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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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에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미하일 엔데가 쓴 <벌거벗은 코뿔소>에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다 실패하고 마는 코뿔소의 이야기가 나온다. 난폭하면서도 어리석은 코뿔소 코로바다는 숲속의 동물들 위에 군림하려다가, 결국 그들을 모두 내어쫓은 후에 숲속의 왕국을 세운다. 그는 이후 하찮은 새 한 마리의 속임수에 넘어가 스스로 동상이 되어버린다. 자신이 숲속의 왕임을 뽐내기 위해 동상을 만들고자 했지만, 이를 만들어줄 동물들이 없자 자신이 직접 동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꼼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어야만 하는 처지에 빠진다. 결국 그의 동상에 대한 집착이 그를 파멸로 이끌어버린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벌거벗은 코뿔소>가 말하는 동상은 바로 권력을 상징한다. 권력자는 그 본질상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각 개인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유혹은 특히 정당한 절차를 따르지 않은 부당한 권력일수록 더욱 심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동상을 유형 내지 무형의 형태로 세우고자 애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상은 어느덧 피권력자인 '민()'이 이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민()'은 이렇게 스스로 우상화한 권력이 의도하는 동원 체제에 어느새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전제적 통치를 강화한다. 이를 통해 '민()'을 소외시키고 억압과 고통에 빠뜨린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1970, 80년대 독재 정권 시절에는 관공서나 학교마다 반드시 대통령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어야 했다. 또한 매일 오후 다섯 시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는 국기 하강식을 지켜보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 권력은 동상 뒷편에서 이를 반대하는 '민()'의 목소리에 대해 수많은 탄압을 저질렀고, 공업화라는 이름 아래 엄청난 '민()'의 노동을 착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당시 눈물로 그를 떠나보냈다. 그는 민주화 과정이 오래된 지금도 여전히 제일 존경하는 대통령 1위이다. 경제가 조금이라도 어렵다 싶으면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 그립다고 말하는 우리 사회의 여론을 볼 때, 피권력자가 내면화한 동상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당신들의 천국>은 이와 같은 동상을 둘러싼 권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나환자들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소록도라는 섬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느 휴먼 감동 스토리와 달리, 이 작품은 인간 사회 속에서 첨예하게 드러나는 권력의 문제를, 새로 부임한 병원장과 나환자들간의 갈등을 통해 치열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는 나환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천국을 만들겠다는 꿈으로 자애로운 '통치'를 하고자 하는 원장과 이를 끊임없이 불신하고 갈등하는 원생들의 대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합법적 권력이 만드는 동상이 어떻게 '당신들의 천국'을 만드는지, 그리고 이를 '우리들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진정으로 바람직한 권력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권력이 세운 동상과 배반, 그로 인한 불신
당신들의 천국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새로운 군인 출신의 조백헌 원장이 소록도에 부임했을 당시, 그가 본 섬 원생들의 모습은 무기력과 불신, 침묵 그 자체였다. 그가 부임하자마자 터진 섬 탈출 사고의 원인을 추궁하는 과정에 섬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는 지독히 비협조적이었고 냉소적이었다. 그는 심상치않은 섬 분위기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마을 전역에 건의함을 설치하지만, 이 역시 섬사람들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만다. 이후 부임 연설을 통해 자신의 포부와 약속을 말하는 원장 앞에서도 그들의 무반응과 침묵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원장을 보좌하는 보건과장 이상욱은 이를 '죽은 자의 섬'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원장은 이를 신뢰의 문제로 바라본다. 그는 섬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여기저기 뿌리깊은 불신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예컨대, 그는 '나병은 낫는다. 나병은 유전하지 않는다.'는 구호판을 마을 전역에 설치토록 하면서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자 시도한다. 병원 종사자들의 대환자 시료행위도 개선하여, 일체의 구분짓기를 금지시켰다. 또한 병사지대의 환경을 개선하여 직원지대와의 경계를 가르던 철조망도 철거하고, 청결한 환경을 위해 노력하였다. 더 나아가 미감아 아동과 직원 지대 아이들과의 공학을 단행하는 획기적 조치까지 내어놓았다.
 
그러나 원장의 이러한 노력은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원생들의 냉소와 불신은 여전하다. 원장은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 원생들의 대표를 모아 장로회를 조직하였지만, 불신이 해소될 기미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따로 존재하는가? 원장과 원생간의 신뢰를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뜨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원장은 이때 보건과장인 상욱을 통해 '동상과 배신'에 대한 놀라우리만치 지독한 과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은 바로 주성수 원장의 통치 기간의 이야기였다.
 
