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곳의 빛 - 어둠을 넘어서는 희망의 빛
루이지 마리아 에피코코 지음, 김희정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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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루이지 마리아 에피코코 신부님은

1980년 이탈리아 메사녜에서 태어나

2005년 라퀼라 대교구에서 서품을 받았다.


성직자이자 철학자이며

강의와 피정을 통해 평신도와 수도자, 성직자

양성에 헌신하고 있다.



이 책은,

코로나로 이탈리아에는 봉쇄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는데,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이 신부님께 보낸 편지에

자신의 묵상과 사유를 담아 답장한 내용을 모은 책이다.


관계, 고독, 침묵, 육체, 죽음의

다섯 가지 주제에 대한 물음과

신부님의 답장이 실려있다.


무엇보다 신자들의 편지가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고민했을 주제들이라

공감되었다.


또, 신부님의 답장에는

경험과 성찰이 담겨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읽어내려갔다.



팬데믹을 경험하며

우리 각자가 보여주는 태도는 다양하다.


두려움, 우울감, 좌절, 슬픔...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믿는다.


어려운 시기가 지나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지만,

그 흔적은 어둠을 거치면서 끌어낸

축복과 선함의 표식이 될 것이라는

신부님의 말씀대로

지난 2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


7) 이제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숱하게 살펴볼 수 있었고, 그때마다 두 눈을 통해 그러한 인생들을 마음에 새겼다. 이는 어찌 보면 운명의 장난인 것만 같다. 나는 눈이 매우 나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항상 안경을 쓰고 살았다. 하지만 나는 바라보는 일을 가장 좋아했다.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 바로 그 부분으로 전문가가 되었다니. 이는 인생의 기이한 이치다.

나는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관찰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빵이 아니라 경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경청은 말을 담아 주는 자선이다. 내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 준다.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 사람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만든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말을 들어 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 주는 데 기꺼이 돈을 치를 마음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다.

사실 이야기가 마음속에 있을 때는 소리와 소음이 혼란하게 뒤범벅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말이 되어야만 비로소 내부의 혼란이 정리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도 이를 들어 주지 않으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스스로에게 짧게 독백할 수는 있겠지만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듣는 사람이 들어 주기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판단하지 않고 들어 주는 것, 무엇보다도 얽매이지 않고 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분류하고 평가하고 정리할 시간은 나중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경청할 때에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14) 바다는 통제할 수 없지만, 건널 수는 있다. 폭풍우는 이겨 낼 수 없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데 이용할 수는 있다.


31) 사실 코로나바이러스는 현실을 악화시켰다기보다는 실상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보다는 상업적 관계로 구성된 세계화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즉 인간관계를 충족하거나 지원하지 못하는 이익과 소득은 최선의 거래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했다.

최근 우리는 이번 역경의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한 문장을 여러 곳에서 듣고 있다.

"혼자서는 아무도 자신을 구할 수 없다."

'성공'을 외치는 세상에서, 개인의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연대가 아닌 경쟁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혼자서는 자신을 구할 수 없다는 교훈을 깨닫는 것은 변화를 앞둔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이번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48) 현대 사회는 구조적으로 인간의 외로움을 부추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혼자 있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소비를 하며 그 괴로움을 다스리려고 한다.

경제는 사람들의 불행을 적절히 이용한다. 우울한 기분을 돈을 쓰면서 달래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이때 욕구불만은 경제 순환의 시작점이 도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생산, 소비, 균열'이라고 요약했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생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는 일시적인 안도감, 순간적인 호흡으로 견디는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와 문화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이러한 경제 체제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중심에 있지 않은 오늘날, 그러한 일대 전환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 사회가 고독을 권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다'라는 말을 추구하며 사는 불균형에 숨겨져 있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이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는 '존재하다'라는 말을 잊었다.

행위에 몰두하는 삶은 존재성을 망각하게 하고 중요한 질문에서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삶의 신비에 직면한 인간의 근본적인 고독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58)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고독의 징후를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물건이나 사람 혹은 활동으로 채운다. 이러한 점을 간파했던 프랑스의 뛰어난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신의 방에 홀로 머무르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혼자 있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고독의 희생자다. 그는 버림받고, 오해받고, 고립되고, 멀어진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둥둥 떠 있으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서 고독의 기회와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묻는 용기를 내야 한다. 자신을 되찾기 위해 고독과 함께할 기회를 얼마나 추구하는지, 그리고 삶이 부여하는 고독과 직면할 때 자유를 얼마나 행사하는지 자문해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고독을 경험하며 절망과 만난다.

사회에서 소외된 노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과 방치로 외로움을 겪는다. 물론 우리가 지금 나누는 이 이야기는 해로운 이기주의의 결과인 그러한 고독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고독의 현실이 비관적이라면, 그 절망과 외로움의 중심에서 문제의 열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89) 자비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는 경험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즉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하고 추한 모습까지 기꺼이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변화와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기세등등하던 비판의 소리는 이제 무의미한 메아리가 되어 잦아든다.

우리가 본모습 그대로 사랑받는다고 느끼면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사랑이 실체의 진실에 닿을 때 우리는 위선의 가면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약점과 과오를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가면이 벗겨져도 지속되는 사랑과 만나면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진정한 친밀감이 샘솟는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에 대한 미움의 감정도 떨칠 수 있다.


105) 오늘날에는 육체를 절대화하고 그것을 과시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겸손하고 단정한 육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간관한 것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영혼과 내면성을 제쳐 두고 육체만 돌보는 것은 단순히 외모만 가꾸는 일이 될 수 있다. 외벽만 있고 그 뒤로 집이나 쉴 만한 공간이 없는 허상과 같은 건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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