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율리시즈'를 읽기 위하여

이달에 가장 고대하는 책 중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생각의나무, 2007)이다. 역자는 역시나 김종건 교수인데, 상품 소개가 뜨지 않아서 책이 범우사판을 한 권짜리로 다시 내는 것인지 개정된 내용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달라진 내용이 없다면 일종의 '트릭'이다). 제목이 <율리시즈>에서 <율리시스>로 바뀐 이유도 잘 모르겠고(그냥 '차별화 전략'인가?).

 

 

 

 

나로선 범우사판의 <율리시즈>를 모두 갖고 있고, 역자의 <알기 쉽게 풀이한 율리시즈>(범우사, 1997)도 챙겨놓은 지 오래이다. 다만 이 세기의 문제작을 완독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간혹 여름방학때면 조이스학회에 주관하는 '율리시즈 강독' 강좌가 개최되곤 하는데, 언젠가부터 한번 들어본다고 마음만 먹다가 두어 차례 흘려보내고 말았다.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던 것인데, 덕분에 2종류 갖고 있는 <율리시즈>의 원서도 책장에서 자고 있다. 게다가 범우사판 <율리시즈>와 관련서들이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라 이번에 나온 책이 개정번역판이라면 새로 구입해볼 생각을 품어본다. 그런 생각의 와중에 문득 '준비' 같은 게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이 페이퍼를 쓴다.

 

 

 

 

먼저 조이스에 관한 책들을 챙겨둘 필요가 있겠다. 리처드 앨먼의 평전 <조이스1,2>(책세상, 2002)가 일단 챙겨두어야 하는 소장도서(조이스 컬렉션을 마저 채우려면 돈푼깨나 깨지겠다). 나는 이 두툼한 평전 대신에 얄팍한 조이스 두 권, 곧 데이비드 노리스의 만화 <조이스>(김영사, 2006)와 프랭크 스타터의 <30분에 읽는 제임스 조이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을 챙겨두고 있는데, 상황을 봐서 용적을 늘려야겠다(사실 문제는 책값이 아니라 꽂아놓은 공간이다). 거기에 국내서를 보태자면 나영균 교수의 <제임스 조이스>(정우사, 1999), 김학동 교수의 <제임스 조이스>(건국대출판부, 2001)를 꼽아볼 수 있겠다. 두 권 모두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들이다.  

<더블린 사람들>에서 <젊은 예술가이 초상>을 거쳐서 <율리시즈>에 이르는 조이스의 여정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여러 종의 번역서들이 나와 있다). 다만 거기에 덧붙여 횡적으로 읽어야 할 책들도 있다. 러시아작가 나보코프가 세계 4대소설로 <율리시즈>와 함께 꼽은 책들인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경우 국내 유일의 완역본(국일미디어, 1998)이 현재는 절판중이지만 같이 읽어두어야 할 고전이다. 거기에 카프카의 <변신>, 그리고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문학과지성사, 2006)까지가 그 네 권의 소설들이다(카프카의 경우엔 <변신>을 꼽았는지 아니면 다른 작품을 꼽았는지 헷갈리긴 하다). 모두 20세기 전반기에 각 언어권별로 세게문학이 산출해낸 걸작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종적으로 읽어야 할 책은 물론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06)부터이다. 이 방대한 고전도 읽어내려면 상당한 견적을 요한다. 영역본도 한두 종 정도는 갖춰놓는 게 좋겠고(인터넷에 떠 있긴 하지만 편의상) 해설서도 챙겨두도록 하자.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솔출판사, 2004)나 강대진의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 2007)가 적절한 길잡이가 돼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아우구스테 레히너란 오스트리아 작가가 다시 쓴 <오디세이아>(문학과지성사, 2006)도 번역/소개돼 있다. "그리스 서사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현대의 독자들을 위해 새롭게 쓴 작품. 원전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가치와 의의를 그대로 전하는 동시에 읽는 재미를 준다. 지도와 등장인물 소개 글을 수록해 장대한 텍스트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짚어준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명화도 함께 실었다"고 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책이 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문학사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도발적인 재평가/재서술을 시도하고 있는 이 야심만만한 책의 한 장이 '<율리시즈>와 20세기'에 바쳐져 있다.

Улисс

개인적으론 지난 2004년 모스크바 체류시 러시아어본을 구하고자 했었던, 하지만 끝내 구하지 못한 책이 세 권 있는데, <율리시즈>는 그 중 하나이다(<모비딕>과 <특성없는 남자>가 다른 두 권이다). <율리시즈>의 경우는 러시아어본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너무 고가였다(기억에는 3만원이 넘는 액수였다). 

Улисс

그러는 사이에 작년에 보다 대중적인 판본의 새 번역서가 나왔다(역자가 같은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감스러운 건 인터넷서점에서 품절중이라는 것. 내가 <율리시즈>를 읽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손대볼 수 있는 건 이 러시아어본을 손에 넣는 일이다...

07.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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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플라톤 전집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얼마 전에 다치바나 다카시의 동경대 강의록을 읽다가 떠오른 것이었나, "한 작가의 작품을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읽어나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니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선 시바 료타로의 <탐라 기행>을 읽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 현문숙 씨는 말이 없을 때는 생각에 잠겨 있다. 교토 대학에서 사회학을 배울 때는 특히 그리스 철학을 하던 다나카 미치타로 교수를 존경하여 <플라톤 전집>을 읽기로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몇 년 간이라는 기한을 정해놓고 매일 얼마씩을 일과로서 읽게끔 자신에게 의무를 과하였다. 매사에 그런 식이어서, 예를 들어 내가 <구카이 풍경>이라는 졸저를 주었더니 그것을 읽는 데 1년이 걸렸다고 부인 문순례 씨가 말해주었다. 인용이 있으면 일일이 그 원전을 찾아서 읽고 난 뒤에야 다음 대목을 읽어 나갔다는 것이다. (128쪽)

