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편지 - 제2회 네오픽션상 수상작
유현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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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씩씩한 걸음을 보며 정진우는 희열을 느꼈다. 심장이 뛰고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설레었다. 시간은 우리 모두의 편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전진하라고 속삭인다. 아이든 어른이든 모두의 길 앞에는 낯선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낯설다는 건 어쨌든, 즐거운 일이다.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뿐이다. -455쪽

 

나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사투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결론을 끌어내거나 그저 그런 희망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쓰는 동안 내 의도는 번번이 빗나가서, 엉뚱한 장면이 길어지고 분노나 사랑 따위의 단어들이 추가되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과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왜 죽였는가. 이 피비린내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게 세상은 스릴러 소설이었다. -457쪽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기존 좋아하는 작가 분들의 작품이 아닌 이상, 표지도 눈여겨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꾸밈에 불가하기 때문에 대략적인 내용 살핌과 제목에 집중한다. 이 작품 역시 ‘살인자의 편지’라는 다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제목만 보아도 추리소설과 스릴러라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사실 예전에만 해도 추리소설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너무 편협한 독서를 해왔더랬다. 그러던 중 몇 편의 추리소설을 접하면서 묘한 흥미를 느꼈다. 주로 일본 작가들의 추리소설을 접했던 것 같다. 일단 이 작품은 읽는 내내 단 한 번도 내게서 흥미를 거둬가지 않았고, 시선을 빼앗기게 두지 않았다. 그 만큼 흥미진진했다. 나는 일단 추리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강하게 압도하고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함께 추리를 해 나가는 장치의 재미 역시 빠뜨릴 수 없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독자를 그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건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작품은 영흥시의 한 쇼핑센터 창고에서 남예진이라는 어린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묘한 것은 단순한 자살로 치부하기에는 교수형 매듭으로 이루어진 장치였다. 그 밖에 여러 가지 단서로 보았을 때 살인이라 단정 짓고 수사에 착수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다른 곳에서 연이어 발견되는 교수형 매듭으로 이루어진 살인 사건들이 등장하면서 단순해 보였던 사건은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타이틀로 변경된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남예진의 사건을 수사하는 류머티즘 병을 앓고 있는 형사 정진우와 그 밖의 다른 몇 형사들, 살인자를 추리해 나가는 피해자심리전문요원 박은희, 범죄분석관 서영혜, 남예진의 어렸을 적 친했던 고등학교 대장 김경만, 기자 유제두 등 각양각층의 여러 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보여준다. 이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마련하는 동시에 다양한 관점에서 추리를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양한 등장인물들로 자칫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뒤엉켜 난해하고 지루함을 줄법한데도 전혀 그렇지 않다. 외려 여러 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객관적이고도 깊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놀라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 속에서도 말하고 있듯, 인간은 누구에게나 급소가 있다. 한 가지쯤은 아픔을 지니고 있고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슬픔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는 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져 어떻게든 방출하고 싶은 욕구로 돌변하기도 한다. 충동적 살인이나 그 밖의 사건들 역시 이런 연유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 작품 속 연쇄살인과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행적에서 어쩌면 나는 그것들에 더 많은 신경을 쏟았던 것 같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아픔과 직면하고 맞서야 한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싶기도 했다. 그것이 나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내겐 어떤 급소가 있었던가. 물론, 없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작품 속 박은희처럼 그것을 꽁꽁 싸매고 굳건하게 벽을 쌓아 올리려 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졸한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싸하게 감춰두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쓸데없는 자만심이었는지도.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의 슬픔과 응어리를 토해내고 마주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마음속에 꽁꽁 쌓아 놓다가는 언젠가 더 이상 쌓을 곳이 없어 폭발해버리고 말지도 모르니 말이다.
 


