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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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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리차드 세넷 지음, 김홍식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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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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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조현진 옮김 / 책세상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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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가는 길 황석영 중단편전집 2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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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회사에 가면 죽는다' 라는 책이 있었다. 회사라는 조직이 부여하는 위계질서와 분업화된 업무 방식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자신의 존재적 가치는 어느새 잃어버린 채 익명화된 개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과장, 김대리 등으로 불리면서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러는 중에 서서히 이 아무개라는 고유의 존재는 잊혀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회사와 기업으로 대표되는 현대 산업사회의 구성원들이 겪는 인간소외의 모습을 황석영 님의 <삼포 가는 길>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영달은 건설 현장의 날품 인부이다. 공사장의 밥집(함바)에서 머물며 지내지만 받는 노임이 적어 빚을 지고 있다. 게다가 그는 밥집의 주인인 십장의 아내와 살림을 차리고 지내다가 그의 남편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찬 겨울에 졸지에 도망쳐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도망쳐 나왔지만 정착할 곳 없이 새로운 곳으로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뜨내기 신세다.
 
백화는 열여덟에 가난한 농촌을 가출해 자신의 본명을 숨긴 채, 공장과 공사판 등을 떠돌며 몸을 팔아 생계를 잇는 작부였다. 그녀는 가출한 지 다섯 해가 되자 모든 것을 청산하고 돈으로 사서 자신을 데리고 있던 술집을 남몰래 도망쳐 나온다. 그녀는 고향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정씨도 영달처럼 오랫동안 공사판을 떠돌던 뜨내기 인부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지친 심신을 이끌고 마음의 정처인 고향을 찾아간다. 그는 고향에서 그물을 치고 감자를 메며 소박한 일생을 보낼 희망을 갖고 삼포로 가는 여정에 있다. 정씨가 가는 길에 영달을 만나고, 이들이 함께 가는 길에 백화를 만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영달, 백화, 정씨, 이들은 왜 고향을 찾아갈까. 이들은 공통적으로 가난한 뜨내기 인생들이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돈을 벌고자 애쓰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어릴 적 따뜻하고 행복했던 고향의 기억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잃었던 자신을 찾아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어떤 소외였을까. 그들이 겪은 소외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 해답에 70년대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있다. 1960,70년대 공업화가 본격화되자, 대다수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으로, 건설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영달과 정씨도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건설 현장의 인부로 일하게 되었다. 이들 날품 인부들이 건설 현장에서 겪는 소외의 모습은 작가의 다른 소설인 <객지>에 잘 드러나 있다.
 
노동의 소외, 공사판의 날품 인부들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예컨대 인부들은 현장 소장과 십장, 그리고 감독조 등 사용자 측이 임의로 정한 시간에 따라 일해야만 했다. 그들은 낮은 노임을 받으면서도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들은 '무거운 돌을 바다에 짊어 나르며 혈관이 터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일했지만', 사용자들은 '공사장의 바윗돌과 같은 풍경의 일부'로 느낄 뿐이었다.
 
다시 말해 사용자와 노무자 사이의 관계는 철저히 이윤의 동기에 기반한 경제적, 물질적 관계였고, 이 과정에서 인부들은 일상적인 노동 착취를 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용자 측이 밥집과 술을 파는 매점에서의 전표 운영을 통해 인부들의 노임을 상당 부분 가로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부들은 빚을 져 공사판을 뜨기도 어려운 신세들이었다. 이처럼 땀 흘리는 노동의 자부심을 빼앗긴 채, 낮은 임금 속에서 사용자에 의해 끊임없이 요구되는 고된 노동은, 영달과 정씨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고 삶의 고단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어릴 적 고향의 농촌 풍경은 이와 사뭇 달랐을 것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들은 논과 밭을 매면서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올곧이 스스로 노동의 주체일 수 있었다. 또한 이웃과의 정겨운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정씨는 이처럼 삶의 고단함과 소외를 벗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마음의 정처인 고향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고, 오갈 데 없는 영달은 정씨의 고향길을 함께 한다.
 
백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가난한 농촌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기술 하나 제대로 없었기에 공장 또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자신의 몸을 파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공장 및 공사판의 노동자, 인부들이 그녀를 의미있는 인격적 존재로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내어 주면서, 자신의 존재적인 의미 - 젊은 날의 꿈과 사랑 등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런 자신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잃었던 자신을 찾아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고향을 향해 가는 길은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백화가 찾아가는 농촌도, 정씨가 찾아가는 삼포(포구)도, 모두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소외되지 않는 노동, 의미있는 관계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으로 가는 길 위에서 서로를 진정으로 주고받는 정서적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공장과 공사판으로 대표되는 산업 사회에서 겪었던 익명의 물질적 관계와는 질적으로 달랐을 것이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정씨를 대하던 영달은 이내 의심을 거두고 그와 말동무, 길벗이 된다. 또한 처음에는 서로 불신하며 퉁명스럽게 대하던 영달과 백화는 눈길을 함께 걸으며 어느새 따뜻한 정을 서로 느끼게 된다. 백화는 폐가에서 추위에 떠는 자신을 위해 묵묵히 땔감을 만들어 불을 지피고, 다리를 삐끗해 걸을 수 없게 된 자신을 감천 읍내까지 업어준 영달에게서 따뜻한 인간의 정을 진심으로 느낀다. 영달이 백화의 고향으로 가는 대신에 정씨와 함께 삼포로 가겠다고 했을 때, 백화는 헤어짐이 아쉬워 눈이 젖은 채로 자신의 본명을 영달에게 알려준다. 이들이 비로소 익명을 벗고 존재의 소외를 극복하는 순간이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께요."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에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는 어떨까. 물론 지금의 모습은 70년대 초기 산업화 당시의 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노동자들을 포함해 사회 전반적으로 물질적 부가 증대되었다. 민주화가 상당히 이뤄지면서, 예전과 달리 노동자의 목소리도 커졌고 사용자의 노골적인 노동 착취도 없다. 또한 산업 구조도 엄청난 변혁을 겪어. 이제는 공장 산업에서 첨단 기술집약 산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였다. 이제는 노동자 개인의 지식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산업구조로 변화한 것이다.
 