이 대목을 처음 읽었을 때, 어디에선가 읽었는지 몰라도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고 박홍규 선생의 일화가 떠올랐다.(이 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뒤적여 보았는데도 출처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아마도 이정우나 다른 제자들의 회고에 나온 이야기 같았는데.) 즉 박 선생이 학부 수업 시간에 슐라이어마허가 번역한 독어판 플라톤의 대화편을 학생들과 함께 강독했는데, 내용이 어렵고 학생들이 잘 따라오지 못해서 한 시간에 두어 줄도 나가지 못할 때가 많았고, 한 학기 내내 애를 써도 결국 서너 페이지밖에는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박 선생은 아랑곳 없이 방학이 끝나고 다음 학기가 되면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지난 학기에 읽다 멈춘 부분부터 강독을 재개하곤 했고, 그런 식으로 몇 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독어판 플라톤의 대화편 하나를 다 읽어치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고집과 여유 모두를 지닌 양반이 아닐까 싶다. 웬만큼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것이라면 한 번 해보고 나서 귀찮아서라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게다가 나처럼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방학 때 나 혼자서라도 다 읽어치우면 읽어치우지 굳이 수년 간에 걸쳐 느릿느릿 거북이마냥 그 대화편 하나를 붙들고 있었을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대 학자로서의 놀라운 면모였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한동안 머릿속에 담아놓고만 있었던 이런 일화를 굳이 적어보는 까닭은, 어제 우연히 네이버에서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아마 "비트겐슈타인 전집"이란 제목으로 검색을 하다 그랬을 거다) 플라톤 전집의출간에 관한 최근 기사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작년 이맘때쯤 된 모양인데, 나로선 금시초문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제이북스에서 약 30여 권 분량으로 된 플라톤 전집을 내달(3월)부터 시작해서 수년 내에 완간할 예정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의 원전 번역을 내놓아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내친 김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집까지 내놓겠다며 상당히 큰 결심을 한 모양이어서 결과가 주목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의아한 생각도 없지 않은 것이, 내가 알기로는 이미 서광사에서 성균관대 박종현 교수의 주도 하에 플라톤의 주요 작품이 번역 출간 중에 있고, 그와는 별도로 같은 출판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작품도 번역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기로 박종현 교수의 플라톤 역주 작업은 1997년에 <국가(정체)>가 출간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티마이오스>, <에우티프론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필레보스>까지 모두 네 권이 출간되었고, 그 외에도 <연회(향연)>, <프로타고라스 / 메논>, <테아이테토스>,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고르기아스>, <정치가>가 근간 목록에 올라 있었다. 문제는 이 번역 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박종현 교수의 경우에는 이미 단독, 또는 공동 작업의 결과물을 네 권이나 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다른 번역 내정자들은 아직까지도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일반 책을 번역하는 것보다는 훨씬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이미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간 상황에서는 한편으로 아쉬움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만큼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연회(향연)>의 경우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소피스테스>와 <정치가>는 한길사에서 다른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파르메니데스> 역시 <플라톤의 변증법>이라는 송영진의 저서에 부록으로 번역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출간이 예고되었던 책의 번역본이 "뜬금없이" 다른 번역자에 의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다는 것은 의도적인 중복 출판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독자로서는 약간의 혼란이랄까,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물론 여러 가지 속사정(추측컨대 어쩌면 가장 큰 것은 출판사의 이해관계, 그리고 번역자들이 소속된 학교라든지 계열 등의 이해관계가 아닐까)이 있겠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기존에 10년 넘게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플라톤 저작집에 대한 선망이 너무 컸던 까닭인지, 지금처럼 번역 작업이 사분오열 군웅할거의 추세로 접어드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물론 내지 말라는 법은 없고, 서광사 판본만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최근 들어서 그리스어 라틴어 원전 번역이 일종의 "추세"를 이루고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단기간 내에 두어 종의 <플라톤 전집>을 갖게 된다는 것은 약간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물론 이제이북스라는 곳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집을 냄으로써 예상되는 한 가지 미덕은, 적어도 그 디자인 하나는 아주 "멋깔"스럽게 뽑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기서 나온 책을 몇 권 사 보았는데, 이건 표지는 물론이고 본문에 이르기까지 예전 이론과실천의 책에서 느껴지던 세련된 단순함이 물씬물씬 풍겨서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요즘 학술서 내는 곳 중에서 이 정도로 책의 외형에 신경 쓰고 감각이 뛰어난 곳은 못 본 것 같다.)

 

 

 

 

 

 

물론 영어권에만 해도 플라톤의 주요 저작집 번역은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알지만, 솔직히 그 모두가 이처럼 단시일 내에 경쟁적으로 출간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가령 몇 년 전엔가는 이미 두어 종류의 번역본이 있던 프랑스에서 "새로운 번역"의 플라톤 전집이 완간되었다고 하는데, 기획과 번역 의뢰에서부터 완간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22년이라고 했다. 우리 역시 프랑스의 사례를 반드시 본떠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세상 판 <니체 전집>의 번역 때처럼 차라리 전공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사분란한 공동 작업을 펼쳐 그 성과물을 내놓는 것도 나름대로는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박종현 교수의 고군분투야말로 놀라운 집념이고 존경해 마지않을 만한 일이지만, 개인의 힘으로서는 모두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라 추측되기 때문이다. 가령 서광사에서 준비하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형이상학>, <범주론 / 명제론 / 분석론 후서>, <철학에 대한 권유>, <자연학> 등이 근간 목록에 올라 있었지만, <형이상학>을 담당했던 조요한 교수가 타계하는 등의 변동으로 인해 나중에는 <정치학>을 비롯해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수사학>이 추가된 반면 <형이상학>과 <범주론 (외)>는 근간 목록에서 빠져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니코마코스 윤리학>, <영혼에 관하여(데 아니마)> , <소피스트적 논박>, <변증론>, 그리고 부분 발췌역인 <형이상학> 등의 번역서가 다른 출판사에서 선보였고 말이다.

 

 

 

 

 

 