일제 시절 당시 부임한 주원장은 부임 연설을 통해 낙원에 대해 놀랍고도 감동적인 약속을 보여준다. 섬을 낙토로 만들어주겠다는 그의 약속에 감화된 원생들은 시설 확장 공사에 자발적인 참여를 보인다. 고된 노역으로 부상자가 속출해도 모두가 기꺼운 마음으로 주원장의 약속에 헌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2차 시설 확장 공사가 무리하게 진행되면서, 원생들의 자발성을 꺾어버리는 여러 조치들이 행해진다. 우선 원생들의 노력 봉사에 의해 경비가 충당되기 시작했다. 자발적 노역 참가가 시들해질 때 즈음부터는 노골적이고 가혹한 강제노역이 동원되었다. 고된 노역으로 인해 대다수 원생들의 병세가 악화되어도 식량배급 및 치료약, 노임은 점차 줄어들었다. 작업에 비협조적이거나 능률적이지 못한 원생들에 대한 폭행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원생들의 불만이 폭발할 즈음에 주원장의 동상은 건립되었고, 주원장은 어느 동상 참배일에 분노한 원생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원장의 사례는 합법적 권력이 배반에 빠질 위험과 그 폐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음에 주원장이 보여준 모습은 동상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열정 그 자체였다. 나환자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는 그의 진정성이 원생들의 희망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공사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좀더 크고 화려한 낙원을 꿈꾸었고,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는 위대한 원장이 되고 싶어하였다. 즉 자신의 동상을 스스로의 내면 속에 세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합법적 권력의 배신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평의회라는 겉으로 보기에 민주적인 자치 조직을 만들었지만, 사실상 이는 정당성 뒤에 숨어 효율적인 통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관단이라는 집행부를 만들어 노골적인 강제 노역과 탄압을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많은 새로운 시설들은 어느덧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었다. 바로 '당신들의 천국'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러한 배신, 즉 합법적 권력의 배신에 피권력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평의회는 그 속성 상 권력자의 통치 원칙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평의회는 주원장의 강압적인 노역과 규제 앞에서 저항과 투항 사이에 선택을 강요받았을 것이고, 결국 투항하였다. 평의회가 투항한 이후로 그들이 보여준 권력에의 굴종은 그 도를 넘어섰다. 예컨대 그들은 같은 나환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강제 노역의 끄나풀 역할을 자임했고, 급기야 동상 건립을 자발적으로 발기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치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자에 투항하여 피권력자를 다스리는, 소위 '배반'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합법적 권력의 극적인 배반은 <동물 농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존스 농장의 동물들은 지도자격인 돼지의 유언에 따라 반란을 일으키고 농장주를 쫓아내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열심히 노동에 임한다. 하지만 그들은 최고 지도자인 나폴레옹과 지도부인 돼지들로부터 속임수와 배신을 당하면서, 독재체제의 노예가 된다. 동물들은 끊임없이 노동을 착취당하면서도 특권을 누리는 그들의 여론조작, 즉 동상 세우기(우상화) 작업에 속아 넘어간다. 이처럼 독재와 혁명의 역사는 합법적 권력의 배반이 권력자의 욕망에 따라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합법적 권력, 또 하나의 배반
당신들의 천국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
 
하지만 '동상과 배신'에 얽힌 이와 같은 상욱의 해석과 경고를 듣고서도, 조백헌 원장은 선한 통치와 '우리들의 천국'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은 주정수 원장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동상을 결코 세우지도 않을 것이며, 오로지 섬 사람들의 삶의 여건을 개선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리라.'라고 스스로 굳게 다짐한다. 그는 섬 안에 나환자를 팀원으로 하는 축구 모임을 결성하고, 이를 통해 소록도 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축구팀이 연이어 도대항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명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다.
 
조원장은 축구 활동을 통해 원생들의 신명과 단결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후, 섬 사람들을 설득해 오마도 앞바다를 메워 농토를 만드는 간척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과거에 겪은 '권력의 배반'이라는 뼈저린 기억을 품고 있는 원생들의 불신을 불식시키고자 장로회를 설득하였고, 결국 그들과 함께 '배반과 의심을 상호 신뢰로 바꾸'기 위한 선서식을 갖는다. 이 선서식은 서로 짙은 교감 속에서 원장과 원생 모두의 공동 참여로 이뤄진다. 이후부터 오마도 간척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주정수 원장 때와 같이 원생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이 보태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원장의 시도는 과연 과거 주정수 원장의 경험처럼 '동상과 배신'으로 귀결되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신뢰를 통한 창조의 모범'으로 귀결되었을까. 처음에는 그리 될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신명나게 작업에 임했고, 사람들이 서서히 지칠 때쯤 다행히도 제 1 방조제 둑이 물 위로 솟아 올랐고, 그 감격이 채 가시지도 전에 제 2, 3 방조제 돌둑까지 쌓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힘들게 작업한 모든 것들이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원생들의 절망은 그 도를 넘어 원장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채토장 붕괴로 인한 추가 사망사고가 발생하자, 원생들은 원장을 죽이자며 봉기를 일으킨다.
 