하지만 산업 구조와 노동의 양상은 이처럼 변화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은 예전보다 더욱 치밀하게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고,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경제 환경 속에서 효율과 경쟁은 최고의 지상 가치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 노동자 개인의 창의와 혁신, 따뜻한 인성을 강조하는 기업들이 많지만,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궁극의 목적은 효율을 통한 이윤 추구다. 이러한 가치를 말하는 기업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의 유연성을 말하며 비정규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결국 예전보다 대다수 직장 노동자들은 더 많은 고용 불안,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이와 함께 물질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풍조는 그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사용 가치보다 교환 가치를 더 중시하는 상품화는 이제 더 이상 제품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서비스도, 사람도 모두 다 타인(고객)의 마음을 얻어 선택받기 위해 자신의 겉모양을 치장하기 바쁘다. 대학은 더 이상 진지한 학문의 탐구가 아니라 실용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애쓰는 공간으로 바뀐지 오래되었다. 물론 그 목표는 높은 연봉을 주는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 그리고 물질(상품)적 가치에의 몰두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보여주는 나로 존재하게 만든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사회 전반적으로 익명적 관계, 피상적 관계를 양산한다. 산업화는 이러한 관계망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소외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쁜 일상 중에 문득 소외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허무함과 삶의 고단함을 느끼며, 잃어버린 자아를 그리워할 것이다. 삼포를 향해 가던 영달과 백화, 그리고 정씨처럼......
 
 
백화가 떠난 후, 영달과 정씨는 삼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역내 대합실에 있던 어느 노인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삼포가 이미 개발이 되어버려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느 덧 바다에 방둑을 쌓아 대규모 관광단지를 만드느라 하루에도 트럭이 수십 대씩 돌을 나르고, 공사판과 시장이 벌어져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씨가 마음에 품었던 고향, 한적하게 나룻배에서 고기를 잡고 감자를 매며 지내는 고즈넉한 마음의 고향은 이미 온데간데 없던 것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이처럼 모든 이의 안식처, 고향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영달과 정씨가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 현대 산업사회의 우리들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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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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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부모의 엄격한 양육 환경이나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대체로 사춘기 시절을 힘들게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부모 내지 종교의 도덕적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한 상태에서 사춘기가 되었을 때, 자신의 감정과 개성을 분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가치들과 충돌되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어린 시절 올바름을 가르쳤던 <밝음의 세계>와 감정의 충동이 난무하는 <어둠의 세계>가 내면 속에서 대립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어린 시절에 나의 <밝음의 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착한 아이 컴플렉스, 다른 하나는 교회 신앙이었다. 쌍동이 중의 형이었던 나는 어린 시절 모든 것을 동생에게 양보하는 모범적인 형으로서의 역할을 깊이 내면화했고, 이로 인해 하고 싶은 것 대신에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하는 데 매우 익숙해졌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이후 중,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있던 어머니의 교회 공동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 특이한 교회 공동체의 여러 계시와 규율들이 점점 더 나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중, 고교 시절 흔히 갖게 되는 많은 충동과 일탈의 유혹이 생길 때마다 <밝음의 세계>로부터 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많이 괴로워했고, 이러한 <두 세계>의 대립을 성숙하게 다루지 못한 채 사춘기 시절을 힘들게 보낸 기억을 갖고 있다.
 
  <데미안>은 이러한 <두 세계>의 대립에 사로잡혀있던 한 어린 소년이 사춘기를 거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삶의 여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장소설들이 진정한 자아의 발견을 기성 가치, 질서와 화해하는 데서 찾는 것과 달리, <데미안>은 기성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는 데서 찾고 있기 때문에, 도발적인 성격을 띤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글 전체의 분위기도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음울하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이 주조를 띠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데미안>에 대한 왠지 모를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기성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어딘지 모르게 체제전복적인 음험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화되어야 할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진보해왔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 글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아의 발견은 아프락사스의 실천에 있다'는 명제가 갖는 파괴력과 호소력이 매우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데미안>이 당대에는 물론 현대의 우리들, 특히 자아를 찾아 진지한 방황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 즉 <밝음의 세계> 가운데 평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평범한 소년이다. 그러다가 그는 집안의 하녀들, 가난한 이웃들에게서 욕설과 싸움이 난무하지만 솔직한 감정의 분출이 있는 <어둠의 세계>를 발견하고, 호기심과 두려움을 갖고 <어둠의 세계>에 점차로 빠져든다. 어느 날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이웃 불량소년의 나쁜 의도에 말려들면서 거짓말과 도둑질이라는 '나쁜' 짓을 계속하게 된다. 그는 부모의 뜻을 어기고 죄를 저질렀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두 세계> 가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에 싱클레어는 상급생인 데미안을 만나게 되고, 그와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때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제시하는 성서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하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옆에 함께 매달린 두 도둑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카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벨을 시기하여 동생을 죽인 극악무도한 살인자, 인류에게 죄악의 씨앗을 안겨준 첫 조상으로 기억한다. 또한, 우리는 두 도둑 중에서 예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도둑을 구원에 이르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는 <선한 세계>의 가치를 독점하고자 하는 세력이 의도적으로 만든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에 의하면 카인은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아니라, 오히려 강인한 내적인 힘을 갖고 신으로부터 독립하였기에 약한 자들로부터 질시를 받은 종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킨 채 죽음을 떳떳이 맞이한 도둑이 오히려 자기 내면의 진실에 보다 더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선한 신에게만 숭배하지 말고, 때로는 악마에게도 숭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기존의 <선한 세계>의 가치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대체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카인을 옹호한다니, 그리고 악마에게도 숭배하라니. 하지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지식과 발명품 - 예컨대 종교와 문화 - 들은 하나의 해석일 뿐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만약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종교도, 정치 체제도 진작에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자신이 아닌 남에게, 공동체에게 절대적인 진리를 내세우며 도덕율을 강요하는 일체의 <선한 세계> 안에는 이데올로기, 즉 권력의 의도가 분명히 숨어있다. 따라서 데미안의 문제제기는 비록 그 자신의 것도 하나의 해석적 관점일 뿐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선한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밝히 드러내어 이를 상대화시키는 미덕을 갖고 있다.
 
