네가 있는 요일>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는 의문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그 중 하나를 적어본다. 나는 시각의 지배를 크게 받는 인간이다보니 어떤 사람을 떠올리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가치관보다는 외형이 먼저 생각난다. <네가 있는 세계>처럼 뇌의 데이터를 여러 몸에 옮기면서 그 사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의 현실성(물론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꽤나 미래인 것 같지만)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김달이나 젤리처럼, 계속해서 여러 신체에 뇌(영혼) 데이터를 옮겨 심으며 복수를 실행하려는 울림에게 협조할 수 있을까? 365(인간7부제를 실시하지 않고 태어났을 때의 신체 그대로 뇌 데이터를 유지하고 사는 사람)와 요일 7부제(신체 하나를 요일마다 7명의 보디메이트들이 돌아가며 오프라인의 삶을 사는 것)를 실시하기 전에는 나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을까. 인권의 문제도 있었을테고. 그러나 환경문제가 인권문제를 뛰어 넘을 한참 뒤 미래라면 내가 있기에 세상이 있다는 왕과 같은 마인드는 버리는 편이 나았으리라. 환경부담금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세금을 내면서 무리하게라도 365를 유지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게 힘든 대다수 사람들은 요일 7부제에 참여하면서 성인이 되는 순간부터 내 몸을 잃고 다른 사람의 신체를 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정해진 요일에만 현실의 삶을 산다는 것. 그 외의 요일은 낙원이라든 가상세계에서만 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 말도 안 되는 정책(365, 요일 7부제 등)이 실행되는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고 환경보호에도 더 힘써야겠다고 느꼈다. 지구가 있고 우리가 있다는 생각을 잃지 않기로...


<네가 있는 요일>은 가까운 혹은 먼 미래에 있을 법한 일들을 잘 풀어낸 소설인 것 같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상상(요일마다 다른 사람이 눈을 뜬다는 건 나도 해본 적 있다)에 여러 디테일을 입혀서 소설이 뜬구름 잡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정교한 세계관을 구축했다. 책을 읽다가 의문이 드는 설정이 생기면 작가님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얼마 안 되어 그 설정에 대한 설명이 등장했다. 그래서 이야기에 몰입이 잘 되었고, 뇌 데이터를 여러 몸에 옮길 수 있다는 설정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새로운 외형을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인물들의 개성, 극중에서 여러 장소를 이동하며 벌어지는 역동적인 이야기들, 인권과 환경, 윤리적인 문제들을 다양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네가있는요일 #박소영 #소설Y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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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휴먼스 랜드 창비청소년문학 120
김정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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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휴먼스 랜드>는 머지 않은 미래를 그려낸 소설이다.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이젠 극한호우라는 말까지 등장했다)가 번갈아 나타나고, 어디서는 엘니뇨때문에 올해의 태풍의 규모와 강도가 엄청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자연이, 환경이 인간에게 단단히 화났고 그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노 휴먼스 랜드>는 1차 기후 재난과 2차 기후 재난을 겪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노 휴먼스 랜드’로 지정되어 그곳엔 공식적으로 사람이 살 수 없다.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개발은 멈췄고, 자연이 회복되고 나면 그곳에 다시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하겠다는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이주하거나 난민이 되었다.

노 휴먼스 랜드 중 하나인 한국을 조사하기 위해 미아와 한나, 파커, 크리스, 아드리안 총 5명으로 이루어진 조사단이 서울로 향한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아드리안의 죽음, 수상한 크리스의 행동, 파커와 한나의 과거 그리고 시은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 미아 등 개개인을 둘러싼 여러 사정들이 밝혀진다. 또한 노 휴먼스 랜드, 말 그대로 사람이 없어야 하는 서울에는 불법 거주민이 있었고, 암묵적으로 노 휴먼스 랜드에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미아 일행은 알게 된다. 아드리안의 죽음과 크리스의 실종을 겪으며 비밀 연구소의 존재까지 알게 된 미아와 팀원들은 해당 연구소에서 미아 본인 할머니의 옛 동료인 앤 소장의 음모를 듣는다. 앤 소장은 플론(plone)이라는 유전자 편집 식물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불안과 우울이 극심한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새로운 향정신성 의약품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204쪽). 마약이나 다름 없는 플론으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모든 종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앤 소장의 목적은 어딘가 뒤틀려 있다. 플론은 '전쟁과 기근, 폭력과 차별, 불평등과 기후 재난 걱정 없이 천년만년 인류가 계속 지구에 존재할 수 있게 할 유일한 방법(217쪽)'이라고 앤 소장은 말한다. 플론에 중독된 인간은 자아 없는 인형과 같다. 자아가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미아는 묻는다.

앤 소장의 음모를 막기 위해 플래그리스라는 단체에서 파견된 빅토리아는 미아에게 시은을 연기하게 하며 노 휴먼스 랜드 조사단을 감시하는 역할을 부여한 ‘X’다. 그는 연구소에 몰래 잠입해 플론을 뿌리겠다는 앤 소장을 막고자 폭탄을 설치하지만 이 작전은 미아로 인해 실패한다. 폭탄이 터지면 플론에 중독된 피험자들이 전부 죽게 되므로 미아는 폭탄을 들고 밖으로 나와버린다. 미아는 불법 거주민인 채윤의 도움을 받아 연구소 언덕 아래로 폭탄을 던져버리고 폭탄은 제한시간이 되어 터지면서 미아는 의식을 잃는다. 그 후 연구소 근처에 있던 국제연합군이 폭발을 감지하고 사고를 수습한다. 그 과정에서 앤 소장과 그 주변인들은 수감되고, 노 휴먼스 랜드의 불법 거주민에 대해 방관하고 은폐하면서 그들에게 비윤리적 실험을 진행하고 있던 UNCDE(유엔기후재난지구)를 향한 사람들의 시위가 이어진다. 그리고 노 휴먼스 랜드 제도가 폐지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책을 읽으며 두려웠다. 머지 않은 미래, 2050년 이후의 삶을 그리고 있는 <노 휴먼스 랜드>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연을 무분별하게 이용하고 파괴하는 행위가 결국은 마약이나 다름 없는 플론을 상상하고 실현하게 하는 인간답지 못한 현실을 낳았다는 것을. 단순히 픽션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논픽션이자 머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살기 힘든 세상이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것은 그 때문이겠다. 가까운 미래가 암울하고 희망이 없다고 암시하면서 미리 매를 맞는 게 낫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가까운 미래를 관조하거나 낙관하지 말고, 바꾸겠다고 조금씩 움직이는 것. 아픈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은 의문을 품고 행동하는 것이다. 노 휴먼스 랜드를 막는 것은 오로지 그 뿐이다.

※ 이 글은 창비 출판사의 <노 휴먼스 랜드> 소설Y 클럽 서평단 활동을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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