비록 원생들이 다시금 원장과 신뢰의 끈을 유지하는 선에서 매듭이 지어졌지만, 이 사건은 '동상과 배신'에 대한 권력자와 피권력자간의 불신은 언제든지 모습을 달리하며 발생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원생들은 공사의 실패가 원장의 무모한 시도, 다시 말해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원장의 과욕 때문에 생긴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신들이 이에 강제 동원된 것으로 생각해 원장의 시도를 '합법적 권력의 배반'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한편 원장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은 채, 선서식에서 그들 자신도 함께 한 서약을 어기는 원생들의 모습에 배신감을 느낀다. 이러한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불안정한 신뢰의 끈을 유지하는 해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 답을 곧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으나, 원장은 곧 원생들과의 허약한 신뢰를 또 다시 확인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공사가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도에서 공사진척도를 파악하고자 공사 실적 평가반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말이 좋아 작업 감사지, 사실상 이를 핑계로 간척 사업을 섬 사람들로부터 빼앗아가려는 시도였다. 게다가 도에서는 원장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도록 원장에 대한 전임 발령을 낸 것이다. 원장은 이를 장로회에 알리고 전임 발령 전에 절강제를 잡는 것으로 하여 제방 공사의 마지막을 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웠다. 원생들도 이에 적극 화답하여 작업열을 불태웠고, 동시에 원장의 전임을 취소해달라는 청원 서명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뒤늦게 불붙은 공사의 열기는 그동안 원장을 보좌해왔던 보건과장 이상욱의 섬 탈출이라는 엉뚱한 사건으로 인해 결국 흐지부지되고 만다. 상욱은 원장이 원생들의 전임발령취소 청원서명운동을 막아달라는 것과 절강제와 상관없이 섬을 떠나달라는 것을 요구한다. 원장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원장을 압박하기 위해 섬을 탈출한다. 이에 원생들은 상욱의 탈출을 힘든 시기를 피해 섬을 빠져나간 건강인의 도피로 여기고, 더 이상 공사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공사 실적 평가반이 내어놓은 결과가 형편없는 것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원생들은 더 이상 간척사업을 빼앗아가려는 육지 사람들의 악의에 맞설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원장은 원생의 침묵과 무반응을 하나의 배반으로 여기고 허망한 마음으로 섬을 떠나게 된다.
 
이처럼 조백헌 원장의 새로운 시도는 실패했다. 그는 이전 주성수 원장과 달리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는 대신에 자애로운 통치로 섬을 살기 좋은 곳으로 건설하고자 헌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패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이를 보건과장으로서 원장을 보좌하다가 섬을 탈출한 상욱의 관점을 통해 전개한다.
 
상욱은 더이상 조원장이 자신의 동상을 세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지는 않는다. 물론 처음에는 이를 의심했다. 만 낙토의 건설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그가 더 나아가 동상을 세우려는 욕심까지 갖고 있다면, 이는 분명히 이전의 주성수 원장과 같은 배반으로 귀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원장은 그러한 동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상욱은 이를 신뢰한다. 하지만 상욱은 절강제와 원장의 전임발령을 앞두고 원생들이 원장에게 보이는 절대적 신뢰와 추종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또 하나의 '배반'이라고 단정한다. 즉, 피지배자가 자발적으로 권력자의 동상을 세움으로써 권력자의 동상을 내면화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참여하기보다는 권력자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추종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원장님의 진정 어린 동기에도 불구하고, 제가 걱정하는 것은 원장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 천국의 진실입니다.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이라 하더라도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채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천국이라면 이는 지옥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섬 위에 꾸미고 계신 원장님의 천국은 더 이상 원생들의 천국이 아니라 어쩌면 원장님 한 분만의 천국일 수 있습니다.
(중략)
원생들은 원장님의 소원대로 참으로 환자다운 환자가 되어갔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함부로 섬을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원장님이 그들을 협박하는 대신에 환자다운 긍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철조망을 쳐놓고 겁을 주는 대신에 원생들 스스로 철조망을 높여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천국은 사실상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린 채, 인간의 천국이 아닌 문둥이의 천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략)
전 결국 원장님과 원생들의 관계에서, 선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사이의 대등한 상호 지배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보는 대신에, 한 지배자가 어떤 불변의 절대상황 속에 갇힌 다수의 피지배자 집단을 손쉽게 저항없는 조작을 행하는 모습을 보아온 셈입니다. 원장님께서 진정 '우리들의 천국'을 꿈꾸신다면, 지금 섬을 나가주십시오. 이 섬의 진정한 주인이어야 할 저들에게도 스스로 자기들을 시험해볼 기회를 주십시오."
 
상욱이 원장에게 보낸 이 통렬한 공박에는 선의의 권력이 그 선한 동기와 관계없이 피지배자들을 소외시켜 엉뚱하게도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어버리는 메커니즘이 담겨있다. 이를 '합법적 권력의 배반의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상의 눈물>이라는 작품을 보면, 합법적이고 선의를 가진 교사(지배자)가 반장과 공모해 여러가지 이미지 조작과 속임수를 저지른다. 그들은 폭력을 저지르는 문제 학생을 제압하기 위해 시험 부정행위를 조작하는가 하면, 거짓으로 미담 사례를 만들어 영화화까지 시도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사는 문제 학생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고, 더 나아가 반 학생들(피지배자)로 하여금 교사와 반장를 추종하고 그들의 통치에 순응하게끔 만들어버린다. 마지막에 문제 학생은 가출하면서 '무서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말을 남긴다. 이처럼 합법적 권력이 그 동기의 선악과 관계없이 피지배자를 소외시키는 현상은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다.
 
(역사 속에서의 실제 사례)
 
그리하여 상욱은 원생들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자유'의 정신과 아울러 '참여와 자치'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통치 구조를 제안하고 있다. 즉, 통치자로서의 원장의 동상이 각 원생들의 주체적인 사고와 선택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자신들이 직접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 원장에게 섬을 떠나라고 촉구하였고, 이를 거절한 원장을 압박하기 위해 섬을 탈출한 것이다.
 
자유와 저항을 뛰어넘는 창조의 힘, 참여와 자치에 기반한 통합과 신뢰
우리들의 천국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그러나 작가는 '자유와 저항'의 정신만으로는 새로운 가치, 즉 '우리들의 천국'을 창조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원장에게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주었던 장로회 황희백 장로와 원장과의 대화를 통해, '사랑'의 정신을 강조한다. 먼저 황희백 장로의 말을 보자.
 
