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이 되어 버린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교훈을 얻어 현재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적용하고자 하는 실천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고, 이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이는 일부분만 타당한 설명이다. 오히려 E.H 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대하는, 역사가를 비롯한 현대인들의 자세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해석
 
  '과거와 현재'라는 말에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재)해석'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따라서, E.H 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사실과 해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먼저, E.H 카는 '과거의 사실'를 둘러싼 역사에 대한 오래되고 뿌리깊은 어느 견해를 언급한다.

  역사란 단지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랑케)

  이와 같은 견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신성시하고, 이를 철저히 고증하는 것에 역사와 역사가의 최고 가치를 부여한다.  E.H 카는 이러한 견해가 그동안 역사에 대한 주류적 시각이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흐름은 이성과 과학에 의한 문명의 진보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을 정도로 풍요롭고 안정적이었던, 19세기의 '사실'의 시대에서 비롯한다. 콩트로부터 시작된 실증주의 학풍, 더 거슬러 올라가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수많은 자료, 사실을 확보하기만 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역사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E.H 카는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도전적인 물음을 던진다. 과연 과거의 모든 사실은 반드시 빠짐없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또한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인가? 과연 어떤 이유로 인해, 과거에 생겨나 당대의 누군가는 한동안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수많은 사실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소멸되고 일부만이 역사적 사실로 살아남는 것일까? 그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역사적 사실의 선택에 있어, 역사가의 해석과 관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역사가의 해석이 과거의 사실을 결정한다
 
  첫째, 후대에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 인용, 발굴하는 - 역사가의 해석과 관점이 동시대인들에게 그 타당성 내지 중요성을 인정받을 때, 과거의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 선택, 결정된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개똥녀' 사건을 예를 들어보자. 이 사건은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만든 사건인데, 이 과거의 사실이 향후 50년 후에 역사에 기록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10년뒤 어느 역사가가 우리 시대를 기록하면서 '민주주의의 정착과 IT 기술의 획기적 발달로 정의할 수 있는 시대에 의사소통의 자유가 절제되지 못하면서 생겨난 개인의 사생활 침해 사건'이라는 해석과 함께 '개똥녀' 사건을 인용할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후 다른 학자 또는 언론의 기록에 '개똥녀' 사건이 계속해 인용되어 그 의미와 해석이 풍부해진다면, 이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 선택될 것이고, 더 이상의 반향없이 일회성에 그친다면, 발굴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과거의 사실로 숨어들 것이다.

  결국, '개똥녀'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 살아남을지 여부는 이를 인용, 발굴하면서 역사가 또는 언론이 부여할 의미와 해석이 얼마나 동시대인들에게 타당하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달려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노사모의 선거운동' 사건은 '개똥녀' 사건에 비해 역사적 사실로 남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노사모의 자발적 정치 참여가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당대의 수많은 언론, 지식인을 통해 그 의미가 해석되었고, 이는 추후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주목받을 가능성과 타당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실'은 사실 그 자체로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선택해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할 때 비로소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 E.H 카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기초적 사실(연도, 장소 등 사실관계)의 정확성 확보는 역사가의 기본적 의무이지 본래의 임무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집을 짓는 건축가가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적 의무일 뿐 본래의 임무는 설계와 시공인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E.H 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당대에 발생한 수많은 사실들이 기록 및 전달되는 과정 자체에 이미 기록자의 '선별'이라는 해석이 부여된다고 말한다. 즉, 당대의 사실들 중 일부가 선택되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는 과정에, 소수 특정 집단의 특정 견해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왕조의 역사이다. 왕의 권력을 둘러싼 수많은 정보들을 얻기는 쉽지만, 당시의 농민, 천민들의 생활과 문제의식에 대한 정보들은 얻기가 매우 어렵다. 농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 나라가 쇠퇴의 길에 들어설 때뿐이다. 그것은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사람들이 양반 계급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취사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원본 사료(문서)는 역사가 또는 동시대인의 올바른 역사 해석을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원문을 읽지 않고 원문을 요약하고 해석한 2차 자료에 근거해, 원문의 의도와 부합하지 않은 잘못된 결론과 판단에 도달하는 경우를 흔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본 사료의 기록 당시부터 선별, 즉 해석이 개입된다면, 도대체 100%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원본 사료의 기록 과정과 후대의 역사가에 의한 발굴 및 인용, 전달 과정에 '해석' 행위가 개입되는 상황에서, E.H 카는 이제는 더 이상 사료로서의 '사실'을 그 자체로 무오류인 것으로 숭배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를 정리하면, E.H 카는 역사는 논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을 최대한 많이 기록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용도폐기할 것을 주문한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란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중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들이 당시에 일어나게 된 동기와 배경을 파헤쳐, 의미있다고 판단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선택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 시대의 문제를 조망하는 데에 타당한지를 기준으로 과거 사실의 유의미성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예: ?)
 