요 근래 읽은 작품 중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여러 연쇄살인사건들 속에서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를 쫓다보니 어느덧 작품은 중반부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거의 후반부에 다다를 때쯤엔 나 역시 범인을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작품은 흥미를 잃지 않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아픔을 가진 채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쫓고 쫓기는 자 외에는 어떤 인간적인 것도 담아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 쫓고 쫓기는 자들을 느꼈고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고 삶이었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마주보는 일이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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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터 - 너와 내가 닿을 수 없는 거리
임은정 지음 / 문화구창작동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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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닿을 수 없는 거리, 1미터.
잘나가던 방송국 PD였던 강찬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늘 음주운전을 하지도 않았고, 안전운전을 해왔는데도 이는 상대방의 예기치 않은 실수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을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그것이 무척이나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어찌 인생을, 벌어진 일들을 돌이킬 수 있으랴. 그저 그는 이 순간 죽어버리고 싶었다.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강찬은 죽지 않았다. 죽음의 근처에서 그는 여전히 숨 쉬고 있었고, 영원 같은 이 육신의 감옥을 탈출할 방법도 언제 석방될지에 대한 기약도 없었다. 강찬은 자신의 생명을 마치 전깃불 끄듯 소등하고 싶었다. 이제 영원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강찬은 죽음이 소 떼처럼 씩씩한 먼지들을 끌고 다가와 그를 몰고 가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26쪽 
 


하지만 죽는 것 마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행복 요양원으로 옮겨진 강찬은 자신의 옆 자리에 같은 처지로 누워 있는 찬강을 만나게 된다. 말을 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끈을 통해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것은 일종의 텔레파시로 통했지만,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처음 강찬은 그런 찬강의 존재가 성가시고 귀찮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찬강에게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나기 시작했다. 
 


인생을 뭔가에 빗대어 비유하자면 뭐가 있을까요? 여러 가지 비유가 있겠지만 누군가는 인생을 신 사탕에 비유했다고 하죠. 겉으로는 달콤한 것 같지만 막상 입에 넣으면 시고 쓰고 참을 수 없어서 뱉어버리고 싶은 맛.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뱉으려야 뱉을 수 없어 삼켜버려야 하는 것. 그런 게 인생이라고 했다고 하죠.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동의하십니까? 인생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167쪽 
 


그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함께 해 나가면서, 다시금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은 인생의 차디찬 단면이었다. 또한 죽음은 언제나 나와는 연관 없는 존재라는 대단한 착각이다. 늘 삶은 죽음과 연장선상에 마주한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늘 우리는 그 존재를 망각한다. 때문에 현재의 살아가고 있는 삶에만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기 일쑤다. 하지만 그것이 다 무엇이랴. 강찬 역시 그러했다. 성공하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 나갔고, 최고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병실에 누운 채, 말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그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함과 공포가 밀려왔다. 그것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대로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몸뚱이란. 하지만 이들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 역시도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영혼과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진실 된 인간의 감성을 말이다. 그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지 찬강이 무척이나 존경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저씨, 연리지 알아요? …연리지는 떨어져 있는 두 나뭇가지가 서로 붙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붙는지 알아요?”
“왜?”
“서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래요.”
“그런데 넌 뜬금없이 왜 연리지 얘기를 꺼내?”
“저 앞에 있는 나무요. 너무 정다워 보여서요. 서로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서요. 아저씨 우리도 한번 해볼래요? …아저씨, 아저씨 침대와 내 침대의 거리가 1미터 정도예요. 우리가 서로 간절히 원한다면 우리도 연리지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요?” -215~217쪽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나무들. 찬강은 그들의 그 그리움이 마치 우리들 같다고 표현했다. 나는 그 표현이 너무도 아름다워 가슴이 떨렸다. 고작 1미터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딱 그와 같았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보는 내내 그 만큼 가슴 떨리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서로에게 사소한 일로 토라지고, 다시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회용적인 사랑이 남용되는 사회에서 그들의 사랑은, 그 만큼 고귀했다.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것은 바로 행복요양원 사람들이었다. 다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 제각각의 슬픔과 아픔을 지닌 채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 가고 있었다. 
 