"이 섬에선 아닌게 아니라 자유로밖엔 행할 수 없었고 자유로밖엔 행해온 바가 없었거든. 하지만, 자유라는 게 말처럼 그렇게 되어본 적이 있었나. 언제나 아옹다옹 싸움질만 되풀이되어왔지. 자유라는 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우리 문둥이들한테 갖다바쳐주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건 제 힘으로 빼앗아 가져야 하는 거고 그러다보니 싸움과 의심,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된 거지. 따라서 사람들은 오로지 자유로만 행하고 싶어했고 또 그리 행할 줄은 알았어도 남을 용서하고 화합할 줄은 몰랐던 게야. 원장이 문둥이들을 위해 아무리 피땀을 흘려줘도 고마워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하고 미워했던 것이 바로 우리의 허물이야.
(중략)
이 섬에서 무언가를 행하고 이뤄야 할 도구는 바로 사랑이어야겠지. 자유라는 건 싸워 빼앗는 길이 되어 이긴 자와 진 자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빼앗음이 아니라 베푸는 길이라서 모두 함께 이기는 길이거든. 하지만 자유로 행하는 것조차 단념하자는 소리는 아냐. 다만 자유가 사랑으로 행해지고 사랑이 자유로 행해지되,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으로 행해나가자는 말이지.
(중략)
지금 와서 보면 원장이 이 섬에서 행해온 것은 모두가 사랑으로 해서였던 게란 말야. 그 원장을, 원장과 함께 알량한 자유 때문에 사랑으로 행할 수 없었던 문둥이들이 못났던 거네. 그렇다고 원장이 그동안 해온 일이 모두 허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원장이 황량한 문둥이들의 가슴 속에 제법 훈훈한 사랑을 보여주려 했거든. 그건 아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랫동안 이 곳에 남아 있게 될 사랑의 동상이 될 걸세."
 