  '역사는 현재의 해석'이라는 말의 의미

  그렇다면, 역사는 과거의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가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부여하는 현재의 해석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첫째, 역사의 사실들은 기록자 - 당대이든 후대인든지간에 - 의 의도를 통과하면서 굴절되기 때문에, 무조건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에 숨어있는 각종 행위의 동기와 의도를 탐구하여 자신의 것과 대면하여 재구성하듯이, 역사가의 기록을 읽는 우리도 역사가의 기록 행위에 숨어있는 동기와 의도를 파악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연구하기 전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 선별하고, 해석한 - 역사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묘청의 난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읽을 때 김부식이 묘청과 대척점에 있던 당시의 정통 관료 출신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하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도, 독자도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고,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인해 그 시대에 얽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역사가가 그러하듯이 현 시대의 견해와 문제의식에 근거해 역사가가 기록한 역사적 사실들을 파악하고 해석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가의 이해관계와 의도에 따라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왜곡(해석의 오류)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역사가의 기록을 대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흔히 우리의 존재조건으로 인해 일본의 한국 침략은 제국주의로 비난하면서도 광개토대왕의 요동 침략은 영토 확장과 대륙 진출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의 이중성을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세째, 위 논의의 연장선에서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현재의 관점과 해석에 따라 과거를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역사적 사실들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배경을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한다. 즉, 과거의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 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역사가가 기록하는 동안 가졌던 의도와 관점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들여다볼 때, 이에 근거해 자기 나름대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만약, 우리의 이해관계로 인해 과거의 사실 속에 숨어 있는 배경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면, 이러한 편견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결론적으로, 역사가를 포함해 동시대인인 우리는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조망하여 이해하게 되고, 이러한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재의 문제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문제의식과 관점에 근거해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선택해 해석(의미부여)하고, 이를 통해 얻어진 과거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방향성을 재발견하는 일련의 상호작용을 겪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유명한 답변인 "역사는 과거(과거의 사실)와 현재(역사가의 현재의 해석)와의 끊임없는 대화(상호작용, feedback)"로 돌아갈 수 있다.

  현재의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역사에 대한 이와 같은 E.H 카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어온 다수의 기대에 반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에서조차, 동일한 사건(예를 들어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을 보고도 각자의 정파적 이해관계 내지 학문적 관점에 따라 전혀 반대의 평가와 해석을 내어놓는 것을 보면, 과연 후대의 역사가 내지 독자가 우리 시대를 기록한 역사적 사실을 어떠한 고려도 없이 순진하게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것을 쉽게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가 조선일보와 뉴라이트의 기록을 참여정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로 채택하고, 후대의 독자들이 이를 토대로 우리 시대를 실패한 정권, 실패한 시대로 기억한다면, 끔찍하지 않은가.)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며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의 몫은 다음의 두 가지가 될 것 같다. 우선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기록들을 대할 때, 기록자 - 당대이건, 후대이건 - 의 해석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이렇게 해서 얻는 과거의 이해가 현재의 문제에 어떠한 통찰과 방향을 제시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와 아울러, 현재의 기록들이 후대의 역사적 사실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의 특정 기득권 집단의 편향된 관점과 해석에 의한 기록들이 주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현재의 기록들이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동시에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들이 기록될 수 있도록 사회적, 역사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해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최대한 많은 관점을 담은 역사적 사실들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놓는다면, 후대의 역사가 내지 독자들은 우리 시대의 역사를 보다 균형있고 충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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