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름 그륀의 종교란 무엇인가 - 안셀름 그륀 신부에게 던지는 75개의 질문
안셀름 그륀 지음, 신정훈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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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책은 오늘날 영적인 길을 찾고자 하는 많은 이가 묻는 질문을 대표한다고 여긴

빈프리트 논호프의 75개 질문에

안셀름 그륀 신부의 답을 엮은 책이다.

질문을 던진 빈프리트 논호프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독문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출판사에서 일하며 책을 쓰는 이다.

특별히 저자가 75개의 질문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75세 생일 때문이라고 한다.

숫자가 상징적인 의미를 준다고.

저자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또는 경험했던 내용을 소개하며

자신의 것만 옳다고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저러하게 여기지만,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이 메시지가 주는 유연함이 마음의 문을 열게 해 준 열쇠였다.

'원래 그렇게 하는거야'

'지금까지 우리는 다 그렇게 했어'

'무조건 따라야 해'

봉사하면서 듣게되는 권위적인 말들이 피로감을 느끼곤 했었는데,

'신앙은 교회의 권위가 지시하는 것을 단순히 믿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존엄성에 반하는 맹목적인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해석이 제시하는 바를 숙고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168쪽)'

저자에게 위로와 공감을 받았다.

코로나로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도

우리는 조금씩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고 있다.

코로나 전에는 분주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면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

8) 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작성하면서 대신학자 카를 라너에게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1974년에 교리 문답을 발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바람을 드러냈습니다. "오늘날 신앙 문제에서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고, 소위 교육 수준이 높은 이도 자신의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는 언어가 있었으면 한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가 아직 없기에 그런 언어는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저는 독자 여러분을 생각하며 쉽게 쓰려고 노력했으나 여러분이 신앙을 모두 이해할 정도의 알맞은 언어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75개의 질문과 답으로 신앙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인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것입니다. 빈프리트 논호프의 질문은 오늘날 영적인 길을 찾고자 하는 많은 이가 묻는 질문을 대표하며 그중에서 선택된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이 자신들의 질문에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일흔다섯이라는 숫자는 저의 75세 생일 때문에 선택했습니다. 숫자는 늘 저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줍니다.

30)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투사"라고 확신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모두 하느님으로 투사시킨다는 것이지요. 후에 이러한 생각을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가 받아들였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종교는 투사입니다. 프로이트나 포이어바흐에게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보호자 내지 좋은 아버지에 대한 필요를 하느님 안에 투사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견을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나 우리의 기대를 채워주는 좋은 엄마로 여기는 유아적 태도에 머물러 있다면, 이제 이러한 투사와는 결별해야 합니다. 성장한 이에게 어울리는 하느님 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거대한 환상을 하느님 안에 투사시켜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거나 믿지 않는 이들보다 위에 있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참된 하느님과 멀어지고 건강한 영성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느님 상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반드시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존재의 근원이시자 인간과 마주하며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리의 감각을 개방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흔적을 세상에 새겨 넣으신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44) 신학자이자 종교 철학자인 과르디니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서 바로 그 사람 안에서만 하시는 비빌번호와 같은 유일회적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과제는 제 안에 있는 이 유일회적인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를 통해서 하느님에 관한 것들이 들리고 보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저는 하느님의 통역자가 됩니다. 하지만 빈둥빈둥 지내면서 제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소식을 곡해하는 통역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에게서 하느님의 소식을 들은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제 안에 머무시도록 해야 합니다.

47) 흔히 남성들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성을 주로 활동으로 표현합니다. 이와 반대로 여성들은 하느님을 모성적 관점에서 체험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가득 채우는 큰 사랑, 널따란 품에 우리를 꼭 끌어안아 주시는 어머니로 느낍니다. 이처럼 여성들은 영성적인 활동보다는 하느님 체험을 우선적으로 여깁니다.

