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후통의 중국사 - 조선의 독립운동가부터 중국의 혁명가까지
이창구 지음 / 생각의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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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고도 중심부에 실핏줄처럼 뻗은 3,000여 개의 후통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잠자고 있을까? (p6)

 

베이징의 전통 뒷골목인 후통멀게는 원나라 건국 시기인 800년 전부터, 가깝게는 청나라 건국 이후인 400년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거리다(p6). 베이징 흐통의 중국사를 집필한 이창구 기자는 약 2년여 동안 베이징 후통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 이 책을 통해 무심코 지나쳤을 독립 운동가들의 고단했지만 불꽃같은 삶을 떠올리며 내일을 꿈꿨던 선조들의 열망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천년고도 베이징을 둘러싼 권력 암투극은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을 실감하게 한다.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없고, 영원불멸이란 달콤함에 빠진 패착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후통에 즐비한 고택의 기구한 역사가 말해준다. 이 책과 함께 베이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엿볼 수 있는 후통에 깃든 이야기에 심취해보길 바란다.

 

후통 한복판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으면 베이징 독립운동가들을 넓은 가슴으로 품었던 우당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p51).

 

한국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가 터를 잡았던 난뤄구샹의 한 후통인 허우구러우위안은 독립투사들의 안식처였다. 600억 원으로 추산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 여겼던 우당의 재산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닥을 보였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지만, 베이징에 거주하던 60개월 동안에는 여섯 번이나 거처를 옮겨야 했다(p52). 일평생 가난을 몰랐던 우당 일가의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고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마오얼 후통 29의 허름함은 독립을 위해 투신한 우당 선생의 굳은 투지를 엿볼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신접살림을 차렸던 진스팡제 21에서 독립운동가 부부는 어떤 꿈을 꿨을까? 비좁고 허름한 보금자리지만 조국 독립이란 사명을 안고 하루의 고단함을 이겨냈을 것이다. 차오더우 후통으로 이사한 부부는 그곳에서 큰 아들을 낳았지만 극심한 생활고로 부인 박자혜 여사는 귀국한다. 와이자오부제에는 약산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 본부가 자리했었다. 단재 선생은 역사에 길이 남을 독립투쟁서 의열단 선언을 직접 작성했는데 이 선언문은 의열단 거사 현장에 늘 살포됐다(p39). 이처럼 베이징 후통은 독립의 열망을 품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발자취가 남겨진 곳이다. 비록 베이징에서의 일상은 지독한 가난과의 싸움이었지만 그들의 곧은 심지까지 꺾지는 못했으리라.

 

중국 정부는 공산당 혁명에 기여한 인물의 옛집은 애지중지하며 보존하지만, 공산당에 반대했거나 공산당원이 아니었던 유명 인사들의 옛집은 방치하거나 헐어 버렸다(p168).

 

권력의 비정함일까,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권력자들의 최후는 결국 승자에게만 그 영광이 돌아간다. 허우위안어쓰 후통에 자리한 두 고택은 주인의 엇갈린 운명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중화민국 총독 장제스의 저택은 국공대전의 패배 후 그 주인을 잃어 대사관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상업호텔로 전락했다. 장제스의 맞은편에 살았던 공산주의 혁명가 마우둔의 저택은 여전히 그 위세가 건재하다. 혁명 문학을 꾸준히 집필했던 그의 고저에는 사후에도 작품과 유품이 잘 보존되어 있다.

 

중국의 근대화 개혁 운동인 유신변법을 주창한 청대 말기 개화파 지식인 캉유웨이(p213)의 저택은 미스 후통에 위치해있다. 왕정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던 유신변법의 선구자 캉유웨이는 서태후와의 권력싸움에서 끝내 패배한 광서제의 운명과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미스 후통 43호의 모습이 끝끝내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주인의 운명과 닮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신변법 100일 천하를 끝으로 처형된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그 창시자인 캉유웨이는 천수를 누렸으니 카멜레온처럼 제 색을 바꾸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후한 평가를 받지 못하나보다.

 

수백 년의 세월이 수천 개의 골목으로 이어진 베이징 후통, 사람 사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이곳에서 역사가 조명하지 않은 또 다른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베이징의 원대한 서사가 담긴 베이징 후통의 중국사를 길잡이삼아 골목 골목에 깃든 사람들의 꿈을 엿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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