누구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후회하는 사람도 있고, 생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고,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늘 죽음은 슬픔을 동반한다. 더욱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그 만큼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슬픔과 절망이었다. 나 역시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들을 맞이했던 기억을 떠올리자면, 울컥 치밀고 들어오는 슬픔에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다. 결코 손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헌데, 이상하게 이 글을 읽고 나니- 약간은 죽음에 대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30년 넘게 세상을 살아왔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답을 알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고 억울했다. 착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살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바보 같다’고 무시를 했고,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겠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나는 결국 그냥 살기로 했다. 이 얘기는 어쩌면 그 결정에 대한 격려를 찾기 위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너무도 버거운 주제였기에 한 문장, 한 단어 책을 써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의 이 말들이 어찌나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지. 나는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아마 평생을 가도 그 혼란을 껴안고 살아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 만큼 살아간다는 것은 늘 고뇌와 혼란을 동반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작가 자신에게 격려가 된다고 이야기 했듯, 이 책이 내겐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큰 위로와 응원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그 만큼 이야기를 읽는 내내 가슴이 뻐근했다. 이 책 속에는 한 글귀, 한 글귀가 다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또한 식물인간일지라도 생명이라는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행복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늘 죽음을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작가의 말처럼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거다. 악착같이 욕심 부려 붙잡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기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면 그만인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 삶의 기막힌 아름다움, 생각하기 나름인 삶이지만, 우린 조금 더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조금만 방향을 틀어 생각해 보면 말이다. 지금 두 다리로, 내 생각을 말하며,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난 큰 축복이다. 그런 큰 축복을 지니고 있는데 더 무엇이 필요하랴. 1미터 거리에서 나누는 그들의 깊은 사랑은 내내 내 삶을 지탱해 줄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치열한 삶에 찌들어 아픈 사람이라면, 피폐해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행복요양원 사람들과 함께하며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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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테로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마리아나 한슈타인 지음, 한성경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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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림에서 얻는 기쁨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경우 형태의 감각과 결합되는 ‘생의 기쁨’에 그 근원이 있다. 나의 관심은 어떻게 형태를 통해 감각을 창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페르난도 보테로)  


“나의 구상미술은 어떤 의미에서는 추상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추상미술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구상미술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나의 구성은 색채와 형태의 법칙에 기초한다. 그래서 나는 추상 회화로서의 성질을 파악하기 위해 종종 그림을 거꾸로 넘어뜨려본다. 형태와 색채는 추상적 경험의 연장선에서 자유롭게 다듬어진다. 비례에 관한 한 나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필요하다. 가령 화면 어딘가에 작은 형태가 필요하다면, 나는 인물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페르난도 보테로)
 
  


재작년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페르난도 보테로 전에 다녀온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페르난도 보테로에 대해 별 다르게 관심을 기울이던 때가 아니었다. 그저 우연찮게 몇 번 본 기억은 있었지, 그의 전체적인 그림과 특징, 더욱이 이렇게 그에게 매료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전시회를 다녀온 뒤, 나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들에 아주 친근하게 매료되어 갔다. 처음 보았을 당시의 반응은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일이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과한 사람의 몸과 대비적으로 작은 물체들에게서 우스꽝스러움과 귀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너무도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완벽할 정도였다. 더불어 그는 이미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을 자신만의 기법으로 변형화하여 표현하기를 즐겨했다. 그의 전시회에서도 그런 작품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대중적인 것이 기반 하여 그로 인해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친숙한 동시에 반가움이 느껴졌고,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보테로의 작품은 기존 어느 화가와 비교해 보아도 그 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더욱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독특하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온전히 그 만의 세계의 그림은, 처음에는 많은 이들에게 당혹감 내지는 거부감을 비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까다롭지 않았고, 신선했다. 바로 그 자체를 내보이는 동시에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그의 그림을 볼 때 마다 늘 기분이 좋은지도 모르겠다. 그는 늘 자유롭게 여행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익히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늘 세계 어디든 자신의 작업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그의 놀라운 위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존경하는 많은 화가들이 있고, 유혹처럼 다가오는 많은 것들이 있었겠지만, 보테로는 그런 것이 현혹되지 않고 자신만의 색채를 완성시켰다. 그것은 보테로만이 지난 그 만의 아름다움이었다. 다른 화가의 그림이라도 그가 그리면 다시금 그 만의 색깔로 둔갑했다. 그 만큼 보테로만의 능력은 뛰어났다. 여전히 그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푸근함과 친근함, 그리고 기분 좋은 마음을 선사한다. 그런 그의 작품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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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 긴 호흡으로 인생을 바라보라. 그때 고생은 의미가 된다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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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고생학’ - 그럴싸한 말 같지만, 누군가는 어찌 고생이 행복할 수 있느냐고 강력하게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고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고, 많이 행복 하고 싶지, 누가 고생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사서 고생을 하려 하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생은 결코 고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딛고 일어날 수 있는 단단한 것이라고. 저자는 고생에 대해 부모세대, 우리세대, 자식세대로 나뉘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부모세대는 그야말로 고생 그 자체였다.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고생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다음에 하면 되지, 뭐’의 개념이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했고, 이 순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다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늘 부족했고, 그렇기 때문에 늘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파지는 순간이었다. 
 