황장로는 '자유'와 '저항'이 결과적으로 불신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자유'와 '저항'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자신의 동상을 강요할 때, 권력자의 배반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피지배자들이 오로지 '자유'와 '저항'에 몰두한 나머지 권력자의 선한 통치 행위조차도 무조건 불신해버릴 경우, 결국 아무런 성취도 가져오지 못하고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성취는 권력자와 피권력자 사이의 사랑과 화합에 기반해야 하며, 오히려 그러할 때에 피권력자의 자유의지가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섬을 떠난 상욱이 '자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성찰하면서, 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가 주장하고 있던 이유들 - 자유와 저항 - 이 저나 저의 이웃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진실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도대체 그런 식으로 원장님과 저희들이 그 섬에서 함께 이룩해온 것들을 부인해버리고 난 다음에는 섬이 과연 어떻게 되어가야 하며, 무엇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아무 것도 대답할 바를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이처럼 '자유'와 '저항'을 넘어 새로운 창조의 힘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이와 같은 과제를 실제로 겪어왔다. 1970, 80년대의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과제는 오로지 독재 타도, 단 한 가지였다. 다시 말해, 절대 권력에 대한 부정과 파괴로서의 저항과 자유만이 당시의 유일한 가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정권교체, 그리고 두 번의 민주적 정권을 거치면서, 파괴적 저항으로서의 운동은 시험대에 올랐다. 새로운 시대, 다시 말해 진정한 '우리들의 천국'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자유와 저항을 넘어서는 통합과 창조의 가치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장로가 말하는 자유를 뛰어넘는 사랑과 화해에는 하나의 전제가 빠져 있다. 바로 '신뢰'이다. 소록도의 원생들처럼 외부로부터 정해져 '부임하는' 권력의 통치를 받는 경우에는, 도대체 선한 권력과 그렇지 못한 권력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즉, 주정수 원장처럼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권력과 조백헌 원장처럼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는 권력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통치의 구조에 문제가 있다. 즉, 자신을 통치하는 권력을 자신들이 선출하는 권한을 스스로 갖지 못하고, 임명된 권력의 선함과 악함을 따져물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권력자와 피권력자 사이의 통치를 둘러싼 신뢰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피권력자가 권력자가 잘못할 경우에 이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뢰'를 회복해야 할까? 작가는 섬을 떠난지 5년만에 섬으로 되돌아온 원장의 모습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조원장은 섬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가 되돌아온 이유는 바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자유를 뛰어넘어 사랑과 화해로 가기 위해 필요한 신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운명'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시혜와 사랑을 베풂으로써 주어지는 천국이 아니라, 함께 하는 운명 속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가운데 진정한 천국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장은 이제 더 이상 원장이 아니었다. 비록 현재의 원장과 의논하는 등 영향력은 갖출 지언정, 그는 소록도의 한 일원일 뿐이었다. 함께 하는 공동 운명체로서 원장과 원생들 사이에는 뿌리깊은 신뢰가 형성되었으나, 이들이 아무런 권력과 힘을 행사할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분명 오랜 세월이 걸리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 원장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원장이라는 직위와 권능이 오늘날처럼 섬사람들의 운명이나 선택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일방적으로 군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어렵습니다. 운명은 자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장의 직위와 권능은 섬사람들 자신의 의사에 의해 그들 가운데서 선택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언제나 권력은 그 힘 자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이기적인 명분만을 지어내게 마련이니까요. 이것이 이 섬을 실패시키고 있는 가장 깊은 원인이겠지요.
(중략)
그런 때가 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그 때는 결국 와야겠지요. 그게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도... 그게 아마도 상상 이상으로 긴 세월이 걸리게 될 일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결국 작가는 상욱이 앞서 말한, '참여와 자치'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야 할 책임과 실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을 통치할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할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사람들은 피권력자의 신분에서 비로소 진정한 권력자의 신분으로 바뀐다. 그리고 위임받은 권력과 선출한 권력 사이에는 진정한 신뢰가 싹트게 된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랑과 통합의 통치가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단시일 내에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참여와 자치에 대한 자각을 싹틔우고 신뢰와 통합된 힘을 기르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권력자의 동상과 배신, 이로 인한 피권력자의 자유와 저항과 불신, 이를 넘어서 사랑과 화합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신뢰, 궁극적으로 신뢰를 만들어가기 위한 참여와 자치. <당신들의 천국>은 원장과 상욱, 황장로, 그리고 다수의 원생들과의 치열한 삶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한 가치와 과제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뿌리 내리기까지의 역사를 상징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디쯤 와 있을까? 과거의 독재자들은 권력을 쥐면서 항상 국민의 행복과 사회 정의를 약속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온갖 이미지 조작 등을 통해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결국에는 억압과 착취를 통해 국민들을 배반해왔다. 그리고 이는 곧 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자각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독재 권력은 회유와 협박, 탄압 등 온갖 방법을 통해 이를 제압하고자 하였으나, 자유와 저항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국민들은 5.18 광주 항쟁과 6.10 민주화 항쟁을 통해 선출된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합법적 권력의 배반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직까지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만이 자리잡았을 뿐 그 내용은 여전히 비민주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행정, 입법, 지방의 권력을 선출하고는 있지만, 선출되기 전에 그들이 내어 놓은 화려한 약속(공약)은 선출과 동시에 폐기처리되기 일쑤다. 그들은 겉으로는 국민(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온갖 특혜를 누리며 자신들의 이해관계에만 몰두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병역비리, 재산비리 등 부정부패가 가장 많은 집단은 국회의원, 고위 관리직, 지방자치단체장 등 권력자들이다. 이와 같은 배반은 그들이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마음 속에 동상을 심어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적 권력의 배반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의 참여와 자치는 아직도 제한적이다. 기회주의와 지역주의 등으로 그들만의 리그가 여전하기 강고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배반과 불신 속에서는 그것이 설사 합법적인 권력을 선출하는 민주 질서라 하더라도, 통합과 창조의 힘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힘이 더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새로운 창조의 질서로 나가지 못하고 아직도 혼란스러운 이유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시민들의 참여와 자치를 확대시키는 데 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권력과 정치에 대해,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자치가 필요하다. 우선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고 특권의식을 갖지 않은 정치 세력을 권력으로 선출하도록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또한 선출된 권력이 초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동상을 경계하며 바르게 통치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더불어 자기 삶의 주변과 일상에서의 자치 또한 필요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중앙에서 결정되는 시대는 지났다. 지방정부와 지역사회, 가깝게는 살고 있는 마을의 살림이 올바로 집행될 수 있도록 자치의 역량을 높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치와 참여에 대한 시민의 자각과 연대의 노력이 있을 때, 사회 전반의 통합과 신뢰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그들만의 리그' 내지 '당신들의 천국'을 넘어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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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가는 길 황석영 중단편전집 2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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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회사에 가면 죽는다' 라는 책이 있었다. 회사라는 조직이 부여하는 위계질서와 분업화된 업무 방식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자신의 존재적 가치는 어느새 잃어버린 채 익명화된 개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과장, 김대리 등으로 불리면서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러는 중에 서서히 이 아무개라는 고유의 존재는 잊혀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회사와 기업으로 대표되는 현대 산업사회의 구성원들이 겪는 인간소외의 모습을 황석영 님의 <삼포 가는 길>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영달은 건설 현장의 날품 인부이다. 공사장의 밥집(함바)에서 머물며 지내지만 받는 노임이 적어 빚을 지고 있다. 게다가 그는 밥집의 주인인 십장의 아내와 살림을 차리고 지내다가 그의 남편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찬 겨울에 졸지에 도망쳐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도망쳐 나왔지만 정착할 곳 없이 새로운 곳으로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뜨내기 신세다.
 
백화는 열여덟에 가난한 농촌을 가출해 자신의 본명을 숨긴 채, 공장과 공사판 등을 떠돌며 몸을 팔아 생계를 잇는 작부였다. 그녀는 가출한 지 다섯 해가 되자 모든 것을 청산하고 돈으로 사서 자신을 데리고 있던 술집을 남몰래 도망쳐 나온다. 그녀는 고향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정씨도 영달처럼 오랫동안 공사판을 떠돌던 뜨내기 인부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지친 심신을 이끌고 마음의 정처인 고향을 찾아간다. 그는 고향에서 그물을 치고 감자를 메며 소박한 일생을 보낼 희망을 갖고 삼포로 가는 여정에 있다. 정씨가 가는 길에 영달을 만나고, 이들이 함께 가는 길에 백화를 만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영달, 백화, 정씨, 이들은 왜 고향을 찾아갈까. 이들은 공통적으로 가난한 뜨내기 인생들이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돈을 벌고자 애쓰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어릴 적 따뜻하고 행복했던 고향의 기억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잃었던 자신을 찾아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어떤 소외였을까. 그들이 겪은 소외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 해답에 70년대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있다. 1960,70년대 공업화가 본격화되자, 대다수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으로, 건설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영달과 정씨도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건설 현장의 인부로 일하게 되었다. 이들 날품 인부들이 건설 현장에서 겪는 소외의 모습은 작가의 다른 소설인 <객지>에 잘 드러나 있다.
 