75) 초세기 그리스 교부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본모습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닐 수 있는 모든 개념과 표상 너머에 계십니다. 그리스 교부들은 이 사실을 세 가지 방식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한 방식을 라틴 교부들도 따랐습니다. 라틴 교부 중 한 사람인 마리우스 빅토리누스는 전통적인 철학 교육을 받은 로마의 수사학자였습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모든 것이 그에 기초하는 세 가지 원리라는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표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는 이 세 가지 원리가 인간 영혼에 '존재', '생명','지성'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리우스 빅토리누스는 이 세 가지 원리를 삼위일체 하느님께 연결시킵니다. 성부는 존재에 해당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존재'이십니다. 성자는 생생함과 충만함을 말하는 '피어나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이해'입니다. 성부는 모든 존재의 원천이십니다. 그분에게서 생명(성자)이 흘러나와 우리와 동행하고 튼튼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이해를 통해 우리를 다시 하느님께로 이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이 자신의 길을 올바로 갈 수 있도록 친히 당신 아드님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과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도 파견해 주셨습니다. 성부로부터 발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다시 하느님 안으로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원천이신 성부와 연결시키십니다.

137) 신앙을 받아들이는 힘은 각자가 받은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신앙의 힘으로 삶을 살아왔다면 자녀 역시 신앙을 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 신앙을 지닌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환경이 제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스스로 신앙을 선택해야 합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면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교육 이외의 또 다른 원천이 열릴 것입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는 힘의 원천은 직관입니다. 신앙은 순수 이성적인 결정에만 근거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이성적인 근거는 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의 직관은 사실을 인식하는 또 다른 원천이 내 안에서 샘솟는다고 말해 줍니다. 저는 제 직관을 신뢰합니다.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는 또 다른 원천은 갈망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신앙에 대한 갈망을 느낍니다. 우리는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나 헨델의 <메시아>를 들을 때, 오래전에 지어진 성당을 바라볼 때, 작곡가나 건축가, 예술가들이 작품에 심어놓은 바를 믿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게 됩니다. 갈망은 예술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환상이 아니며 그 아름다움에서 하느님 영광 자체가 빛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168) 신앙은 교회의 권위가 지시하는 것을 단순히 믿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존엄성에 반하는 맹목적인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해석이 제시하는 바를 숙고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통찰하는 것만을 믿습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이성의 동의를 포함합니다. 하지만 신앙을 단순히 이성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성은 내가 믿는 바를 분석하고 이해하도록 합니다. 신앙은 전통 안에서 내가 그 위에 서 있는 토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우리를 굳건히 서 있게 합니다. "자신을 이해할 때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신앙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신앙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신앙과 이성 사이에 절대적인 조화나 대립은 없습니다. 신앙을 통한 이성의 초월이 있을 뿐, 신앙은 이성을 중지시키지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이격적 동의라는 것은 늘 나의 의지와 이성으로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동의가 없다면 그것은 전적인 예속이며 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른 신앙 이해에 반합니다.

188)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성과를 요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우리 삶을 스스로 가꾸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는 항상 인간에게도 유익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면서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29) 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 내면에는 늘 사랑과 공격성이라는 양극이 있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기에, 스스로를 착취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성숙한 사랑에는 공격성도 늘 필요합니다. 그 공격성은 우리의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려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지키도록 일러 줍니다. 우리가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아니기에, 사랑하려면 나 자신도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공격성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이롭지 않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이루어집니다.

233) 기도하면서 그분께 '끊임없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침묵해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방식에 따라 그에 응답하시지 않지만, 그분께 모든 것을 내놓거나 말씀드리면 내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심리학적 설명입니다. 하지만 왜 바로 이 생각이 떠오르는지를 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생각이 아마도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리라 믿습ㄴ디ㅏ. 수도자들은 이러한 고찰의 수고를 덜어 주고 그 생각이 정말로 하느님에게서 오는지, 아니면 '마귀' 또는 우리의 내면(초자아)으로부터 오는지를 구분하기 위한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생각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면 내 안에서는 '생기와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마귀'에게서 오는 생각은 그와 반대로 '두려움, 편협함, 부담, 경직'이 생겨납니다.

246) 저는 여러분에게 용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신비를 향한 여러분의 갈망을 신뢰하세요! 여러분의 삶이 그분을 통해 풍요로워지고, 삶이 폭넓어질 뿐만 아니라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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