부모님의 세계는 구체적이며 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쓸데없는 짓이기도 하고, 시간과 돈을 버리는 철모르는 짓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편안한 일상의 영역이다. 그곳을 쓸고 닦으며 소중하게 가꾸기에도 벅찬데 뭣하려고 그 밖의 세계에 관심을 두거나 이쪽저쪽을 넘나들며 기웃거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33쪽 
  


특히나, 이 시대의 어머니들의 고생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늘 ‘희생’과 ‘헌신’이었다. 남편, 부모, 자식들을 위해 늘 그들은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먹이고, 입히고 그런 다음에 자신의 것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욕심내지 않은 것이 우리네 어머니였다. 우리 어머니 역시 고생을 겪고, 또 고생하며 사시지만, 우리네 부모님에게 있어 고생은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고생은 그저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늘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 끝이 시큰해지고 마음이 저린 것 역시 그런 이유일 것이다. 우리들을 위해 있는 힘껏 희생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미 아무개의 며느리, 아무개의 부인, 아무개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해 온 것을 지극히 잘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누구에게 기댈 사람이 없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길이 닫혀 있으니 당신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일을 풀어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자야 될 잠을 자지 않고 쉬어야 할 때 쉬지 않고 먹어야 할 것을 건너뛰어야 했다. …요즘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면 두 손 두발 다 들고 줄행랑을 놓을 것이다. …어머님 앞에 서면 ‘힘들다’는 말을 끄집어낼 수가 없다. -38쪽 
 


하지만, 우리 세대는 어떠한가. 그저 고생이라고 하면 예전 부모세대가 겪었던 고생의 1/10도 안 될 것이다. 허나 그 고생마저도 겪지 않으려 하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네 현실이다. 너무도 살기 좋아지고 편해졌다. 없어서 못 먹던 옛 시절과는 달리 이젠 넘쳐나서 버리는 실정이다. 새로운 것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에 멀쩡한 물건 역시 새것으로 교체하기 위해 버려진다. 늘 새로운 것을 찾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려 나가는 고생,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생은 그것이다. 이 상황에서 저자의 말은 지금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자꾸 버리다 보니 간직해야 할 것 마저 실수나 선택으로 버리게 된다는 것. 그렇다, 우린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의미를 망각하고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린 점점 그런 감정이 메말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세대는 삶이 고생이었을지라도, 따뜻한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먼저가 아닌, 당신이 먼저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당신이 먼저이기 전에 내가 먼저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 세대의 ‘희생’적인 부분이 옳다고 보진 않는다. 난 여자가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로 고생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치가 떨릴 정도다. 다만, 그 당시의 인간애가 잊혀져 간다는 것이 씁쓸할 뿐 인거다. 
 