  '카인의 표적', 그것은 데미안과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기존의 도덕율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을 아우르는 표식이었다. 싱클레어는 '카인의 표적'을 통해, 그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왔던 부모의 <선한 세계>를 상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고독감을 안은 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이 때부터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고독과 냉소 가운데 술과 향락, 성욕에 취해 지낸다. 그는 어린 시절과는 반대로 금지된 것의 세계를 맘껏 경험하지만, 결국 몸과 영혼이 망가지는 자신을 보며 참담한 좌절을 느낀다. 그는 다시 한번 - 이제는 외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 절제와 금욕, 품위를 통해 자신의 <선한 세계>를 세우려 노력한다. 즉 자신을 그토록 억압하고 가두었던 <선한 세계> 속으로 스스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 때 그는 데미안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편지 안에 적혀 있던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이다. 바로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이 글귀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즉, 새가 알을 뚫고 나오듯이,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이래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감싸고 규정짓고 있는 세계, 즉 <선한 세계>를 의심해야 - 상대화해야 -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이 만든 <선한 세계>가 선포하는 가치와 도덕이 -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선한 세계>의 대척점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를 용기있게 바라보는 '카인의 표적'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알을 깨뜨리고 뚫고 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아프락사스에게로 날아가야 한다. 아프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으로,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신을 가리킨다. 즉, 아프락사스가 상징하는 것은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옳은 것에 대한 의무감으로 살거나 또는 금지된 것에 대한 방종으로 사는 극단적 삶의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두 세계>, 즉 '당위'와 '금기'의 세계를 뛰어넘어 완전히 자유로와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이제부터는 외부의 세계로부터 자신의 내면에 동시에 던져지는 '양심의 소리'와 '유혹 및 충동의 신호'에 의해서 더 이상 갈등과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에 자신의 진정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운명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흔히 말하듯 가장 '나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후 싱클레어는 '아프락사스'의 문제의식과 줄기차게 씨름하면서 자아를 완성해나간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살부살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선 수행을 하는 중에 부처님이 와서 방해하면 부처를 죽이고, 선사(조사)가 와서 방해하면 그를 죽이라"는 뜻이다. 어떤 가르침이든 그 본질을 파악하고 나면 더 이상 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 스승의 가르침의 '문구'에 매여서도 안 되고, 그 가르침에 대해 자신의 내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물음과 오류가 있다면, 설사 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덮어두는 대신에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프락사스의 성취, 즉 자아의 완성은 절대적인 진리인 척하는 모든 것을 - 그것이 '당위'든지 '금기'든지간에 - 상대화하며, 자신의 운명 속에서 자신만의 절대 진리 - 진실 또는 해석 - 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온전히 삶을 살아낼 때 이뤄진다. 따라서 이렇듯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은 세상 가운데 홀로 서서 스스로 해석하며 살아내야만 하는 고독(절대고독)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데미안>은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느끼는 음울한 허무와 냉소, 지독한 고독과 삶의 무게감에 흠뻑 빠져 어느새 팍팍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싱클레어가 겪은 <두 세계>의 분열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지는 않는다. 그 대신 마음 속에 <두 세계>의 대립이 생길 때마다, 좌충우돌 양 극단을 오가면서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라며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즉,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일체의 것(세계) 에 대한 치열한 물음, 즉 '카인의 표적'을 얼굴에 뚜렷이 새기며 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현대를 사는 현명한 처세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깊이 생각하고 용기있게 물음을 던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당위'와 '금기'의 두 세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성숙한 자유로움으로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이처럼 독립되고 성숙한,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한 걸음씩 진보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아의 실현, 완성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고 나와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말해야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카인의 표적'으로 <두 세계>의 이분법을 뛰어넘고, 아프락사스를 통한 자아의 성숙이라는 싱클레어의 자아 찾기 여행을 깊은 공감 속에서 함께 따라갔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싱클레어가 자아를 성취하는 과정이 매우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데미안의 친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아프락사스의 화신'으로 묘사하는데, 이러한 에바 부인과 싱클레어의 사랑은 초현실을 넘어서 매우 비현실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다행히 김용규 님이 쓴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라는 책을 통해서, 융 심리학에 근거해 자아의 성숙과 완성을 상징하는 관계로서 싱클레어와 에바 부인의 사랑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주도하는 공동체 모임에의 참여 및 전쟁에의 참전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완성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싱클레어의 모습은 그가 깨달은 아프락사스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실제로 자아의 깨달음은 골방 안의 성찰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자아의 실현은 골방 안에만 머물러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는 세상,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변화, 발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아는 <골방 안의 성찰>과 <세상 속의 실천>의 순환고리 속에서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싱클레어에게는 실천을 통해 삶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가 공동체 모임에 참여해 보여주는 모습은 그가 혐오했던 패거리에의 안주, 또는 지적인 유희로 느껴진다. 데미안이 전쟁발발을 앞두고 대위 진급 등 참전의 구체적인 준비와 함께 세계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과의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염려로 어쩔 줄 몰라 한다. 이처럼 소설 전반부에 싱클레어가 고통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 했던 모습을 그리도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치열하게 그렸던 반면에, 정작 그가 자아를 실현하고 완성해가는 과정이 상징과 관념으로 얼룩진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의식과 메시지는 송곳처럼 날카롭기만 하다.
 
