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남한산성](41p) - 김훈

겨울 새벽의 추위는 영롱했다. 아침 햇살이 깊이 닿아서 먼 상류 쪽 봉우리들이 깨어났고, 골짜기들은 어슴푸레 열렸다. 그 사이로 강물은 얼어붙어 있었다. 언 강 위에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바람이 불어서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혀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어서 눈이 길게 불려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간의 무늬가 드러났다. 깨어나는 봉우리들 너머로어둠이 걷히는 하늘은 새파랬고, 눈 덮인 들판이 아침 햇살을 품어 냈다. 숲에서 새들이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렸고, 잠깬 새들이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앉을 때마다 눈송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정갈한 추위였고, 빛나는 추위였다. 말발굽 밑에서 새로 내린 눈이 뽀드득거렸다. 말은 제 장난기에 홀려서 고삐를 당기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갔다. 말 콧구멍에서 허연 김이 품어져 나왔다. 김상헌은 폐부를 찌르는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몸이 찬 바람에 절여지며 시간은 차갑고 새롭게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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