이번에 이제이북스의 전집 출간 계획이 보도되면서도 역시 "플라톤 전집 하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나온 모양인데, 내 기억에 이런 말을 처음 한 사람 중 하나는 바로 도올이었던 것 같다.(<동양학>의 각주 가운데 하나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톤 전집"이란 것이 어디 옆집 멍멍이의 이름이 아니고, 게다가 돈이 있다고 해서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걸 과연 개탄하고 자시고 할 만한 일인지 하는 의구심도 없지는 않다. 가령 우리나라에 서양철학이라는 학문이 상륙하고, 대학에서 정식 과목으로 가르쳐진 지는 겨우 100년이 될까말까 하지 않나 생각되는데, 물론 플라톤이 서양철학의 비조이자 최고봉인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간 그리스어 원전 독해력을 지닌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던 우리의 현실로 볼 때 그건 지나친 기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박종현 교수라든지 다른 선구적인 인물들의 기여로 인해, 이제 앞으로 우리나라에는 플라톤 전집이 (잘만 하면) 한 가지뿐만 아니라 두어 종이나 나올 기회가 생겼고, 아마 앞으로도 그 종수는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오히려 문제는 그동안 플라톤을 비롯한 철학 원전 분야의 "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영어 및 일어 중역본에 비해서 일종의 비교우위를 장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물론 박종현 교수의 역주서가 꾸준히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단순 판매량으로 볼 때에는 <국가>나 <대화편>의 영어 중역본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훨씬 더 잘 먹혀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전공자와 일반 독자의 차이, 즉 딱딱한 문장을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박종현 교수나 다른 플라톤 번역자들의 경우에는 해당 언어와 사상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뛰어난 "문장가"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어 원전 번역본인 천병희 교수의 역주서들이 생각만큼 "읽기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물론 원문에 정확한 것도 중요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말 문장을 어떻게 맛깔스럽게 만들 것이냐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보다 고전 역주 작업에 있어 훨씬 앞선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시대에 맞춰 여러 가지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는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그나저나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 전에도 우리나라에 <플라톤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물건이 있긴 있었다. 숭실대 철학과 최민홍 교수란 양반이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여섯 권짜리인데 <국가>나 <향연> 같은 유명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이온>, <소 히피아스>, <클레이토폰>, <에뤽크시아스> 같은 생소한 작품들까지 망라하고 있어서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처음에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헌책방에서는 다른 출판사의 지형을 인수해 일종의 덤핑용으로 대량 생산한 것으로 유명하던 모 출판사에서 펴낸 1980년대의 중판본이 종종 보이고 나 역시 이걸로 한 질 갖고 있은 지가 오래 되었다. 물론 전공자들은 "학술적 가치는 전무한 일어중역본"이라고 혹평하는 책이지만, 솔직히 그동안 굳이 <티마이오스>나 <필레보스>를, 또는 <카르미데스>와 <크라튀로스>를 읽어보고 싶은 사람은 이 책만으로도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솔직히 전공자들도 잘 들춰보지 않는 나중 대화편들의 경우, 아무리 원전 번역이 있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들춰보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플라톤 전집이라는 것,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고 단기적으로는 출판사의 매상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한 태클이 될 수도 있겠다. 적어도 이제이북스에서 다음 달에 첫 선을 보일 전집 1차 출간분만 해도 솔직히 나조차도 생소한 대화편들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과연 일반 독자들이 읽기나 할까? 물론 책세상의 니체 전집에 대해서도 그 수많은 <유고>를 읽을 독자들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만 봐도 <죄와 벌>의 판매량과 그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의 판매량은 확연이 다를 것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전집은 대책없는 "낭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물론 있으면 좋고, 꽂아 두면 뽀다구도 팍팍 나지만, 만들기는 힘이 들고 잘 팔리지도 않는다. 어느 기자는 "플라톤, 칸트, 헤겔 전집조차 없는 우리 현실"을 개탄하면서 아예 "번역청"을 설립하자는 황당한 주장(뭐든지 "관(官)"이 개입하면 잘 되던 것까지 망쳐 버린다는 절대진리를 기자는 망각해 버린 것일까?)까지 펼쳐놓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일본에서도 헤겔 저작집이 꾸준히 번역되기는 했어도 "전집"이란 이름으로 딱 완결된 산물을 내놓진 않은 것 같다.(그리고 솔직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정도는 되어야 "전집"이지, 칸트나 헤겔의 경우에는 주요 작품을 망라한 "선집" 정도가 적절하다고 본다. 비교적 현대와 가까운 사람이니 작품 수도 좀 많겠는가.) 게다가 이와나미의 키케로 전집의 경우, 부실한 번역과 편집 때문에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 따끔하게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 "전집"이라고 해서 반드시 "품질"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왜 "전집"이 필요한 것일까? 일단은 "과시" 목적이 아닐까 싶다. 가령 니체 전집은 한국의 니체 연구의 역량을, 플라톤 전집은 한국의 플라톤 연구의 역량을 "보여주는" 작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물론 그 "질"은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문득 떠오르는 말은 "낭만"이라는 한 마디뿐이다. 플라톤 전공자에게 있어서나, 또는 "독서가"에서 "수집가"로 전업한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나 "전집"이란 곧 "낭만"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먹지 않고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부른 음식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전집이란 것 역시 들춰보지 않고 꽂아두기만 해도 뭔가 가슴이 뿌듯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독서가" 아닌 "수집가"의 주책에 불과하다면 물론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 그나저나, 왜 "이제이(EJ)북스"인가 했더니만 사장 이름인 "응주(EJ)"의 약자이기 때문인 모양이다.(내 추측이지만.) 지금까지 낸 책만 살펴보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안 망하고" 여전히 버티는 게 참으로 신기할 지경인데, 웬만하면 전집 완간할 때까지 좀 더 오래오래 잘 버티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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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독서가"에서 "수집가"가 되는 것에 관하여...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김동인 전집>(전17권)을 모으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 전부터였는데, 지난 주에 와서야 결국 제15권을 구입함으로써 "완질"을 갖게 되었다. 이거... 생각해 보니 맨 처음 그중 절반 가량을 한꺼번에 구입한 것이 약 10여 년 전쯤 고구마에서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10년 만에 다 모았다고 봐야 하나? 이번에 산 것 말고 가장 최근에 구입한 것은 "감자"가 수록된 제1권 단편집인데, 이건 신촌 숨어있는책에서 샀다. 이거 사던 날 어디선가 술 마시고 들어와 떠들던 어느 손님이 이 책을 보고는 계속 "감자... 감자..." 어쩌구 하고 떠들어 대던 좀 황당한 기억 때문에 유난히 잊혀지지가 않는다. 왜 하필이면 "조선일보" 판 <김동인전집>이냐고 물어볼 사람이 있다면, 그거야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김동인의 "전집"으로서는 유일한 가로쓰기판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물론 <동인전집>이란 제목으로 돌아다니는 옛날 세로쓰기판이 있긴 하지만, 나중에 굳이 신국판 가로쓰기 전집이 나와 있는 걸 본 상황에서야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게다가 <이광수 전집>이라면 삼중당 판(20권짜리와 10권짜리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먼젓 것을 친다)과 우신사 판(삼중당 판 10권짜리를 재편집한 것으로, 어찌 보면 삼중당을 "계승"한 곳이 바로 우신사인데, 어째서인지 이건 잘 쳐주지 않는 모양이다)이 대표적인데, <김동인 전집>은 조선일보사 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이 책의 "완질"은 이번에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본 셈이다. 다른 데서는 한두 권이 빠진 "완질에 가까운" 묶음이나 낱권은 봤지만 전권이 돌아다니는 경우는 전혀 못 봤다. 또 한편으로 조선일보사 판에 대한 신뢰랄까, 혹은 기대가 없지 않은 까닭은 다들 알다시피 조선일보에서 "동인문학상"을 주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어도 자기네 간판 문학상의 이름을 제공한 김동인의 전집을 펴내면서, 설마하니 두고두고 욕 먹을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다.(뭐, 또 잘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열일곱 권의 책을 모으는 데 10년이라는 무지막지한 시간이, 그것도 그중 열여섯 권을 모으는 데에는 2, 3년으로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맨 마지막 한 권이 7, 8년이나 걸려서 책장에 꽂히게 된 데에는 그간 내 관심이 동인에게서 한참 멀어진 이유도 없지 않을 것이다. 언제였나, 전기를 한 권 펼쳐놓고 한 인물의 생애를 뒤따라 가면서, 그가 남긴 주요 저술을 그때그때 병행해서 읽어나가는 길고 지루하지만 보람있는 일(이른바 "전집 겸 전기 읽기")을 몇 번인가 시도해보다가 아예 재미가 들려서, 그 범위를 국내 작가로까지 확대 적용해 보려던 때가 있었다.(외국 작가의 경우에는 루터와 헤밍웨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물론 두 사람 다 작품이 비교적 많이 소개된 편이어서 가능했겠지만. 루터는 12권짜리 <선집> 말고 단권짜리 <저작권>을 사용했고, 헤밍웨이는 5권짜리 <전집>을 뒤져 보았는데 사실 장편보다도 단편에서 더 건진 것이 많았다. 그 외에도 셰익스피어(예전 휘문 판으로)와 도스토예프스키(예전 정음사 판으로)와 괴테(역시 예전 휘문 판으로)를 시도하기도 했었는데 완독은 못한 걸로 기억한다. 지금처럼 전기나 전(선)집 출간이 비교적 활발해진 상황에서는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가를 다시 시도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맨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춘원이었던 것 같은데, 적당한 전기가 없어서 일단 작품(소품 중심으로)을 읽기 시작했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중도작파하고 말았다. 한 가지 수확이라면 춘원의 "번역" 작품 가운데 카렐 차펙의 RUR, 즉 "로봇"이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희곡이 "인조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완역은 아니고 부분역과 줄거리 설명 등이었다)된 바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카렐 차펙이라는 이름 대신 "어느 보히미아 작가"라고만 하고, 원제를 밝혀두지는 않았지만 "롯쌈"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바로 차펙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웃기는 사실은 예전에 천리안의 모 통신 동호회에 이 이야기를 "춘원 이광수와 로봇"이라고 썼더니만 당시 SF 동호회 "멋신"에서 활동하던 누군가가 내 글을 가져다가 정말 "거두절미," 즉 앞뒤를 떼어내고 마치 자기가 발굴한 사실인 것마냥 사방팔방에 글을 퍼날랐다는 점이다. 평소에도 여기저기 게시판을 기웃기웃하면서 "쓸만한" 정보는 마음대로 퍼 가면서도 출처나 작성자를 결코 밝히지 않아 짜증이 났었는데, 그렇다고 뭐 굳이 시비 걸 일은 아닌 듯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나중에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는 그 사람 글이 거의 "최초의 전거"로서 권위를 얻게 되며 사방팔방에 인용되는 듯해서 좀 황당했다. 물론 나중에 알고보니 이 사실은 이미 김병철 선생이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에서 지적한 바 있었으니 --- 내공으로 따지자면 결국 김 선생이 최고가 아닐까? 인터넷도 없던 그 시대에! --- 나 역시 감히 최초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이른바 "펌질"에 대한 혐오감이 더 짙어지기는 했다. 어쩌면 그 본인 --- 요즘은 무슨 SF 평론가인 양 행세하는 --- 이야 순수하게 자기가 연구해서 찾아낸 것이라고 주장할런지도 모르지만, 글쎄, 내가 알기로 그 본인은 철저한 "장르 팬"으로 결코 한국 근대문학 "따위"에는 취미가 없었던 양반이었으며, 게다가 "춘원"과 "차펙"의 작품을 두루 섭렵할 만큼 "잡식성" 취향을 가진 독자가 우리나라에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덧붙이자면, 춘원의 "번역"은 사실은 내용 일부를 수록한 "서평"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아니라 육당이 펴내던 <동명>지 --- 나중에 영인본을 보니 거의 "신문" 스타일이던데 --- 에 실린 기고문이었다. 일각에서는 마치 춘원이 이 책을 정식으로 번역 출판한 것처럼 나와 있던데, <동명>까지 가지 않고 춘원의 전집만 뒤져보았더라도 결코 생기지 않았을 오류이다. 내가 이 글을 처음 발견한 직후에 마침 주위에 체코 문학을 전공한 양반이 있어서 전집의 그 대목을 복사해 건네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나중에 무슨 논문인지 발표인지에 써먹겠다고 했는데 워낙 느긋한 양반이어서 나중에 정말로 이야길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한편으로는 다른 국내 작가의 "전집"을 기회 있을 때마다 모으기 시작했는데, <김동인 전집> 말고도 <최남선 전집>(전15권) 가운데 전반부인 1권부터 8권까지를 적지 않은 가격에 구입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현암사 판 전집은 원래 16권인가로 기획되었다가 나중에는 한 권이 줄은 전15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전반부 여덟 권을 먼저 내고 후반부 일곱 권을 나중에 내기까지 적잖은 시간차가 있기 때문인지, 후반부만 구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완질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알고 있다.(간혹 나오기는 하는데 케이스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것은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 요즘은 거의 권당 2, 3만 원 가량 거래되는 듯.) 예나 지금이나 책 살 돈이 넉넉지 않은 나로서는 (문득 등 뒤에서 집사람이 "얼씨구!"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 누군가가 고이 모셔두었다가 고가에 매각하려는 완질을 기다리기보다는, 여기저기 헌책방에서 한두 권 빠진 "낙질"이라든지, 아예 "낱권"을 눈에 띌 때마다 모으기 시작하는 일종의 게릴라 전략을 시도하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그나마 갖고 있는 몇 권의 "전집" 가운데 "완질"을 소장한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가령 나남 판 <조지훈 전집>은 제1권과 부록이 없는 상태이고, 문지 판 <최인훈 전집>과 <황순원 전집>은 세로쓰기 구판(판형이 작다)과 가로쓰기 신판 모두를 조금씩은 모아 두었지만 아직 "완질"을 구비한 것은 없다. 문학사상사 판 <이상 전집>은 오랫동안 1권 "시"만 갖고 있다가 작년엔가 2권 "소설"을 구해 간신히 "짝을 맞췄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3권과 4권도 있다고 해서 김이 좀 빠져버렸다.(그 와중에 예전에 한 번 놓쳤던 임종국의 <이상 전집>도 구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좀 더 요즘 작가 중에서는 문학동네 판 <최인호 단편전집>이 1권 "깊고 푸른 밤"만 없는 "낙질" 상태로 수년째 버티고 있고, 열림원 판 <이청준 문학전집>은 아무래도 "서편제"와 "병신과 머저리"를 비롯한 다섯 권 이상으로는 늘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도 한 가지 흥미롭달까, 뜻밖의 변화를 겪은 것은 심설당 판 <김기림 전집>인데, 이건 예전에 전권을 몇 번이나 봤음에도 불구하고 구입하지 않고 있다가(그때만 해도 "김기림"이 누군지 몰랐다!) 나중에 우연히 제2권을 어디서 사게 되어 거의 10여 년 가까이 그거 하나만 갖고 있었는데, 최근에 이런저런 헌책방을 통해 1, 5, 6권을 따로따로 구입하게 되었어서, 어쩌면 이러다가 조만간 "완질"이 구비되지 않을까 싶다.(물론 인터넷 헌책방을 찾아보면 3, 4권을 쉽게 구할 수도 있긴 한데... 가격을 워낙 올려쳐 놓았기 때문에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 당장 급한 책은 아니니까.) 그에 비해 깊은샘 판 <이태준 전집>은 1-3권에 해당하는 "단편집"만을 갖고 있다가 언젠가는 "완질"이 나오겠지 하는 기대에 이사 하면서 아낌 없이 처분해 버렸는데,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구할 기회가 없었다.