 
  * 한 가지 덧붙이면, <데미안>의 번역본이 무척 많지만, 서점에 가서 직접 예닐곱 권의 번역집을 읽으면서 비교해본 바로는 <민음사>의 번역이 제일 훌륭했다. '고전은 시대에 따라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문학은 그 자체로 한국 문학이다' 라는 문학전집 기획 의도에 맞게, 번역이 매우 자연스럽고 거기에 더해 문체가 수려해 문학적이기까지 해서, 읽는 내내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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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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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이 되어 버린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교훈을 얻어 현재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적용하고자 하는 실천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고, 이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이는 일부분만 타당한 설명이다. 오히려 E.H 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대하는, 역사가를 비롯한 현대인들의 자세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해석
 
  '과거와 현재'라는 말에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재)해석'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따라서, E.H 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사실과 해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먼저, E.H 카는 '과거의 사실'를 둘러싼 역사에 대한 오래되고 뿌리깊은 어느 견해를 언급한다.

  역사란 단지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랑케)

  이와 같은 견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신성시하고, 이를 철저히 고증하는 것에 역사와 역사가의 최고 가치를 부여한다.  E.H 카는 이러한 견해가 그동안 역사에 대한 주류적 시각이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흐름은 이성과 과학에 의한 문명의 진보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을 정도로 풍요롭고 안정적이었던, 19세기의 '사실'의 시대에서 비롯한다. 콩트로부터 시작된 실증주의 학풍, 더 거슬러 올라가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수많은 자료, 사실을 확보하기만 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역사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E.H 카는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도전적인 물음을 던진다. 과연 과거의 모든 사실은 반드시 빠짐없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또한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인가? 과연 어떤 이유로 인해, 과거에 생겨나 당대의 누군가는 한동안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수많은 사실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소멸되고 일부만이 역사적 사실로 살아남는 것일까? 그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역사적 사실의 선택에 있어, 역사가의 해석과 관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역사가의 해석이 과거의 사실을 결정한다
 
  첫째, 후대에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 인용, 발굴하는 - 역사가의 해석과 관점이 동시대인들에게 그 타당성 내지 중요성을 인정받을 때, 과거의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 선택, 결정된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개똥녀' 사건을 예를 들어보자. 이 사건은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사건인데, 이 과거의 사실이 향후 50년 후에 역사에 기록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10년뒤 어느 역사가가 우리 시대를 기록하면서 '민주주의의 정착과 IT 기술의 획기적 발달로 정의할 수 있는 시대에 의사소통의 자유가 절제되지 못하면서 생겨난 개인의 사생활 침해 사건'이라는 해석과 함께 '개똥녀' 사건을 인용할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후 다른 학자 또는 언론의 기록에 '개똥녀' 사건이 계속해 인용되어 그 의미와 해석이 풍부해진다면, 이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 선택될 것이고, 더 이상의 반향없이 일회성에 그친다면, 발굴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과거의 사실로 숨어들 것이다.

  결국, '개똥녀'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 살아남을지 여부는 이를 인용, 발굴하면서 역사가 또는 언론이 부여할 의미와 해석이 얼마나 동시대인들에게 타당하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달려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노사모의 선거운동' 사건은 '개똥녀' 사건에 비해 역사적 사실로 남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노사모의 자발적 정치 참여가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당대의 수많은 언론, 지식인을 통해 그 의미가 해석되었고, 이는 추후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주목받을 가능성과 타당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실'은 사실 그 자체로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선택해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할 때 비로소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 E.H 카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기초적 사실(연도, 장소 등 사실관계)의 정확성 확보는 역사가의 기본적 의무이지 본래의 임무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집을 짓는 건축가가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적 의무일 뿐 본래의 임무는 설계와 시공인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E.H 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당대에 발생한 수많은 사실들이 기록 및 전달되는 과정 자체에 이미 기록자의 '선별'이라는 해석이 부여된다고 말한다. 즉, 당대의 사실들 중 일부가 선택되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는 과정에, 소수 특정 집단의 특정 견해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왕조의 역사이다. 왕의 권력을 둘러싼 수많은 정보들을 얻기는 쉽지만, 당시의 농민, 천민들의 생활과 문제의식에 대한 정보들은 얻기가 매우 어렵다. 농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 나라가 쇠퇴의 길에 들어설 때뿐이다. 그것은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사람들이 양반 계급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취사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원본 사료(문서)는 역사가 또는 동시대인의 올바른 역사 해석을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원문을 읽지 않고 원문을 요약하고 해석한 2차 자료에 근거해, 원문의 의도와 부합하지 않은 잘못된 결론과 판단에 도달하는 경우를 흔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본 사료의 기록 당시부터 선별, 즉 해석이 개입된다면, 도대체 100%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원본 사료의 기록 과정과 후대의 역사가에 의한 발굴 및 인용, 전달 과정에 '해석' 행위가 개입되는 상황에서, E.H 카는 이제는 더 이상 사료로서의 '사실'을 그 자체로 무오류인 것으로 숭배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를 정리하면, E.H 카는 역사는 논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을 최대한 많이 기록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용도폐기할 것을 주문한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란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중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들이 당시에 일어나게 된 동기와 배경을 파헤쳐, 의미있다고 판단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선택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 시대의 문제를 조망하는 데에 타당한지를 기준으로 과거 사실의 유의미성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예: ?)
 
