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포 가는 길 ㅣ 황석영 중단편전집 2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예전에 '회사에 가면 죽는다' 라는 책이 있었다. 회사라는 조직이 부여하는 위계질서와 분업화된 업무 방식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자신의 존재적 가치는 어느새 잃어버린 채 익명화된 개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과장, 김대리 등으로 불리면서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러는 중에 서서히 이 아무개라는 고유의 존재는 잊혀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회사와 기업으로 대표되는 현대 산업사회의 구성원들이 겪는 인간소외의 모습을 황석영 님의 <삼포 가는 길>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영달은 건설 현장의 날품 인부이다. 공사장의 밥집(함바)에서 머물며 지내지만 받는 노임이 적어 빚을 지고 있다. 게다가 그는 밥집의 주인인 십장의 아내와 살림을 차리고 지내다가 그의 남편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찬 겨울에 졸지에 도망쳐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도망쳐 나왔지만 정착할 곳 없이 새로운 곳으로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뜨내기 신세다.
백화는 열여덟에 가난한 농촌을 가출해 자신의 본명을 숨긴 채, 공장과 공사판 등을 떠돌며 몸을 팔아 생계를 잇는 작부였다. 그녀는 가출한 지 다섯 해가 되자 모든 것을 청산하고 돈으로 사서 자신을 데리고 있던 술집을 남몰래 도망쳐 나온다. 그녀는 고향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정씨도 영달처럼 오랫동안 공사판을 떠돌던 뜨내기 인부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지친 심신을 이끌고 마음의 정처인 고향을 찾아간다. 그는 고향에서 그물을 치고 감자를 메며 소박한 일생을 보낼 희망을 갖고 삼포로 가는 여정에 있다. 정씨가 가는 길에 영달을 만나고, 이들이 함께 가는 길에 백화를 만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영달, 백화, 정씨, 이들은 왜 고향을 찾아갈까. 이들은 공통적으로 가난한 뜨내기 인생들이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돈을 벌고자 애쓰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어릴 적 따뜻하고 행복했던 고향의 기억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잃었던 자신을 찾아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어떤 소외였을까. 그들이 겪은 소외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 해답에 70년대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있다. 1960,70년대 공업화가 본격화되자, 대다수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으로, 건설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영달과 정씨도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건설 현장의 인부로 일하게 되었다. 이들 날품 인부들이 건설 현장에서 겪는 소외의 모습은 작가의 다른 소설인 <객지>에 잘 드러나 있다.
노동의 소외, 공사판의 날품 인부들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예컨대 인부들은 현장 소장과 십장, 그리고 감독조 등 사용자 측이 임의로 정한 시간에 따라 일해야만 했다. 그들은 낮은 노임을 받으면서도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들은 '무거운 돌을 바다에 짊어 나르며 혈관이 터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일했지만', 사용자들은 '공사장의 바윗돌과 같은 풍경의 일부'로 느낄 뿐이었다.
다시 말해 사용자와 노무자 사이의 관계는 철저히 이윤의 동기에 기반한 경제적, 물질적 관계였고, 이 과정에서 인부들은 일상적인 노동 착취를 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용자 측이 밥집과 술을 파는 매점에서의 전표 운영을 통해 인부들의 노임을 상당 부분 가로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부들은 빚을 져 공사판을 뜨기도 어려운 신세들이었다. 이처럼 땀 흘리는 노동의 자부심을 빼앗긴 채, 낮은 임금 속에서 사용자에 의해 끊임없이 요구되는 고된 노동은, 영달과 정씨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고 삶의 고단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어릴 적 고향의 농촌 풍경은 이와 사뭇 달랐을 것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들은 논과 밭을 매면서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올곧이 스스로 노동의 주체일 수 있었다. 또한 이웃과의 정겨운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정씨는 이처럼 삶의 고단함과 소외를 벗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마음의 정처인 고향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고, 오갈 데 없는 영달은 정씨의 고향길을 함께 한다.