노동의 소외, 공사판의 날품 인부들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예컨대 인부들은 현장 소장과 십장, 그리고 감독조 등 사용자 측이 임의로 정한 시간에 따라 일해야만 했다. 그들은 낮은 노임을 받으면서도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들은 '무거운 돌을 바다에 짊어 나르며 혈관이 터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일했지만', 사용자들은 '공사장의 바윗돌과 같은 풍경의 일부'로 느낄 뿐이었다.
 
다시 말해 사용자와 노무자 사이의 관계는 철저히 이윤의 동기에 기반한 경제적, 물질적 관계였고, 이 과정에서 인부들은 일상적인 노동 착취를 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용자 측이 밥집과 술을 파는 매점에서의 전표 운영을 통해 인부들의 노임을 상당 부분 가로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부들은 빚을 져 공사판을 뜨기도 어려운 신세들이었다. 이처럼 땀 흘리는 노동의 자부심을 빼앗긴 채, 낮은 임금 속에서 사용자에 의해 끊임없이 요구되는 고된 노동은, 영달과 정씨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고 삶의 고단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어릴 적 고향의 농촌 풍경은 이와 사뭇 달랐을 것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들은 논과 밭을 매면서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올곧이 스스로 노동의 주체일 수 있었다. 또한 이웃과의 정겨운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정씨는 이처럼 삶의 고단함과 소외를 벗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마음의 정처인 고향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고, 오갈 데 없는 영달은 정씨의 고향길을 함께 한다.
 
백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가난한 농촌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기술 하나 제대로 없었기에 공장 또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자신의 몸을 파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공장 및 공사판의 노동자, 인부들이 그녀를 의미있는 인격적 존재로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내어 주면서, 자신의 존재적인 의미 - 젊은 날의 꿈과 사랑 등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런 자신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잃었던 자신을 찾아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고향을 향해 가는 길은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백화가 찾아가는 농촌도, 정씨가 찾아가는 삼포(포구)도, 모두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소외되지 않는 노동, 의미있는 관계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으로 가는 길 위에서 서로를 진정으로 주고받는 정서적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공장과 공사판으로 대표되는 산업 사회에서 겪었던 익명의 물질적 관계와는 질적으로 달랐을 것이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정씨를 대하던 영달은 이내 의심을 거두고 그와 말동무, 길벗이 된다. 또한 처음에는 서로 불신하며 퉁명스럽게 대하던 영달과 백화는 눈길을 함께 걸으며 어느새 따뜻한 정을 서로 느끼게 된다. 백화는 폐가에서 추위에 떠는 자신을 위해 묵묵히 땔감을 만들어 불을 지피고, 다리를 삐끗해 걸을 수 없게 된 자신을 감천 읍내까지 업어준 영달에게서 따뜻한 인간의 정을 진심으로 느낀다. 영달이 백화의 고향으로 가는 대신에 정씨와 함께 삼포로 가겠다고 했을 때, 백화는 헤어짐이 아쉬워 눈이 젖은 채로 자신의 본명을 영달에게 알려준다. 이들이 비로소 익명을 벗고 존재의 소외를 극복하는 순간이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께요."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에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는 어떨까. 물론 지금의 모습은 70년대 초기 산업화 당시의 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노동자들을 포함해 사회 전반적으로 물질적 부가 증대되었다. 민주화가 상당히 이뤄지면서, 예전과 달리 노동자의 목소리도 커졌고 사용자의 노골적인 노동 착취도 없다. 또한 산업 구조도 엄청난 변혁을 겪어. 이제는 공장 산업에서 첨단 기술집약 산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였다. 이제는 노동자 개인의 지식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산업구조로 변화한 것이다.
 
하지만 산업 구조와 노동의 양상은 이처럼 변화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은 예전보다 더욱 치밀하게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고,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경제 환경 속에서 효율과 경쟁은 최고의 지상 가치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 노동자 개인의 창의와 혁신, 따뜻한 인성을 강조하는 기업들이 많지만,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궁극의 목적은 효율을 통한 이윤 추구다. 이러한 가치를 말하는 기업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의 유연성을 말하며 비정규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결국 예전보다 대다수 직장 노동자들은 더 많은 고용 불안,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이와 함께 물질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풍조는 그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사용 가치보다 교환 가치를 더 중시하는 상품화는 이제 더 이상 제품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서비스도, 사람도 모두 다 타인(고객)의 마음을 얻어 선택받기 위해 자신의 겉모양을 치장하기 바쁘다. 대학은 더 이상 진지한 학문의 탐구가 아니라 실용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애쓰는 공간으로 바뀐지 오래되었다. 물론 그 목표는 높은 연봉을 주는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 그리고 물질(상품)적 가치에의 몰두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보여주는 나로 존재하게 만든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므로, 사회 전반적으로 익명적 관계, 피상적 관계를 양산한다. 산업화는 이러한 관계망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소외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쁜 일상 중에 문득 소외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허무함과 삶의 고단함을 느끼며, 잃어버린 자아를 그리워할 것이다. 삼포를 향해 가던 영달과 백화, 그리고 정씨처럼......
 