왜 이런 책 자랑 비스무리한 소리를 늘어놓느냐 하면, 요즘 들어서 이런 "전집"의 "짝 맞추기"를 시도하면서 문득 나 자신이 언제부턴가 "독서가"가 아닌 "수집가"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었다. "독서가"가 책을 읽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수집가"는 말 그대로 책을 모으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독서가"는 당장의 필요에 의해 책을 사는 사람인 반면, "수집가"는 당장 필요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완질"을 갖추기 위해 (물론 "언젠가는 읽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대긴 한다) 책을 사는 사람이다. "독서가"가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수집가"는 이상(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단적으로 말해 "독서가"는 겉표지나 케이스조차 없이 제본이 낡아 페이지가 거의 떨어져나갈 지경이 된 도서관 책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 반면, 수집가는 그야말로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전집 가운데 한 권이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채워넣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사람이다. 독서가면 어떻고 수집가면 또 어떠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이날 이때까지 나 자신을 "수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종종 "수집가스러운" 열망이 솟구칠 때도 종종 있었고, 나 역시 은연중에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처럼 나 자신에 대해 "수집가"라는 인식이 든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어쩌면 요즘 날이 갈수록 책 한 권을 "느긋하게" 완독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이런저런 책을 그저 "주마(관)산" 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일은 많아진 것 때문은 아닐까? 물론 모든 책을 완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끔은 훑고만 지나가는 책이 있어도 나쁠 것이야 없겠지만, 그만큼 책 읽을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건 문제다. 머리는 자랄 대로 자라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많고, 주워들은 것도 많으니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오거나 하는 책은 나날이 늘어만 가는데, 그걸 다 붙들고 앉아서 머릿속에 구겨넣을 수가 없으니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물론 <김동인 전집>을 비롯해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책들 대부분은 "독서가"로서가 아니라 "수집가"로서 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동인의 전집을 "완질"로 갖추기 위해 걸린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내 관심사는 이미 한국 근대문학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시간이나 어떤 계기를 마련하지 않는 한 열일곱 권이나 되는 그 책을 완독할 기회는 "여간해서" 찾아올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어차피 모으기 시작한 책이니..." 또는 "언젠가는 한 번 볼 날이 오겠지..." 하는 "수집가"의 마인드로 책을 구입하게 된 셈이다. 사실 관심사가 바뀌는 대로 책 구입 행태까지 바뀐다면, 나로선 더 이상 한국사나 국문학, 또는 인류학이나 고고학 관련서를 구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책을 구비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그쪽 분야의 책을 보지 않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각 분야의 "원전"이나 "명저"를 중심으로 해서 조금씩은 책을 기회 있을 때마다 구해 두는 걸 보면,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아닌 "수집가"의 마인드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수집가"라고 해서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대부분은 "수집가"를 "책도 읽지 않는 게으른 작자" 정도로 생각하게 마련인데, 사실 어떤 면에서 수집가는 독서가보다도 더 부지런해야 하는 사림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읽은 책, 또는 읽을 책뿐만 아니라, 심지어 읽을 것 같지 않는 책에 대해서도 미리 알아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수집가야말로 "서지사항"과 "도서목록"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고, 거기에는 "책 중의 책"인 도서목록에 대한 도착적인 매력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수집가"라면 자기가 원하는 책을 손에 넣고 나서의 "환멸"보다는, 도서목록을 뒤적이며 자기가 간절히 원하지만 아직 얻지 못한 책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느끼는 "희열"을 더욱 좋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집가"는 필연적으로 한때의 "독서가"일수밖에 없다. 독서가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집가가 되는 사람은 드물고,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또 다른 "독서가 출신 수집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뭔가를 "수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 못지않은 노력과 지식을 요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수집가"에 대한 "독서가"의 비아냥은 오히려 부러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도 없지는 않다. 최근에 내가 느낀 것처럼 "독서가"와 "수집가"의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과연 어느 시점에서 "독서가"가 "수집가"로 변모되는지 딱 잘라 말하기가 힘들다는 점 때문이다. 내 경우만 봐도 가령 내가 <김동인 전집>의 맨 마지막 한 권을 "짝맞춘" 바로 그 시간부로 "수집가"가 되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전집>을 짝맞춰 들여놓자고 작정했던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이미 "수집가"가 되었는지는 선뜻 판단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게 있어 그런 성향이 분명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독서가 겸 수집가"일 수도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균형이 오래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게 문제다. 이러다가 정말 "독서"는 뒷전으로 미루어 둔 채 오로지 "수집"에만 전념하는 때가 오는 것은 아닐까? 이는 어쩌면 모든 "독서가"들의 악몽이거나, 또는 기우인지도 모른다. 실현될 가능성은 없지만, 그런 가능성 자체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독서가" 아닌 "수집가"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도 없지 않다. 이건 나도 최근에야 깨달은 것인데, 수집가는 책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약간 머쓱하지만 일종의 "책 지킴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각급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을 예로 들어보자면, 그 대부분은 수많은 이용자들의 손길에 시달린 나머지 원래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잔뜩 훼손된 상태다. 단적인 예로,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은 초판 100부를 찍고, 거기다가 추가로 30부를 "특제본"(표지 글씨를 일일이 수놓아서 만들었다고 한다)으로 만들었는데, 일반 제본으로 된 책은 비교적 흔히 보인 반면 특제본은 구경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미당 사후에 국립중앙도서관에 한 부가 소장되어 있다고 해서 확인해 보니, 이미 일반 이용자들의 손길에 의해 무참히 제본이 망가져서 특유의 "도서관 하드커버"로 장정을 새로 해 놓은 지 오래였다는 것이다. 물론 미당이 훗날 그렇게 유명한 시인이 될 줄 알았다면 고이 간직해 두었겠지만, 도서관이 점장이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쳐도, 일단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의 경우에는 겉표지나 케이스 등의 부속물을 모조리 없애버리게 마련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지학적 가치나 사료로서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책의 원형, 또는 원래 모습 그대로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결국 어느 "수집가"의 서재에서 기대해 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렇게 보자면 "수집가"는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좋은 책을 독차지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지나친 손길로부터 책의 원형을 보호하는 사림이라고 보아도 틀릴 것이 없다.