  '역사는 현재의 해석'이라는 말의 의미

  그렇다면, 역사는 과거의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가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부여하는 현재의 해석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첫째, 역사의 사실들은 기록자 - 당대이든 후대인든지간에 - 의 의도를 통과하면서 굴절되기 때문에, 무조건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에 숨어있는 각종 행위의 동기와 의도를 탐구하여 자신의 것과 대면하여 재구성하듯이, 역사가의 기록을 읽는 우리도 역사가의 기록 행위에 숨어있는 동기와 의도를 파악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연구하기 전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 선별하고, 해석한 - 역사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묘청의 난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읽을 때 김부식이 묘청과 대척점에 있던 당시의 정통 관료 출신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하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도, 독자도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고,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인해 그 시대에 얽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역사가가 그러하듯이 현 시대의 견해와 문제의식에 근거해 역사가가 기록한 역사적 사실들을 파악하고 해석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가의 이해관계와 의도에 따라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왜곡(해석의 오류)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역사가의 기록을 대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흔히 우리의 존재조건으로 인해 일본의 한국 침략은 제국주의로 비난하면서도 광개토대왕의 요동 침략은 영토 확장과 대륙 진출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의 이중성을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세째, 위 논의의 연장선에서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현재의 관점과 해석에 따라 과거를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역사적 사실들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배경을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한다. 즉, 과거의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 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역사가가 기록하는 동안 가졌던 의도와 관점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들여다볼 때, 이에 근거해 자기 나름대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만약, 우리의 이해관계로 인해 과거의 사실 속에 숨어 있는 배경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면, 이러한 편견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결론적으로, 역사가를 포함해 동시대인인 우리는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조망하여 이해하게 되고, 이러한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재의 문제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문제의식과 관점에 근거해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선택해 해석(의미부여)하고, 이를 통해 얻어진 과거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방향성을 재발견하는 일련의 상호작용을 겪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유명한 답변인 "역사는 과거(과거의 사실)와 현재(역사가의 현재의 해석)와의 끊임없는 대화(상호작용, feedback)"로 돌아갈 수 있다.

  현재의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역사에 대한 이와 같은 E.H 카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어온 다수의 기대에 반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에서조차, 동일한 사건(예를 들어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을 보고도 각자의 정파적 이해관계 내지 학문적 관점에 따라 전혀 반대의 평가와 해석을 내어놓는 것을 보면, 과연 후대의 역사가 내지 독자가 우리 시대를 기록한 역사적 사실을 어떠한 고려도 없이 순진하게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것을 쉽게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가 조선일보와 뉴라이트의 기록을 참여정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로 채택하고, 후대의 독자들이 이를 토대로 우리 시대를 실패한 정권, 실패한 시대로 기억한다면, 끔찍하지 않은가.)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며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의 몫은 다음의 두 가지가 될 것 같다. 우선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기록들을 대할 때, 기록자 - 당대이건, 후대이건 - 의 해석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이렇게 해서 얻는 과거의 이해가 현재의 문제에 어떠한 통찰과 방향을 제시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와 아울러, 현재의 기록들이 후대의 역사적 사실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의 특정 기득권 집단의 편향된 관점과 해석에 의한 기록들이 주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현재의 기록들이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동시에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들이 기록될 수 있도록 사회적, 역사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해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최대한 많은 관점을 담은 역사적 사실들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놓는다면, 후대의 역사가 내지 독자들은 우리 시대의 역사를 보다 균형있고 충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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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승주나무 > <고등학교 논술 버전> 우리도 한번 고양이가 되어 보자
나비야 청산 가자 -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
최영철 지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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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 글은 3월 19일 이후에 공개해야 할 것이었다. '전국토론논술대회'의 필독 도서이기 때문이고, 내가 때아닌 '동화'를 읽은 것도 '일' 때문이다. 하지만, 베끼지만 않는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 글을 읽게 될 '참가자'의 노력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올린다.

그리고 처음으로 '논술버전'으로 리뷰를 썼다. 제시문과 그에 대한 간단한 메모인데, '리뷰'와 너무 동떨어지지 않도록, 특히 '정떨어지지 않도록' 쓰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스포일러도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스토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한 데서 그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는 '일반 버전'과 '논술 버전' 두 가지로 쓸 작정이었으나, 이 책이 무슨 '상전'이나 된다고 서평을 두 번이나 쓸까. 그 만한 정도의 책은 아니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고양이의 특징과 비유를 많이 땄으며, '어린왕자'의 이야기도 제대로 녹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가 유기적이지 않다. 왜 그렇게 '조력자'는 많이 나오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인가, 일부러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조력자들 등장시키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는데, 그 '무엇'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문학 이론'에 빈번이 등장하는 말인데. 특히 마지막 장면은 좀 실망이다. 에잇! 또 서두가 너무 길었다. 이거 병 아닌가. 아무쪼록 '참가자'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길게 쓴 서두는 그냥 넘어가고 '좋은 의미', '좋은 글'로 된 본문을 많이 봐주기를 바란다. 그래도 처음으로 해보는 거라 재밌었다^^

우리도 한번 고양이가 되어 보자


논술의 시선으로 문학 바라보기


우리는 문학작품을 논술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논리적 전개에 의한 비문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학이 비논리적 전개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기법을 통해서 가려져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압축’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소한 방식으로 된 문학(소설)을 논술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모든 문제는 나를 향하며, 나로부터 시작한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이야기 안에 깊숙이 참여해서 갈등과 메시지를 양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에 대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극적 갈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비문학이 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치듯, 문학 특히 소설은 이야기 안에 전개되는 ‘갈등’을 가지고 글쓴이의 주장을 전개한다. 따라서 소설의 핵심이 되는 주요 갈등을 분석하여 글쓴이가 보내는 메시지를 잘 해석해야 한다.