 
백화가 떠난 후, 영달과 정씨는 삼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역내 대합실에 있던 어느 노인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삼포가 이미 개발이 되어버려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느 덧 바다에 방둑을 쌓아 대규모 관광단지를 만드느라 하루에도 트럭이 수십 대씩 돌을 나르고, 공사판과 시장이 벌어져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씨가 마음에 품었던 고향, 한적하게 나룻배에서 고기를 잡고 감자를 매며 지내는 고즈넉한 마음의 고향은 이미 온데간데 없던 것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이처럼 모든 이의 안식처, 고향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영달과 정씨가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 현대 산업사회의 우리들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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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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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부모의 엄격한 양육 환경이나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대체로 사춘기 시절을 힘들게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부모 내지 종교의 도덕적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한 상태에서 사춘기가 되었을 때, 자신의 감정과 개성을 분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가치들과 충돌되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어린 시절 올바름을 가르쳤던 <밝음의 세계>와 감정의 충동이 난무하는 <어둠의 세계>가 내면 속에서 대립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어린 시절에 나의 <밝음의 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착한 아이 컴플렉스, 다른 하나는 교회 신앙이었다. 쌍동이 중의 형이었던 나는 어린 시절 모든 것을 동생에게 양보하는 모범적인 형으로서의 역할을 깊이 내면화했고, 이로 인해 하고 싶은 것 대신에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하는 데 매우 익숙해졌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이후 중,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있던 어머니의 교회 공동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 특이한 교회 공동체의 여러 계시와 규율들이 점점 더 나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중, 고교 시절 흔히 갖게 되는 많은 충동과 일탈의 유혹이 생길 때마다 <밝음의 세계>로부터 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많이 괴로워했고, 이러한 <두 세계>의 대립을 성숙하게 다루지 못한 채 사춘기 시절을 힘들게 보낸 기억을 갖고 있다.
 
  <데미안>은 이러한 <두 세계>의 대립에 사로잡혀있던 한 어린 소년이 사춘기를 거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삶의 여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장소설들이 진정한 자아의 발견을 기성 가치, 질서와 화해하는 데서 찾는 것과 달리, <데미안>은 기성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는 데서 찾고 있기 때문에, 도발적인 성격을 띤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글 전체의 분위기도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음울하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이 주조를 띠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데미안>에 대한 왠지 모를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기성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어딘지 모르게 체제전복적인 음험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화되어야 할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진보해왔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 글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아의 발견은 아프락사스의 실천에 있다'는 명제가 갖는 파괴력과 호소력이 매우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데미안>이 당대에는 물론 현대의 우리들, 특히 자아를 찾아 진지한 방황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 즉 <밝음의 세계> 가운데 평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평범한 소년이다. 그러다가 그는 집안의 하녀들, 가난한 이웃들에게서 욕설과 싸움이 난무하지만 솔직한 감정의 분출이 있는 <어둠의 세계>를 발견하고, 호기심과 두려움을 갖고 <어둠의 세계>에 점차로 빠져든다. 어느 날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이웃 불량소년의 나쁜 의도에 말려들면서 거짓말과 도둑질이라는 '나쁜' 짓을 계속하게 된다. 그는 부모의 뜻을 어기고 죄를 저질렀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두 세계> 가운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에 싱클레어는 상급생인 데미안을 만나게 되고, 그와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때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제시하는 성서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하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옆에 함께 매달린 두 도둑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카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벨을 시기하여 동생을 죽인 극악무도한 살인자, 인류에게 죄악의 씨앗을 안겨준 첫 조상으로 기억한다. 또한, 우리는 두 도둑 중에서 예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도둑을 구원에 이르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는 <선한 세계>의 가치를 독점하고자 하는 세력이 의도적으로 만든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에 의하면 카인은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아니라, 오히려 강인한 내적인 힘을 갖고 신으로부터 독립하였기에 약한 자들로부터 질시를 받은 종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킨 채 죽음을 떳떳이 맞이한 도둑이 오히려 자기 내면의 진실에 보다 더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선한 신에게만 숭배하지 말고, 때로는 악마에게도 숭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기존의 <선한 세계>의 가치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대체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카인을 옹호한다니, 그리고 악마에게도 숭배하라니. 하지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지식과 발명품 - 예컨대 종교와 문화 - 들은 하나의 해석일 뿐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만약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종교도, 정치 체제도 진작에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자신이 아닌 남에게, 공동체에게 절대적인 진리를 내세우며 도덕율을 강요하는 일체의 <선한 세계> 안에는 이데올로기, 즉 권력의 의도가 분명히 숨어있다. 따라서 데미안의 문제제기는 비록 그 자신의 것도 하나의 해석적 관점일 뿐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선한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밝히 드러내어 이를 상대화시키는 미덕을 갖고 있다.
 