한편으로 내가 시간이 갈 수록 "독서가"에서 "수집가"로 변모하게 되는 데에는 뭔가 외적인 요인도 없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이른바 "절판본"이 사라지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10년, 또는 20년 전에 딱 한 번 나오고 만 책들이 많아서 헌책방 등을 돌아다니며 간신히 한 권 구해 놓거나, 또는 운 좋게 미리 사 두고서 10년, 또는 20년 넘게 그거 한 권만으로도 만족했는데, 요즘에는 어째서인지 한 번 절판된 책들의 "개정판"이며 "증보판"이며 "신판"이 줄줄이 나오기 때문이다. 단순히 구판의 내용 그대로를 판형이나 편집만 약간 바꿔 다시 내놓은 것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내용이 대폭 개정되었다거나, 오역이 크게 바로잡혔다거나, 구판에서는 빠졌던 원주와 참고문헌이 신판에는 포함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이유" 앞에서는 구판이 있어도 신판을 사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구판과 신판 사이의 시간적 간격도 크게 줄어서, 가령 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전집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경우에는 (물론 오역이니 뭐니 하는 소동이 있긴 했지만) 불과 10년도 지나기 전에 구판과 신판 두 가지가 나와 있는 실정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말이 좋아서 "개정판"이고 "신판"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그 내용이나 편집이나 판형 등등이 "구판"보다도 못한 경우가 없지 않아서, 그럴 경우에는 차마 기존에 갖고 있던 구판을 선뜻 내던질 수 없다는 것이다.(가령 "갈보리"를 "창녀리"로 바꿔놓은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 신판이라든지, 구판의 오역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에드 레지스의 <누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차지했을까?> 같은 책이 그런 경우다.) 그럴 경우에는 아무리 "신판"이 나왔다 하더라도 "구판"과의 인연을 차마 끊을 수 없어 "두 권 다" 소장하는 무리를 범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졸지에 똑같은 책이 두 권, 또는 세 권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 집에는 한때 엘리아데의 <우주와 역사>가 무려 다섯 권이나 있었는데, 왜냐하면 내가 결혼하기 전에 갖고 있던 것 세 권(하나는 "초판본", 하나는 "저자 서명본", 하나는 "밑줄 친 것")과 집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갖고 있던 것(하나는 "새 것" 또 하나는 "밑줄 친 것")을 서로 버릴 수 없다고 맞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일종의 타협을 봐서 내 것 가운데 "초판본" 하나와 집사람 것 가운데 "새것" 하나는 헌책방에 처분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똑같은 책이 세 권이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로선 요즘 출판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이런저런 책의 "개정판"과 "개역판"과 "수정본"과 "신판"을 내놓는 처사가 적잖이 못마땅하다. 그중에는 정말 표지와 판형만 슬쩍 바꾸고 가격 올려치기만을 도모한 듯한 경우도 없지 않고, 또한 새로 바뀐 표지와 판형만 보면 오히려 꼴불견인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이건 나중에 가서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그렇게 보자면 "수집가"란 책을 "독서 이외의 목적"으로 소유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단순히 "독서가"라면 헌책이건 파본이건 오역투성이 번역본이건 간에 일단 "읽은 수 있는 상태"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때는 그런 식이어서 가령 헌책방에 돌아다니는 책들 중에서 상당히 "파손"되어 싼 값에 팔리는 것들을 많이 사기도 했다. 가령 지금은 그런 경우가 적은데 신문사에 증정본으로 들어갔다 나온 책들 중에서 예전에는 책 표지 사진을 "찍는" 대신 아예 책 표지를 싹둑 잘라내고 알맹이는 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가 한때 소장했던 제임스 글릭의 <빨리빨리>라든지, 기린에 관한 이야기인 <자라파 여행기>가 바로 그런 이유로 싸게 산 책이었다. 그 외에도 어디선가 "불에 그을린" 듯 비닐코팅 표지에 우툴두툴한 "거품"이 올라와 눌어붙은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2, 3권이라든지, 누군가가 "냄비받침"으로 사용했는지 둥글게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느님의 도성> 제3권이 있고, 하드커버인데 겉표지가 분실되어 싸게 살 수 있었던 책이라든지, 중간에 한두 장 낙장이 있어서 헐값에 가져온 책은 그야말로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단 그렇게 해서 한 권 "갖고 있는" 책이라 하더라도, 나중에라도 기회가 된다면 "깨끗한" 것, 또는 "겉표지와 케이스까지 완비된" 것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어느 도서수집가는 단지 지금 자기가 가진 어느 희귀본에 "겉표지"가 없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수만 달러를 들여 가며 또 다른 책을 하나 구입하기도 했다는데, 물론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나마 "적절한" 상황이라면 나 역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책을 "더 나은 상태"의 다른 책으로 교체하고픈 충동을 종종 느끼고, 실제로도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기도 했다.(가장 최근에는 솔에서 나온 카프카 전집 가운데 "서한집"을 그렇게 바꿔치기 했는데, 이전에 내가 헌책방에서 운 좋게 산 책은 알고보니 그중 몇 페이지의 글자가 부옇게 "번져" 있어서 읽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아마도 인쇄 과정에서 종이가 슬쩍 움직였거나 해서 그 면 전체가 그렇게 되어 있었는데, 굳이 참고 읽으라면 읽지 못할 것도 없어서 그냥 두고 있었지만, 최근에 다행히도 또 다른 헌책방에서 같은 책을 멀쩡한 것으로 싼 값에 구할 기회가 있어서 "얼른" 교체하고 말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물욕"인지도 모르지만, 사실 책을 소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태"에 집착하는 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찍이 어느 미국의 고서상 겸 수집가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처럼 말이다 : "고서수집에 있어서는 다음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첫째는 '상태'다. 둘째도 '상태'다. 셋째도 역시 '상태'다."

