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시절 부모의 엄격한 양육 환경이나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대체로 사춘기 시절을 힘들게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부모 내지 종교의 도덕적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한 상태에서 사춘기가 되었을 때, 자신의 감정과 개성을 분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가치들과 충돌되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어린 시절 올바름을 가르쳤던 <밝음의 세계>와 감정의 충동이 난무하는 <어둠의 세계>가 내면 속에서 대립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어린 시절에 나의 <밝음의 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착한 아이 컴플렉스, 다른 하나는 교회 신앙이었다. 쌍동이 중의 형이었던 나는 어린 시절 모든 것을 동생에게 양보하는 모범적인 형으로서의 역할을 깊이 내면화했고, 이로 인해 하고 싶은 것 대신에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하는 데 매우 익숙해졌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이후 중,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있던 어머니의 교회 공동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 특이한 교회 공동체의 여러 계시와 규율들이 점점 더 나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중, 고교 시절 흔히 갖게 되는 많은 충동과 일탈의 유혹이 생길 때마다 <밝음의 세계>로부터 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많이 괴로워했고, 이러한 <두 세계>의 대립을 성숙하게 다루지 못한 채 사춘기 시절을 힘들게 보낸 기억을 갖고 있다.
 
  <데미안>은 이러한 <두 세계>의 대립에 사로잡혀있던 한 어린 소년이 사춘기를 거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삶의 여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장소설들이 진정한 자아의 발견을 기성 가치, 질서와 화해하는 데서 찾는 것과 달리, <데미안>은 기성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는 데서 찾고 있기 때문에, 도발적인 성격을 띤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글 전체의 분위기도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음울하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이 주조를 띠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데미안>에 대한 왠지 모를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기성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어딘지 모르게 체제전복적인 음험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화되어야 할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진보해왔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 글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아의 발견은 아프락사스의 실천에 있다'는 명제가 갖는 파괴력과 호소력이 매우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데미안>이 당대에는 물론 현대의 우리들, 특히 자아를 찾아 진지한 방황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 즉 <밝음의 세계> 가운데 평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평범한 소년이다. 그러다가 그는 집안의 하녀들, 가난한 이웃들에게서 욕설과 싸움이 난무하지만 솔직한 감정의 분출이 있는 <어둠의 세계>를 발견하고, 호기심과 두려움을 갖고 <어둠의 세계>에 점차로 빠져든다. 어느 날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이웃 불량소년의 나쁜 의도에 말려들면서 거짓말과 도둑질이라는 '나쁜' 짓을 계속하게 된다. 그는 부모의 뜻을 어기고 죄를 저질렀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두 세계> 가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에 싱클레어는 상급생인 데미안을 만나게 되고, 그와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때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제시하는 성서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하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옆에 함께 매달린 두 도둑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카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벨을 시기하여 동생을 죽인 극악무도한 살인자, 인류에게 죄악의 씨앗을 안겨준 첫 조상으로 기억한다. 또한, 우리는 두 도둑 중에서 예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도둑을 구원에 이르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는 <선한 세계>의 가치를 독점하고자 하는 세력이 의도적으로 만든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에 의하면 카인은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아니라, 오히려 강인한 내적인 힘을 갖고 신으로부터 독립하였기에 약한 자들로부터 질시를 받은 종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킨 채 죽음을 떳떳이 맞이한 도둑이 오히려 자기 내면의 진실에 보다 더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선한 신에게만 숭배하지 말고, 때로는 악마에게도 숭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기존의 <선한 세계>의 가치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대체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카인을 옹호한다니, 그리고 악마에게도 숭배하라니. 하지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지식과 발명품 - 예컨대 종교와 문화 - 들은 하나의 해석일 뿐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만약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종교도, 정치 체제도 진작에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자신이 아닌 남에게, 공동체에게 절대적인 진리를 내세우며 도덕율을 강요하는 일체의 <선한 세계> 안에는 이데올로기, 즉 권력의 의도가 분명히 숨어있다. 따라서 데미안의 문제제기는 비록 그 자신의 것도 하나의 해석적 관점일 뿐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선한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밝히 드러내어 이를 상대화시키는 미덕을 갖고 있다.
 