셋째, 이야기 안에서 사용되는 ‘상징’을 잘 해석해야 한다. 『나비야 청산가자』에서는 비교적 상징이 뚜렷이 명시돼 있다. 예컨대 ‘배불뚝이’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한다. 배불뚝이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수의 기업에 입사하여 젊은 나이에 ‘대리’라는 위치에 올랐지만, 이야기 안에서는 ‘세속적이고 교양 없는 무식꾼’으로 묘사된다. 이 밖의 여러 가지 ‘상징’들을 찾아다니며 글쓴이가 감춰둔 메시지를 하나씩 들춰내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보물찾기와 같이 알쏭달쏭하고 어렵지만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넷째, 이야기를 이야기에만 한정시키지 말고, 현실에 자꾸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보았던 의미와 메시지는 현실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나의 현실과 작중 인물의 현실을 대조해보기도 하고, 나를 그 이야기 속에 넣어 보는 등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의 목적과 길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이름 없는 한 마리 고양이가 된다.(고양이는 ‘제석’이라는 의미 없고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달고 다닌다) 고양이가 되어서 본래의 야성(정체성)을 찾는 긴 여정을 함께 떠나 본다.


이상과 현실, 통념과 자각


#제시문 1

배불뚝이는 채리 아가씨네 식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대체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철면피처럼 배불뚝이는 그런 환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채리 아가씨는 잔뜩 얌전을 떨면서 배불뚝이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채리 아가씨가 헛기침을 한 다음 배불뚝이에게 물었다.

“직장이 어디라고 했지?”

그러자 배불뚝이가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채리 아가씨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이, 아빠두.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기업 대리예요, 대리.”

“으흠, 그렇다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저는 채리 씨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배불뚝이는 자신감에 차서 거들먹거렸다. 장인어른이라니. 나는 기가 막혔지만 채리 아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배불뚝이를 내버려두었다. 배불뚝이의 태도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아빠. ○○기업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이고, 이 나이에 대리면 앞으로의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예요.”

채리 아가씨가 한술 더 뜨자 배불뚝이는 불룩한 배를 한껏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채리 아가씨의 엄마가 무슨 신기한 보석이라도 보는 듯이 배불뚝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대학도 그럼 거기를 나왔겠네? 거기, 거기 대학 말이야.”

이번에도 채리 아가씨가 낼름 대답했다.

“엄만. 그렇대두. 그 대학 안 나오고는 ○○기업에 들어갈 수가 없죠. 곧 일본이나 미국 지사로 나갈지도 모른대요.”

그래 놓고 채리 아가씨는 배불뚝이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프랑스에도 지사가 있다고 그랬죠?”

배불뚝이는 유치한 개그를 늘어놓던 그 교양 없는 말씨를 숨기려는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채리 아가씨는 황홀한 표정이 되어 있었고, 나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망과 절망 속에 빠져버렸다. 배불뚝이가 일류 대학을 나오고 일류 회사의 대리라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바로 채리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요즘 우리들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즉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는 죄를 지어도 벌을 안 받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죄가 없어도 죄인처럼 산다”는 말이다. 이야기 안에서 배불뚝이가 채리 아가씨의 가족들에게 실질적으로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가족들은 마치 커다란 은혜를 베푼 사람을 대하듯 고분고분하다. 배불뚝이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고양이는 배불뚝이와 종족이 달라 아무런 관습도 공유하지 않는다. 단지 배불뚝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일류 대학과 대기업이란 것이 고양이에게는 우습기만 하다.

우리는 미천한 고양이의 ‘눈’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서 있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본 적이 있을까. 한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와 전혀 다른 고양이의 눈, 우리와 전혀 다른 외국인의 입장,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비춰질까.

우리들이 ‘일류대’라 하며 떠받드는 대학들은 세계 대학 순위 100위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우물 안의 승자인 셈이다. 지식과 역량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학교의 서열은 종래에는 큰 의미가 없다. 

좋은 직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정부 고위 공무원이 OECD에 파견갔다가 크게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기본적인 영어 회화와 작문이 되지 않아 함께 일하기 힘들다며 한국 정부에 불만 가득한 공문을 보낸 것이다. 배우지 못하고 못사는 사람들 앞에서는 떵떵거릴 수 있지만, 세계에서는 당당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것이다.

제시문 1에서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는 이상과 현실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류대, 일류 기업의 꿈은 나의 꿈인가 다른 사람의 꿈인가. 다른 사람의 무상한 꿈에 내가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꿈은 무엇일까. 배불뚝이가 가족에게 공언한 ‘채리 씨의 행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채리 씨는 과연 행복할까. 여러 가지 의문이 중첩되며 전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리 씨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채리 씨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 채리 씨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행복은 저당 잡혀 있는 셈이다. 별 볼 일 없는 통념 안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시문 2

내 옆에는 늘 채리 아가씨가 있었고 나는 외롭다거나 불안하다는 등의 절박한 심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나는 내가 지키고 있어야 할 고양이로서의 야성을 많이 잃었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내 감각은 무디어졌고, 맛있고 부드러운 먹이에 내 이빨과 발톱은 녹이 슬었다.

내 어머니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야성이 내게 아직 남아 있을까?