도시의 살림살이는 결국 끊임없이 사다가 쓰고 버리고, 버리고 새로 사서 쓰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되어있다. 그렇게 자꾸 버리다 보니 남겨서 간직해야 할 것마저 실수이든 선택이든 버리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래부터 기억력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이런 생활을 반복해서 중요한 사건과 의미를 쉽게 잊어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67쪽 
 


결코 고생을 해야지만, 인간적으로 곧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고생 역시 무조건 옳다고 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들을 쭉 읽으면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이지 생고생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도 안일한 세상에 살면서, 지극히 사소한 문제로 자살까지 하는 세상. 2008년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라고 한다. 특히나 20대~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란다. 이렇게 자살이 빈번하게 일어난 일은 뭘까. 더욱이 자살의 이유들을 들으면, 학업 성적이 떨어지거나 애인과의 결별, 취업이 되지 않아서 등 죽음을 택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문제들이었다. 이는 저자의 말처럼 “삶에서 적절한 불편함, 조금의 고통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한 데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우리에겐 고생이 필요하다. 처절하게 고생해보고,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편안한 것인지를 여실히 깨달아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겸손해지는 동시에 부모세대의 고생을 떠올리며 고개 숙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끔은 고생이 행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생은 사람을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과 마음을 바싹바싹 마르게 한다. 생명의 기운을 시들게 하는 고생(枯生)이 된다. 고생은 힘들기는 해도 아름다울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을 이전보다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하여 고상한 인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즉, 고생이 고생(高生)인 것이다.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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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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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주인공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낯선 남자가 자꾸 일어났던 일이라고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고 믿게 되죠. 올해 처음 만나는 남자인데도, 지난해에는 밀회를 즐겼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남자라고 믿게 돼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존재하는 기억으로 착각한 것이죠. 데자뷰란 것도 뇌가 기억을 끄집어낼 때 실수로 처음 있는 일을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으로 착각하는 현상이니까요. -344~345쪽.

우리 모두가 기억을 날조하고, 자신에게 생겼던 일, 과거에 있었을 일을 날마다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있었을지도 모르는 밀회, 만났을지도 모르는 연인을 찾고 있습니다. -372쪽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기억의 단편들이 오직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기억된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모호하다. 이 온다 리쿠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라는 작품이 딱 그렇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듯 넘어간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누구의 기억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사람을 교묘하게 헝클어 놓는다. 바로 온다 리쿠의 작품에 묘미가 아닐까 싶다. 사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접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늘 서점에 갔을 때 다양한 작품들을 훑어보긴 했지만, 이렇게 완독하긴 처음인 것이다. 상상외로 기묘한 분위기와 환상의 기류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추리작가로서 뛰어나다고 하며, 그에 걸맞게 팬 또한 많은 듯 하다. 이번 작품은 추리소설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 작품의 성격 역시 글에 맞게 모호하지 않았나 싶다.  

 
글의 처음부터 등장하는 산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초호화 호텔. 그리고 그런 호텔에서 매년 파티를 벌이는 사와타리 가의 세 자매인 이치코, 니카코, 미즈코. 이들의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이 올 수 있는 파티다. 그래서 인지 매년 이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내년에도 초대장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더불어 그녀들과 개인적인 티타임을 가진다. 더불어 그녀들은 매번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잔인하면서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초대 손님에 조카인 류스케와 류스케와 혼인한 사쿠라코, 그리고 사쿠라코의 남동생이자 사쿠라코와의 밀애를 즐기는 도키미쓰가 있다. 또한 사쿠라코와 밀애를 즐기면서 류스케와는 사업적인 파트더인 다쓰요시가 있으며, 류스케의 사촌인 미즈호와 미즈호의 매니저인 사키까지. 복잡하게 얽힌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견제하듯, 서로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누어진 장 마다 화자가 바뀌면서 지극히 한 사람의 입장에서 다양한 사건을 이야기하고 풀이하는 방식이 사뭇 신선했다. 그래서 인지 더더욱 진실의 갈피를 잡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면, 정말이지 그것은 기억의 일부분이 되고 만다. 누구나 상상하고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신비로움과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분명 나는 그 시각에 그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 시각에 또 다른 누군가를 죽였다. 이런 식으로 서로의 기억 안에서 반복되는 사건들의 전개는 도대체 저 사람이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경계선을 만든다. 굉장히 독특한 전개방식에 사로잡혀 아름다우면서도 지독하게 슬픈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인상적이었고, 그래서인지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 역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되짚어가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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