백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가난한 농촌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기술 하나 제대로 없었기에 공장 또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자신의 몸을 파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공장 및 공사판의 노동자, 인부들이 그녀를 의미있는 인격적 존재로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내어 주면서, 자신의 존재적인 의미 - 젊은 날의 꿈과 사랑 등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런 자신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잃었던 자신을 찾아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고향을 향해 가는 길은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백화가 찾아가는 농촌도, 정씨가 찾아가는 삼포(포구)도, 모두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소외되지 않는 노동, 의미있는 관계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으로 가는 길 위에서 서로를 진정으로 주고받는 정서적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공장과 공사판으로 대표되는 산업 사회에서 겪었던 익명의 물질적 관계와는 질적으로 달랐을 것이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정씨를 대하던 영달은 이내 의심을 거두고 그와 말동무, 길벗이 된다. 또한 처음에는 서로 불신하며 퉁명스럽게 대하던 영달과 백화는 눈길을 함께 걸으며 어느새 따뜻한 정을 서로 느끼게 된다. 백화는 폐가에서 추위에 떠는 자신을 위해 묵묵히 땔감을 만들어 불을 지피고, 다리를 삐끗해 걸을 수 없게 된 자신을 감천 읍내까지 업어준 영달에게서 따뜻한 인간의 정을 진심으로 느낀다. 영달이 백화의 고향으로 가는 대신에 정씨와 함께 삼포로 가겠다고 했을 때, 백화는 헤어짐이 아쉬워 눈이 젖은 채로 자신의 본명을 영달에게 알려준다. 이들이 비로소 익명을 벗고 존재의 소외를 극복하는 순간이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께요."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에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는 어떨까. 물론 지금의 모습은 70년대 초기 산업화 당시의 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노동자들을 포함해 사회 전반적으로 물질적 부가 증대되었다. 민주화가 상당히 이뤄지면서, 예전과 달리 노동자의 목소리도 커졌고 사용자의 노골적인 노동 착취도 없다. 또한 산업 구조도 엄청난 변혁을 겪어. 이제는 공장 산업에서 첨단 기술집약 산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였다. 이제는 노동자 개인의 지식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산업구조로 변화한 것이다.
하지만 산업 구조와 노동의 양상은 이처럼 변화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은 예전보다 더욱 치밀하게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고,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경제 환경 속에서 효율과 경쟁은 최고의 지상 가치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 노동자 개인의 창의와 혁신, 따뜻한 인성을 강조하는 기업들이 많지만,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궁극의 목적은 효율을 통한 이윤 추구다. 이러한 가치를 말하는 기업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의 유연성을 말하며 비정규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결국 예전보다 대다수 직장 노동자들은 더 많은 고용 불안,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이와 함께 물질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풍조는 그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사용 가치보다 교환 가치를 더 중시하는 상품화는 이제 더 이상 제품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서비스도, 사람도 모두 다 타인(고객)의 마음을 얻어 선택받기 위해 자신의 겉모양을 치장하기 바쁘다. 대학은 더 이상 진지한 학문의 탐구가 아니라 실용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애쓰는 공간으로 바뀐지 오래되었다. 물론 그 목표는 높은 연봉을 주는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 그리고 물질(상품)적 가치에의 몰두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보여주는 나로 존재하게 만든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사회 전반적으로 익명적 관계, 피상적 관계를 양산한다. 산업화는 이러한 관계망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소외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쁜 일상 중에 문득 소외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허무함과 삶의 고단함을 느끼며, 잃어버린 자아를 그리워할 것이다. 삼포를 향해 가던 영달과 백화, 그리고 정씨처럼......
백화가 떠난 후, 영달과 정씨는 삼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역내 대합실에 있던 어느 노인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삼포가 이미 개발이 되어버려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느 덧 바다에 방둑을 쌓아 대규모 관광단지를 만드느라 하루에도 트럭이 수십 대씩 돌을 나르고, 공사판과 시장이 벌어져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씨가 마음에 품었던 고향, 한적하게 나룻배에서 고기를 잡고 감자를 매며 지내는 고즈넉한 마음의 고향은 이미 온데간데 없던 것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이처럼 모든 이의 안식처, 고향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영달과 정씨가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 현대 산업사회의 우리들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