나는 명상에 잠긴 채 몸을 뒤척이며 채리 아가씨의 식구들이 모여서 터뜨리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외로웠다. 온몸의 신경이 외로움으로 꽁꽁 얼어붙은 듯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나 혼자 이 넓은 우주에 내동댕이쳐질 날이 오리란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날이 밝자 식구들은 아침 일찍 찾아온 친척들과 어울려서 채리 아가씨를 데리고 모두 나가버렸다. 결혼식에 가는 모양이었다. 채리 아가씨의 결혼식에는 나도 꼭 참석해서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사람들이란 자기들 필요할 땐 뭐든 다 빼줄 것처럼 하지만, 일단 마음이 돌아서면 순식간에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쓸 만한 가구나 가전제품들을 함부로 내버리는 걸 보면서,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버려지는 고양이나 개, 다른 애완동물들을 보면서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들이 그제야 스멀스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운명은 흐르는 물과 같고, 그 물은 험난한 고비와 울퉁불퉁한 기복을 만나면서 흐르게 되어 있듯이, 나에게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왜 진작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사람이란 고양이보다 더 변덕이 심해서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언젠가는 짜증을 내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고양이는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결코 싫증나지 않을 존재라고 나는 너무 굳게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고양이는 개처럼 시종일관 충직하지도 않고 새나 열대어처럼 멍텅구리도 아니다. 우리는 감정의 표현에 충실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하다. 변화무쌍하고 시시각각 다른 기분을 연출해서 사람들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그것이 고양이로서 내가 가진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고양이인 나 자신을 믿었고, 채리 아가씨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역시 나는 혼자 사는 아가씨의 심심한 시간을 채워 주던 존재에 불과했던 것일까.

가족들 모두 결혼식장으로 몰려간 텅 빈 집에서 그렇게 잊혀지고 버려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자 으스스 몸이 떨렸다. <본문 중에서>


제시문 2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우정, 사랑’, 그리고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채리 아가씨의 따스한 손길 안에서 고양이의 감각은 무뎌지고 이빨과 발톱은 녹이 슬어버렸다.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하나의 장난감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당연하듯 챙겨먹고 살이 뒤룩뒤룩 쪘다.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으로 비싼 게임 프로그램이나 사치스러운 장식품, 옷가지 등으로 몸을 감싼다. 운동량은 없고 공부 몇 시간 하면 나의 일과는 끝이 난다. 나도 장난감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내 스스로에 의해 하는 일은 몇 가지나 될까. 나는 나의 주장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나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사랑은 그 사람을 마냥 행복하게 한다거나, 쾌락만을 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곧게 세상에 설 수 있도록 자립심을 키워주고,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닐까.

언젠가는 나도 고양이처럼 현실에 내던져질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따뜻하고 배불리 잘 지내오다 갑자기 현실의 벽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게 될 것이다.

“우정이란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던가. 채리 아가씨는 우리의 고양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적적하고 외로운 마음을 채우는 데 고양이를 이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나타나면 더 이상 같이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정’이나 ‘사랑’은 아니다.

고양이도 몹시 후회한다. 아끼고 쓰다듬어주는 사람 앞에 너무 쉽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셈이다. 고양이가 고양이인 이유는 남다른 야성과 감각, 날카로운 발톱에 있다. 야성도 정체성도 매번 환기되지 않으면 낡고 녹슬게 된다. 자기 자신이 있고 나서 다른 사람과의 우정이 성립된다. 나의 영혼과 성격, 적성과 개성을 깡그리 버리고 그 사람을 좇겠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의 사랑까지도 포기하는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의 장점을 북돋아주고, 커다란 단점이나 좋지 않은 습관이 있을지라도 시간을 두고 고쳐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스스로 설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독’을 안겨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제시문에서는 진정한 사랑과 우정, ‘관계맺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과 자유, 그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제시문 3

하지만 나는 채리 아가씨를 생각하면서 갈색 고양이에게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아. 넌 누가 사랑해주니?”

“사랑? 난 혼자야.”

“혼자라고?”

“그럼.”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어버려. 고양이는 자유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게 자유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뭐가?”

“사랑하지 않는 게 사랑하는 일이 된다니 말야.”

“그건 네가 사랑이란 걸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야. 사랑은 혼자 가지거나 누구로부터 얻어서 가지는 게 아니야.”

“가질 수 없다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해도 이해가 잘 안 갈 거야. 네가 홀로 설 수 있을 때, 그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홀로 서고 싶지 않아.”

나는 갈색 고양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홀로 선다니. 채리 아가씨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떠나고 하던 때를 생각하면 두 번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잠이 잘 안 온다며?”

“그렇긴 하지. 그래도 그건…….”

“그래. 그건 밤이 되면 고양이의 야성이 발동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말야, 네가 지금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야.”

“난 만족하고 있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마.”

“어쨌든 지금부터 가끔 홀로서기 연습을 해 보는 것도 생각해 봐. 방랑자로 사는 재미가 어떤 건지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갈색 고양이는 말을 마치더니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

어떻게 숲으로 간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제는 혼자야.’

‘아무도 없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혼란한 생각들을 잠재우려고 되도록 한곳으로 생각을 집중시켰다. 방음벽 꼭대기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혼자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것.’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것.’

‘홀로 서야 한다는 것.’

위험한 고속도로를 자유롭게 건너다니는 갈색 고양이 방랑자의 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고양이는 자유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게 돼.’

그랬다. 나는 혼자가 되었고, 자유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잃어버렸던 자유, 채리 아가씨를 사랑하면서 잃었던 자유를 마침내 되돌려 받게 되었던 것이다.

채리 아가씨와의 이별로 얻게 된 외로움과 안타까움 사이로 자유라는 새로운 공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외로움과 자유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가 보다.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삶.