물론 한평생 훌륭한 "독서가"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그런 꿈이 불가능하다면 훌륭한 "수집가"가 되는 것도 나름대로는 보람 있는 일일 수 있다. 어제 집사람과 밤늦게 동네 단골 커피점(핸드드립 하는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람이 문득 어디선가 들은 김우창의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 즉 그 양반이 젊은 시절에 누가 집에 가 보니 학생 신분에 이미 "교수" 급에 버금가는 양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책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미 "읽은" 것이었다는 점이었다나. 하긴 지난 번에 이사하면서 느낀 것인데, 사다 놓기만 하고 결국 읽지도 못한 채 다시 헌책방에 내놓을 책을 골라내면서 처참한 기분이 든 것 역시 그런 "독서가"가 아닌 "수집가"로서 나 자신의 모습을 은연중에 인식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날 책을 박스에 담으면서 읽은 것과 안 읽은 것의 비율을 대강이나마 눈대중으로 짐작해 보고, 책이 담긴 박스의 숫자를 세어가다 보니 솔직히 좀 죄스러운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대충이나마 계산해 본 내 책의 권수가 하필이면 그날 내 지갑 속에 들어 있던 현금의 액수와 "상당히" 유사했다는 상황 앞에서는 정말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를 지경이었다.(참고로 그날 이사에 필요한 모든 현금은 내가 아니라 집사람이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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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이 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

금요일자 한겨레 북리뷰를 인터넷에서 미리 훑어보다가 '한국의 책쟁이들' 시리즈에서 미술 저술가 이주헌씨 편을 읽었다. 이 연재물을 즐겨 읽지만 유독 이 글만을 옮겨올 생각을 한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이 눈에 띄어서이고 또 그가 현재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필중이라는 소식이 반가워서이다. 이만한 저술가/책쟁이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역정'을 잠시 따라가본다.