  '카인의 표적', 그것은 데미안과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기존의 도덕율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을 아우르는 표식이었다. 싱클레어는 '카인의 표적'을 통해, 그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왔던 부모의 <선한 세계>를 상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고독감을 안은 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이 때부터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고독과 냉소 가운데 술과 향락, 성욕에 취해 지낸다. 그는 어린 시절과는 반대로 금지된 것의 세계를 맘껏 경험하지만, 결국 몸과 영혼이 망가지는 자신을 보며 참담한 좌절을 느낀다. 그는 다시 한번 - 이제는 외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 절제와 금욕, 품위를 통해 자신의 <선한 세계>를 세우려 노력한다. 즉 자신을 그토록 억압하고 가두었던 <선한 세계> 속으로 스스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 때 그는 데미안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편지 안에 적혀 있던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이다. 바로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이 글귀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즉, 새가 알을 뚫고 나오듯이,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이래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감싸고 규정짓고 있는 세계, 즉 <선한 세계>를 의심해야 - 상대화해야 -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이 만든 <선한 세계>가 선포하는 가치와 도덕이 -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선한 세계>의 대척점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를 용기있게 바라보는 '카인의 표적'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알을 깨뜨리고 뚫고 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아프락사스에게로 날아가야 한다. 아프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으로,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신을 가리킨다. 즉, 아프락사스가 상징하는 것은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옳은 것에 대한 의무감으로 살거나 또는 금지된 것에 대한 방종으로 사는 극단적 삶의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두 세계>, 즉 '당위'와 '금기'의 세계를 뛰어넘어 완전히 자유로와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이제부터는 외부의 세계로부터 자신의 내면에 동시에 던져지는 '양심의 소리'와 '유혹 및 충동의 신호'에 의해서 더 이상 갈등과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에 자신의 진정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운명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흔히 말하듯 가장 '나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후 싱클레어는 '아프락사스'의 문제의식과 줄기차게 씨름하면서 자아를 완성해나간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살부살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선 수행을 하는 중에 부처님이 와서 방해하면 부처를 죽이고, 선사(조사)가 와서 방해하면 그를 죽이라"는 뜻이다. 어떤 가르침이든 그 본질을 파악하고 나면 더 이상 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 스승의 가르침의 '문구'에 매여서도 안 되고, 그 가르침에 대해 자신의 내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물음과 오류가 있다면, 설사 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덮어두는 대신에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프락사스의 성취, 즉 자아의 완성은 절대적인 진리인 척하는 모든 것을 - 그것이 '당위'든지 '금기'든지간에 - 상대화하며, 자신의 운명 속에서 자신만의 절대 진리 - 진실 또는 해석 - 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온전히 삶을 살아낼 때 이뤄진다. 따라서 이렇듯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은 세상 가운데 홀로 서서 스스로 해석하며 살아내야만 하는 고독(절대고독)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데미안>은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느끼는 음울한 허무와 냉소, 지독한 고독과 삶의 무게감에 흠뻑 빠져 어느새 팍팍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싱클레어가 겪은 <두 세계>의 분열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지는 않는다. 그 대신 마음 속에 <두 세계>의 대립이 생길 때마다, 좌충우돌 양 극단을 오가면서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라며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즉,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일체의 것(세계) 에 대한 치열한 물음, 즉 '카인의 표적'을 얼굴에 뚜렷이 새기며 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현대를 사는 현명한 처세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깊이 생각하고 용기있게 물음을 던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당위'와 '금기'의 두 세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성숙한 자유로움으로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이처럼 독립되고 성숙한,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한 걸음씩 진보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아의 실현, 완성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고 나와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말해야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카인의 표적'으로 <두 세계>의 이분법을 뛰어넘고, 아프락사스를 통한 자아의 성숙이라는 싱클레어의 자아 찾기 여행을 깊은 공감 속에서 함께 따라갔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싱클레어가 자아를 성취하는 과정이 매우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데미안의 친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아프락사스의 화신'으로 묘사하는데, 이러한 에바 부인과 싱클레어의 사랑은 초현실을 넘어서 매우 비현실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다행히 김용규 님이 쓴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라는 책을 통해서, 융 심리학에 근거해 자아의 성숙과 완성을 상징하는 관계로서 싱클레어와 에바 부인의 사랑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주도하는 공동체 모임에의 참여 및 전쟁에의 참전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완성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싱클레어의 모습은 그가 깨달은 아프락사스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실제로 자아의 깨달음은 골방 안의 성찰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자아의 실현은 골방 안에만 머물러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는 세상,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변화, 발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아는 <골방 안의 성찰>과 <세상 속의 실천>의 순환고리 속에서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싱클레어에게는 실천을 통해 삶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가 공동체 모임에 참여해 보여주는 모습은 그가 혐오했던 패거리에의 안주, 또는 지적인 유희로 느껴진다. 데미안이 전쟁발발을 앞두고 대위 진급 등 참전의 구체적인 준비와 함께 세계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과의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염려로 어쩔 줄 몰라 한다. 이처럼 소설 전반부에 싱클레어가 고통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 했던 모습을 그리도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치열하게 그렸던 반면에, 정작 그가 자아를 실현하고 완성해가는 과정이 상징과 관념으로 얼룩진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의식과 메시지는 송곳처럼 날카롭기만 하다.
 
 
  * 한 가지 덧붙이면, <데미안>의 번역본이 무척 많지만, 서점에 가서 직접 예닐곱 권의 번역집을 읽으면서 비교해본 바로는 <민음사>의 번역이 제일 훌륭했다. '고전은 시대에 따라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문학은 그 자체로 한국 문학이다' 라는 문학전집 기획 의도에 맞게, 번역이 매우 자연스럽고 거기에 더해 문체가 수려해 문학적이기까지 해서, 읽는 내내 흡족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