나는 방랑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갑자기 혼자가 되고, 갑자기 자유를 얻어낸 내게는 조언자가 필요했다. 방랑자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게 많은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우리는 진정 자유를 원하지만, 사실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톱을 다듬고 야성을 기르고, 정체성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괴롭고 힘든 과정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락함’에 빠져들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을 잃는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리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은 또 뭘까. 자꾸 문제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 그것은 ‘자유’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감싸는 모든 환경들보다 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조건들에서 자유로울 때 진정한 사랑은 가능하다.

“자유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수월할 것이다. 고양이는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사랑 아닌 사랑을 하다가 쓸쓸히 버려졌다. 하지만 버려짐으로써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말하자면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고양이가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니었다. 때문에 앞의 말을 풀어서 쓰면 “사랑 아닌 사랑을 하게 되면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고양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면서 사랑을 했더라면 사랑도 자유도 지킬 수 있었고, 쓸쓸히 버려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의미 없는 것’을 사랑하기 쉽고, ‘무상한 것’에 마음이 쏠리기 쉽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은 “그 동안 쓸데없는 곳에 공력을 들여 왔다”고 한탄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어떤 것이 의미 있고, 어떤 것이 무상한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의미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이나 통념을 통해 그것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고양이처럼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한평생 살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는 ‘자유와 방종’, ‘자유와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자유와 비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인생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유를 버리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누군가를 위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말은 온당하지 않다.

이렇게 ‘자유’라는 의미를 알고 있다면 고양이처럼 크게 혼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랑은 ‘노예상태’나 다름없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존재가 없는 사랑이므로, ‘장난감 사랑’이다. 나는 나인가 장난감인가. 나는 자유롭고 개성 넘치고 정체성을 확립한 자아인가, 타성에 젖어있고 끌려다기만 하는 ‘장난감’인가.

고양이가 방랑자를 찾는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친구가 ‘방랑자’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방랑자에게 사랑과 자유에 대해서 다시 물어볼 것이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


#제시문 4

나비가 아직 그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걱정이 되었다.

“아마 그럴 거야. 요즘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이민을 가기도 하니까. 이젠 안 기다릴 거야?”

“그럴 작정이야. 좀 더 기다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이사를 왔거든.”

“그 사람들이 널 내쫓았니?”

“쫓겨난 건 아니야. 내가 그냥 나왔어.”

나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전에 함께 살았던 파마 아줌마처럼 몽둥이를 들고 나비를 밖으로 내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제 자유를 찾은 거네.”

“그런 셈이지. 하지만 좀 혼란스러워.”

“첨엔 나도 그랬어. 곧 익숙해질 거야. 전에 살던 집 얘기나 좀 해봐.”

나비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짓더니 그 사람들이 아직 그립다는 듯이 말했다.

“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이었어. 재롱둥이 푸들, 아침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하얀 문조, 열심히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열대어와 함께 살았지.”

“그 많은 동물들과 한 집에 살았다니, 야, 대단했겠구나.”

나는 나비의 기분을 돋우어 주려고 소리까지 질렀다. 그 많은 동물들이 한 집에서 산 건 분명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을 사랑해서 그랬을 거란 나비의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 남을 사랑하거나 남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도 실은 자기 감정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야. 채리 아가씨가 그랬고 배불뚝이가 그랬고 영은이가 그랬고 파마 아줌마가 그랬다.

……

“걱정하지 마. 우리끼리 잘 살 수 있어. 사람들 때문에 그걸 아직 잘 모르고 살았던 거야. 우리에게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능력들이 많이 있거든. 뭐가 걱정이야. 그리고 …… 내가 있잖아.”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사랑이란 누군가의 햇볕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그늘이 되기도 하는 것인가 보다.

나는 앞으로 닥칠 시간들에 대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나비에게 햇볕이 되고 그늘이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사람이나 고양이나 암컷은 자신 외에도 다른 생명을 키우는 본능이 있으니까. <본문 중에서>


하나의 촛불이 만 개의 촛불을 다 밝혀도 맨 처음의 촛불은 꺼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이다. 베풀면 베풀수록 커져만 가는 것이 사랑의 모습이다.

나비는 고양이의 남자친구이다. 고양이처럼 사랑 아닌 사랑을 하다가 방금 쫓겨났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부질없는 기다림과 배신감에 치를 떨고 나서는 차차 차가운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조언자를 만난 것이다. 고양이는 조언자를 찾았지만, 운명은 아리송하게도 고양이를 조언자로 만들어 버렸다.

고양이에게는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줄 친구가 생긴 것이다.

이제는 앞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물음에 대답할 시간이다.

“사랑 아닌 사랑을 하게 되면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

우리는 사랑 아닌 사랑은 알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알지는 못한다.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자유와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도,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째 물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앞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 아닌 사랑’은 누군가의 개성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배려하는 것을 ‘할애(割愛)’라고 한다. 자유에도 비용을 치르듯이, 사랑도 비용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올 만큼의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비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 ‘진정한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박애(博愛)’의 정신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배려하고 아끼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모든 사람을 연결할 때 비로소 ‘박애’가 실천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고양이의 몸을 빌려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고양이처럼 자아를 상실하고 관습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가 자아를 찾고 자유를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은 비용만이 아니다. 다른 집에서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기회를 박차고 차가운 야생의 숲으로 돌아간 것은 커다란 ‘용기’였다. 나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진정한 자유와 사랑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으로 뛰쳐나온 것조차도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현실의 벽은 나를 감싸고, 안락함은 우리를 유혹한다. 나는 나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온갖 옳지 않은 것들을 배척할 의무가 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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