한겨레(06. 08. 11) “나 자신이 미디어라고 생각해요”

-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이 이주헌(46)씨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어보인다. 대중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미술을 만나게 안내해주는 필자로 이씨만큼 유명한 이는 아직 없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개척자’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이력을 보면, 그가 미술 저술가가 된 것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변신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가 기자를 그만 두고 최고의 미술저술가가 되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순조로왔던 것일까?

 

 

 

 

-<한겨레>에서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씨는 93년 5년 넘게 몸담았던 신문사에 사표를 낸다. 미술 글쟁이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달 남짓 미술잡지 편집장을 지낸 뒤 이씨는 아예 전업 저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94년 봄, 이씨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씨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000만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이게 그림을 보는 안목보다도 더 배울 점이다). 선인세로 받아 책이 나온 뒤 팔리는만큼 갚는 것인데, 한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책이 안팔려 절판되도 갚을 돈이 없다”고 미리 못박은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배째라’ 수준이지만, 당시 이씨의 형편으로선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특별한 교분이 없었던 우 사장을 찾아간 것은 학고재의 성격이 책의 성격에 맞아보였고, 그런 지원을 해줄 인식을 지닌 출판사가 학고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100만원을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원에서 100만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서른세살, 아이들은 겨우 세돌과 한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 바로 답사기를 <한겨레>에 송고하기 시작했다. 53일간의 미술관 답사기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기행>이란 제목으로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제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이죠. 이게 되면 이걸 통해 살아갈 길이 나올 것이고, 안되면 미술 글쓰기를 접기로 하고 이 책에 제 전부를 던진 겁니다.” <50일간의~>는 미술과 여행 두가지 재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 저술가’ 이주헌은 이처럼 더이상 물러날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친 도전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인 ‘미술 저술가’에 승부를 건 것 역시 당시로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이후 이씨는 <미술로 보는 20세기>,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 내는 책마다 호평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미술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강점으로는 잘난척하는 법 없이 차분하고 편하게 미술을 설명하는 글솜씨가 맨 먼저 꼽힌다. 이씨 이전에도 미술 글쟁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관심사를 논할 뿐이었다(*인문학의 다른 분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저술가로서 가져야 할 문장 구사력, 그리고 작품의 배경과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필자도 드물었다. 이런 모든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등장한 저술가가 이씨였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늘 미술을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 이씨의 자산이었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 최초의 저술가가 이씨이고, 대중들에게 감상의 동반자로 나선 저술가도 이씨가 처음이었다.

-이씨의 글은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씨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정보나 지식 등 필요한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상인의 언어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이씨 스스로도 항상 ‘나 자신이 미디어다’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그래서 이씨의 글은 가장 편하게 읽으면서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씨 이후 이씨보다 더 학문적 배경을 갖췄거나 이씨처럼 쉽게 글쓰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씨처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 감각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가 10년 넘게 최고의 미술 저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글솜씨 이상으로 탁월한 책 기획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자신이 책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깔려 있다. 이씨의 출세작인 <50일간의~>을 보면 이씨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책이므로 가족여행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글을 쓸 에피소드들이 나올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부는 힘들어도 책에 재미를 넣어 보다 폭넓은 대상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획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만해도 이런 식의 미술책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술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는 이씨의 고군분투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럽 풍광을 엿보는 동시에 옆에서 설명듣듯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새로운 재미였다. “당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어요. 그런데 유럽에 가면 미술관을 가봐야 하고, 미술관에 가면 뭔가를 좀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이런 책이 나올 때가 됐다고 본거죠. 개인적으로는 ‘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기획력으로 이씨는 지금까지 낸 10여종의 책을 단 한권도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만들어냈다. 이씨의 책들은 모두 제각기 컨셉과 문체, 구성이 다르다. 이씨처럼 계속 책에 변화를 주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씨는 언제나 책의 소재와 주제를 그 시점의 미술책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것으로 골라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한동안 그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가 대표적인 사례다. 때로는 철저하게 타깃 독자들에게만 맞추기도 한다.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미술책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씨의 프로기질에는 미술 관련 글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자기 분야에 대한 순결주의와 자기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파주 헤이리 자택에 틀어박혀 오로지 미술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만을 쓸 뿐이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글 구본준 기자)

06. 08. 11.

P.S. 따져보니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책은 <미술로 보는 20세기> 한권뿐인 듯하다. 하지만, 그의 러시아 미술관 소개를 나는 손꼽아 기다려보기로 한다(사진은 트레챠코프 미술관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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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구제불능 책중독자의 편력기

어제 낮에 구내서적에서 본 책인데, 한 도서광 내지는 책중독자의 도서편력기를 다룬 <책사냥꾼>(동녘, 2006)이 출간됐다. '책사냥꾼'이란 비유 자체가 유별난 건 아니고, 나로서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이런 류의 책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가령 <젠틀 매드니스> 같은 책을 생각해보라).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되면 교양미술서들이 팔려나가는 것처럼 이런 류의 편력기들도 팔려나가는 것일까? 츨판/도서 평론가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아무튼 나로선 동류의식을 느낄 만한 저자의 책이어서 반갑다. 한겨레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08. 04) 구제불능 책중독자의 도서편력기

-책에 미친 사람은 곳곳에 있다. 책이 그러한 것처럼…. 맛이 간 사람들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어한다. “어? 미친 녀석이 여기 또 있네” 하면서. <책사냥꾼>(동녘)은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의 방송인, 작가이자 책 수집가인 존 백스터(1939~ )의 회고록. 말이 좋아 회고록이지 평생을 책에 중독되어 산 구제불능 노인의 주절주절 수다다. 그런데 참 재밌다!

 

 

 

 

-도처의 책은 도처로 그를 끌고 다녀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런던,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랑스 파리를 주유하게 만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중독자의 대열에 발을 디디기는 1978년 런던. 스위스 코티지의 벼룩시장을 어슬렁거리다 그레이엄 그린의 희귀본 어린이책이 단돈 5펜스에 얻어걸렸다. 그와 더불어 전설적인 서적 판매상 마틴 스톤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던 것.

-1980년대 초반 그가 수집한 그린의 책은 거실 벽을 넘쳐 침실 벽을 침범했다. 한번은 알파벳 순으로, 한번은 연대순으로 책을 새로 배치하면서 완상하다가 어느 순간에 다가온 깨달음. 한때 커다란 기쁨이었던 어린 새가 거대한 뻐꾸기가 되어 자신의 에너지와 돈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1982년 6월24일. 그는 책을 팔아치웠다. 하지만 책수집 열정이 식겠는가. 텅빈 책꽂이가 더 큰 유혹이 되었다. 1990년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창고에 보관하던 책을 파리에 모아 책으로 성을 쌓고는 장엄하게 선언한다. “이제 모두 완성되었다.”

