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생 새움 세계문학
기 드 모파상 지음, 백선희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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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p380)

 

국내에 흔히 여자의 일생으로 알려진 모파상의 소설을 새움출판사에서 어느 인생이란 바른 번역으로 재출간했다. 중역본의 오류로 파생됐던 명작의 제목이 100년 만에 새 옷을 입고 독자의 품에 안긴 특별한 책이다.

 

책을 완독하고 나면 왜 여자의 일생이란 오역을 제목으로 내세웠는지 이해가 갈 만큼 한 여자의 지독한 일생을 다루고 있다. 일생이라고 부르기에는 주인공 잔느의 16세 이후를 다루지만, 이전까지는 수녀원과 부모의 보호아래 있던 한 소녀가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겪는 고뇌와 절망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녀의 진정한 인생이 이 시점부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인공 잔느는 한적한 시골마을 픠플 영지에서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천진난만한 소녀다. 뭇 소녀들처럼 도시를 동경하기 보단 시골의 한적함을 갈망하고 아직 겪어보지 못한 사랑이란 감정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할 것이며, 그도 있는 힘껏 그녀를 아껴 주리라는 걸(p33) 당연하게 상상하던 여린 소녀의 행복은 한 남자를 만나며 180도 달라진다.

 

네가 그 사람보다 훨씬 부자지만 인생의 행복이 걸린 일에 돈을 생각해선 안 되지(p76)”

 

잔느의 아버지 남작은 선량한 사람이었고 특별히 계산하기 보단 딸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그렇게 잔느와 라마르 자작은 짧은 연애 끝에 성혼한다. 신혼여행을 떠나며 약혼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그의 폭력성과 자린고비를 목격하면서 잔느 자신이 꿈꿔온 그런 미래가 펼쳐지지 않으리란 걸 어렴풋이 느낀다. 파산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계를 이끌었던 라마르 자작 쥘리앵의 생활력은 강했으나 돈을 써야할 때조차 아끼려는 모습에 남작 집안의 가솔들은 혀를 내두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마치 배역을 끝낸 배우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것처럼(p137) 쥘리앵은 가감 없이 제 본성을 드러내고 잔느의 하녀 로잘리를 건드려 임신시킨다.

 

그녀의 삶은 부서졌고, 기쁨은 끝났으며, 기대는 불가능해졌다. 고통과 배신과 절망으로 가득한 끔찍한 미래가 눈앞에 보였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바로 끝날테니 (p172).

 

꿈 많던 순수한 소녀의 삶은 한 남자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죽음을 떠올릴 만큼 그녀의 정신은 피폐해졌다. 도둑이 제 발 저려 사위의 부도덕함을 비난하지 못하는 남작과 남작부인의 침묵은 그녀를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뜨렸으리라. 그때 그녀의 삶에 새 생명이 찾아왔다. 절망 속에 피어난 한줄기 꽃처럼, 그녀의 아들 폴은 잔느의 전부였다. 이제 그녀에겐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내 아이. 돌연 그녀는 사랑에 실망하고 희망에 배신당한 만큼 열정적이고 극성스러운 어머니가 되었다(p201).

 

오직 아들만 바라보는 잔느의 삶은 여전히 평탄하지 않다. 세상은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친구라 믿었던 백작부인과 남편의 부정을 알면서도 모른 척 넘길 만큼 현재를 유지하고 싶었던 그녀의 작은 소망은 새로 부임한 톨비악 신부의 개입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쥘리앵이 죽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의 삶은 단조롭고 평온했다. 잔느의 전부였던 아들 폴이 건실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어린 폭군이 그녀에게 근심을 주지 않았더라면, 잔느는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잔느의 말년은 아들의 연인을 질투하면서도 차마 아들을 버리지 못하는 전형적인 어머니로 남는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p380)

 

그녀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만약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순간으로 가고 싶어할까. 잔느의 시녀였던 로잘리의 마지막 말이 참 의미심장하다. 잔느의 삶은 분명 불행했다. 그런데 그녀만 이런 삶을 살았을까? 로잘리가 보기에 잔느의 인생은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은 삶이다. 살면서 운이 없었다는 잔느의 불평에 로잘리는 오히려 그녀를 타박한다.

 

마님께서 빵을 얻기 위해 일을 하셔야 했다면, 날품팔이를 하러 가기 위해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셔야 했다면 무슨 소리를 하실 겁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너무 늙어 일을 못하게 되면 비참하게 죽어간다고요.” (p366)

 

그녀는 불행했지만 먹고 살기위해 애써야 하진 않았다. 생활전선에 뛰어들지도 않아 세상에 치이지도 않았다. 귀하게 자란 남작가의 아가씨는 개망나니 같은 남편과 철부지 아들을 만나 언제나 비통했지만, 귀족의 불장난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사생아를 키워야 했던 로잘리의 일생을 재조명한다면 잔느의 삶은 귀여운 투정에 불과할 것이다.

 

나와 타인이 가진 슬픔의 무게를 비교하지 않아야한다. 모두가 다 슬프고 힘들기 때문이다. 잔느는 누가 봐도 불행했고 불운했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왜 불행했을까? 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을까. 타인에 의해 자신의 가치가 결정된, 씁쓸한 뒷맛이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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