  '카인의 표적', 그것은 데미안과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기존의 도덕율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을 아우르는 표식이었다. 싱클레어는 '카인의 표적'을 통해, 그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왔던 부모의 <선한 세계>를 상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고독감을 안은 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이 때부터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고독과 냉소 가운데 술과 향락, 성욕에 취해 지낸다. 그는 어린 시절과는 반대로 금지된 것의 세계를 맘껏 경험하지만, 결국 몸과 영혼이 망가지는 자신을 보며 참담한 좌절을 느낀다. 그는 다시 한번 - 이제는 외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 절제와 금욕, 품위를 통해 자신의 <선한 세계>를 세우려 노력한다. 즉 자신을 그토록 억압하고 가두었던 <선한 세계> 속으로 스스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 때 그는 데미안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편지 안에 적혀 있던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이다. 바로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이 글귀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즉, 새가 알을 뚫고 나오듯이,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이래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감싸고 규정짓고 있는 세계, 즉 <선한 세계>를 의심해야 - 상대화해야 -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이 만든 <선한 세계>가 선포하는 가치와 도덕이 -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선한 세계>의 대척점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를 용기있게 바라보는 '카인의 표적'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알을 깨뜨리고 뚫고 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아프락사스에게로 날아가야 한다. 아프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으로,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신을 가리킨다. 즉, 아프락사스가 상징하는 것은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옳은 것에 대한 의무감으로 살거나 또는 금지된 것에 대한 방종으로 사는 극단적 삶의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두 세계>, 즉 '당위'와 '금기'의 세계를 뛰어넘어 완전히 자유로와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이제부터는 외부의 세계로부터 자신의 내면에 동시에 던져지는 '양심의 소리'와 '유혹 및 충동의 신호'에 의해서 더 이상 갈등과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에 자신의 진정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운명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흔히 말하듯 가장 '나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후 싱클레어는 '아프락사스'의 문제의식과 줄기차게 씨름하면서 자아를 완성해나간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살부살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선 수행을 하는 중에 부처님이 와서 방해하면 부처를 죽이고, 선사(조사)가 와서 방해하면 그를 죽이라"는 뜻이다. 어떤 가르침이든 그 본질을 파악하고 나면 더 이상 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 스승의 가르침의 '문구'에 매여서도 안 되고, 그 가르침에 대해 자신의 내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물음과 오류가 있다면, 설사 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덮어두는 대신에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프락사스의 성취, 즉 자아의 완성은 절대적인 진리인 척하는 모든 것을 - 그것이 '당위'든지 '금기'든지간에 - 상대화하며, 자신의 운명 속에서 자신만의 절대 진리 - 진실 또는 해석 - 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온전히 삶을 살아낼 때 이뤄진다. 따라서 이렇듯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은 세상 가운데 홀로 서서 스스로 해석하며 살아내야만 하는 고독(절대고독)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데미안>은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느끼는 음울한 허무와 냉소, 지독한 고독과 삶의 무게감에 흠뻑 빠져 어느새 팍팍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싱클레어가 겪은 <두 세계>의 분열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지는 않는다. 그 대신 마음 속에 <두 세계>의 대립이 생길 때마다, 좌충우돌 양 극단을 오가면서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라며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즉,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일체의 것(세계) 에 대한 치열한 물음, 즉 '카인의 표적'을 얼굴에 뚜렷이 새기며 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현대를 사는 현명한 처세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깊이 생각하고 용기있게 물음을 던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당위'와 '금기'의 두 세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성숙한 자유로움으로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이처럼 독립되고 성숙한,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한 걸음씩 진보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아의 실현, 완성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고 나와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말해야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카인의 표적'으로 <두 세계>의 이분법을 뛰어넘고, 아프락사스를 통한 자아의 성숙이라는 싱클레어의 자아 찾기 여행을 깊은 공감 속에서 함께 따라갔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싱클레어가 자아를 성취하는 과정이 매우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데미안의 친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아프락사스의 화신'으로 묘사하는데, 이러한 에바 부인과 싱클레어의 사랑은 초현실을 넘어서 매우 비현실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다행히 김용규 님이 쓴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라는 책을 통해서, 융 심리학에 근거해 자아의 성숙과 완성을 상징하는 관계로서 싱클레어와 에바 부인의 사랑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주도하는 공동체 모임에의 참여 및 전쟁에의 참전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완성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싱클레어의 모습은 그가 깨달은 아프락사스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실제로 자아의 깨달음은 골방 안의 성찰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자아의 실현은 골방 안에만 머물러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는 세상,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변화, 발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아는 <골방 안의 성찰>과 <세상 속의 실천>의 순환고리 속에서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싱클레어에게는 실천을 통해 삶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가 공동체 모임에 참여해 보여주는 모습은 그가 혐오했던 패거리에의 안주, 또는 지적인 유희로 느껴진다. 데미안이 전쟁발발을 앞두고 대위 진급 등 참전의 구체적인 준비와 함께 세계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과의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염려로 어쩔 줄 몰라 한다. 이처럼 소설 전반부에 싱클레어가 고통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 했던 모습을 그리도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치열하게 그렸던 반면에, 정작 그가 자아를 실현하고 완성해가는 과정이 상징과 관념으로 얼룩진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의식과 메시지는 송곳처럼 날카롭기만 하다.
 
 
  * 한 가지 덧붙이면, <데미안>의 번역본이 무척 많지만, 서점에 가서 직접 예닐곱 권의 번역집을 읽으면서 비교해본 바로는 <민음사>의 번역이 제일 훌륭했다. '고전은 시대에 따라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문학은 그 자체로 한국 문학이다' 라는 문학전집 기획 의도에 맞게, 번역이 매우 자연스럽고 거기에 더해 문체가 수려해 문학적이기까지 해서, 읽는 내내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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