-그는 “책을 수집하는 목적은 순전히 책을 손에 넣는 그 순간에 느끼는 전율 때문”이라며 그 순간을 삼각주의 수로에서 물고기를 낚는 순간의 손맛에 비유한다. 그가 추구해 마지 않던 그린마저 “지난 30여년 동안 내가 꾼 가장 행복한 꿈은 헌책방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정도이니….

-책을 따라 읽다보면 자연스레 문학거장들의 세계로 끌려들어가고 책사냥꾼들이 희귀본을 찾아 헌책방, 벼룩시장, 경매장, 오래된 빌라를 누비는 과정에 합류하게 된다.(임종업 기자)

06. 07. 04.

P.S. 리뷰만으로는 너무 단촐하여 '책중독'이라면 전혀 남의 얘기가 아닐 만한 번역가이자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의 칼럼 '책사냥꾼'도 옮겨놓는다. 이 '사냥꾼들'의 세계에 대해서 기본적인 사항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다.

 

 

 

 

-책사냥꾼들이 있다. 그들의 사냥터는 실로 전방위적이다. 요컨대 서점은 그들이 활동하는 사냥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서점은 그들에게, 사냥감을 미리 풀어 놓은 뒤 사냥꾼들에게 돈을 받고 운영하는 곳 정도에 불과하다. 무척 편하기는 하지만, 사냥감을 발견하고 손에 넣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떨어진다.

-책사냥꾼이 보통의 사냥꾼들과 다른 점은, 사실상 일상 생활의 모든 장면들 속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는 안테나를 접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오랜만에 방문한 친구집 서가라던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서점이라던가,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라던가, 버리지 않고 쌓아 둔 몇 년 전 신문더미라던가.....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냥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이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일단 사냥감을 발견하고 나면, 책사냥꾼의 몸과 마음은 바빠진다. 우선 과연 그 사냥감이 사냥에 나설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서점이 주요 무대라면, 사냥감을 직접 만져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다양한 체널을 동원해야 한다.

-우선 그 사냥감을 손에 넣은 적이 있는 주위 사람에게 직접 물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사냥 일지('서평'이라는 이름의)를 찾아 볼 수도 있다. 다른 나라 말로 집필된 사냥감이라면, 인터넷을 통해 저자, 서평, 인터넷 서점에 올라 온 다른 사냥꾼들의 일지, 기타 등등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판단해야 한다. 도서관 이용이 가능하다면, 각종 도서관을 방문하여(직접 방문이던, 인터넷을 통한 방문이던) 그 책의 소장 여부를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도서관 이용의 경우, 치사한 사냥 방법이기는 하지만 불법 복사 및 제본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사냥감이 천연기념물에 해당하는 경우,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구할길이 없고 오직 한 군데 도서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경우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해도 책사냥꾼의 양심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보통이다.

-책사냥꾼이 보여주는 이런 종류의 양심 몰수가 과연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항인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불법 제본, 그러니까 박제로 만들어 획득한 사냥감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서 쾌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책이라는 사냥감은 그 속살뿐만 아니라, 가죽과 털도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사냥당한 적이 있는 사냥감을 모아 놓고 파는 곳, 그러니까 이른바 중고서점이라는 사냥터는 각별한 사냥의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일반 서점과는 달리, 우연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사냥감이 갑자기 등장할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 그러니까 중고서점은 일종의 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경우에 준비된 실탄(돈)이 없으면 곤란하다. 실탄을 장전하기 위해 뜸을 들이는 동안, 누군가 다른 사냥꾼이 선수를 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정한 프로 책사냥꾼이라면, 어디를 가든지 사냥을 위한 여분의 실탄을 장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냥에 성공한 다음 할 일은 역시 사냥감의 속살을 맛보는 일인데, 이 단계에 불충실한 사냥꾼들도 적지 않다. 요컨대 서가에 진열해 놓기만 하고 좀처럼 그 속살의 맛을 보지 않는 경우라 하겠는데, 나 역시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언젠가는 맛보리라 생각하며(마치 뱀술, 과일주 등을 큰 유리병에 담아 놓고 바라보는 애주가의 눈길과 비슷) 흐뭇하게 바라보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지만, 역시 책이라는 사냥감은 직접 맛을 보아야 제격이다.

-책사냥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냥감을 직접 만들어 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없지 않다. 요컨대 다른 사냥꾼들의 후각을 자극할만한 사냥감을 만들어 풀어 놓고 싶다는 생각. 일본의 어느 저명한 동양학자(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책을 소개하고자 마음먹기도 했었는데.)의 책에 대한 신조랄까 그런 것이, "책을 구입한다. 구입하면 반드시 읽는다, 읽고 나면 반드시 쓴다"였다는데, 가히 책사냥꾼의 입신의 경지라 할만하다.

-요컨대 책을 사고, 그것을 읽고, 읽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그렇게 쓴 글이 모이면 책으로 출간하여 팔고.... 뭐 이런 순환 과정인 셈이다. 여하튼, 책사냥이라는 일은 강박 관념에 가까운 집착이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서, 갑자기 읽고 싶은 생각이 든 책이 있는데, 분명히 서가 어느 곳에 있기는 있는데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자신의 서가 전체를 여러 번 살펴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러나 결국 찾을 수 없어서 잠못 이룬적이 있는 사람. 오래 전에 절판되었으나 반드시 구하고 싶은 책이 있는데, 도무지 구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아 괴로워한 적이 있는 사람, 한 달 생활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우연히 만난 훌륭한 사냥감에 주저 없이 투자한 사람, 실탄 부족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사냥감을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그러니까 훔치는 일)하고 싶다는 치명적인 유혹에 시달려본 적이 있는 사람, 그런 등속의 사람들(*이런, 이 모두에 해당하는군!).

-탐미주의 또는 유미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탐서주의 또는 유서주의라는 말도 가능할지 모른다. 탐미주의자의 의식 상태를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한다면, 탐서주의자의 의식 상태 역시 그러할 것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책의 노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스스로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상태, 그러니까 일종의 약물 중독과 비슷한 상태라는 점이다.

-문자의 금단 현상,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문도 들어오지 않고 변변한 책이나 책방 하나 없는 산골에서 사흘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 일종의 문명병이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사실상 치유 불능에 가까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 아닌 처방은 아마도,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한 시한부 말기 암환자" 가족에게 의사가 건네는 이런 말밖에 없을 것 같다. "집에 모시고 가셔서 드시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게 하십시오."(*아니, 사냥꾼 얘기가 어이해서 말기 암환자에 대한 비유로 마무리되는가? 하긴 간혹 정신병원에 가보란 소리를 듣는 나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겠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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