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위기속에서 살아가는 데에 익숙했던 인류는 우리의 삶이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존재로 축소되고, 사회·정치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인간적·정서적인 측면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 - P47

인류는 거짓의 손짓 한 번으로 한순간에 진실이 축소되는 역사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거짓으로 밝혀진다 해도 반드시 참이어야 하는 거짓은 사실처럼 여겨질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은 의사 표현의 도구인 언어를 강탈당하고 있다. 이제 인간은 거짓의 조용한 (현실이기에 진실한) 움직임을 그저 관찰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움직임을 멈추려면 모든 사람이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가장 소중한 선(善)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게 진실된 단 한마디일지라도.
2020년 4월 28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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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아름다운 것들은
땅에 있다

시인들이여

호박순 하나
걸 수 없는

허공을 파지 말라

땅을 파라 - P70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선다
가방에 물 한 병 챙겨
간단히 산길 걷는다
언젠가는 물도 없이 나설 때가 있으리라
아니 나서지도 못할 때가 있으리라
고샅길 돌아 앞산 밑에 서서
내 집을 한참 내려다본다
대문 없는 저 가난한 돌담집
돌아가지 못할 날도 있으리라
집에 들고 나는 일이
홀로 가기 위한 엄중한 길임을
앞산 길에 서서 알았다
오늘 돌아왔으니
나는, 다시 나설 수 있겠구나 - P71

폭설

눈 온다
정말 시처럼 온다
뭘 빼고
더 보탤 것도 없다

넌 쓰고
난 전율한다

시는 그런 것이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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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진다는 것

미움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용서의 계곡도 가까워진다.


나같이 마음이 뚱뚱한 사람들에겐
내려가는 길이 더 멀고 힘들다.


울룩불룩 균형이 안 잡힌 마음의 관절이 자그락거려계곡을 바로 앞에 두고 곧잘 주저앉는다.


까치처럼 가난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벼워진다는 것이리라.
마음에 구멍이 많아진다는 것이리라.
- P23

가을 텃밭

햇볕 알갱이에 버무려 심은 무와 배추가
초등학생처럼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습니다
세상이야 시끄럽든 말든
망아지처럼 살이 오르고 있습니다
때늦은 파종인데도
기름진 가을빛에 흠뻑 젖어
윤기가 자르르 돌고 있습니다
배추흰나비들이 아침 햇살 속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비뚤비뚤거리며
제 갈 길 찾아 잘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 P45

보헤미안 랩소디

개미동굴만한 지하방에 세 들어 산다.
가을빛이 피곤하고 우울해
지네처럼 숨어 지낸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도
그의 시들어가는 감각을 깨우지 못한다.
안으로 걸어 잠근 마음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세상이 저만치 따로 굴러간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도 못되고,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짱돌도 되지 못하고
밟히면 부스러지고 마는 부스럭돌이 되고 말았다.
담배냄새 짙게 밴 이불 속에서 모가지만 빼들고 있다.
깡그리 싸질러버리고 싶은 분노도 삭아져버렸다.
창 한 번 휘둘러 찔러보지도 못하고
모비딕 아가리 같은 세상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 P82

그냥

풀어진 듯 잘 조여 있는 말이다 무심코 툭 던져오는 말,그냥은 보리차처럼 따뜻하게 흘러들어오는 말이다 막걸리같이 풀어지게 하는 말이다 말들의 싸움으로 삐걱거리는 세상에 윤활유 같은 말이다. 적선하기 좋은 천 원짜리지폐 같은 말이다. 이냥 저냥도 아닌 그냥‘은 거추장스런옷을 다 벗어버린, 옷을 다 벗어버리게 만드는 말이다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는 말이다 무장해제 시키는 말이다 앞뒤좌우 아귀도 없는데 앞뒤좌우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말이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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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

가을에 무의미한 시는 가을을 지시하지 않겠지. 손가락질도 않겠지. 손가락질은 감정, 지시도 손가락이 있어야 가능하니까 손가락 없이는 가을도 없겠지. 가을 없이는 겨울도 없다는 말, 무의미하지. 겨울 없이는 봄도 여름도 없다는 말, 무의미하지. 의미는 뒤통수니까. 뒤통수에 있으니까.가을에 무의미한 시는 하늘이 무너져도 무언가를 쓰고 있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고 이자에 대해서도 원금에 대해서도 돌아오는 만기일이 없지. 돈이 없지. 돈이 없어도 날짜는 바뀌지. 오늘은 여기까지 살았지. 무의미하게 마음에두는 사람과 마음에 없는 얘기를 하고 마음에 없는 조언을하고 다만 시간을 냈다는 것. 너를 생각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표현은 못 했지만 시간을 냈다는 것, 추석 지나고설, 설 지나고 추석, 그사이에 축의금이 있고 조의금이 있고 전화가 있고 표현은 못 했지만 시간을 냈다는 것. 무의미하게, 그러나 떨리게 가을에 무의미한 사랑은.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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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언어‘는 확실히 분리할 수 없는데, ‘인간‘도 ‘언어‘도 생명과 물질의 다양한 전개와 접기의 주름에 불과하며, 결코 생명과 물질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 P199

법을 의미하는 노모스라는 말은 본래 성문화되지 않은 관습법을의미했다고 들뢰즈 · 가타리는 쓰고 있다(『차이와 반복에서 노모스는울타리도 구할區割도 가지지 않고, 다만 일시적으로 거주되는 토지였다).
그 때문에 노모스는 노마드(유목적)의 법일 뿐이며, 결코 공간을 계량하면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근방(近傍)을 차차 더듬어 감으로써 촉각적 공간을 형성하는 법이다. 그것은 비정확과 비질서의 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은 경계도 좌표도 가지지 않는 사막과 같은 공간(매끈한 공간)의 법이다.
- P214

이렇게 하여 주름은 푸코와 라이프니츠의 사고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주름이란 안에 접혀진 바깥이다. 위상학적인 개념으로서의 주름은 언제나 양의성에 관계되고, 무한의 분할 가능성과 동시에 끝없는 연속성을 보여 준다. 주름은 안과 바깥, 혼과 신체, 삶과 죽음, 질서와 카오스, 형상과 질료, 자기와 타자의 절대적인 연속성과 상대적인 분리를 보여준다. 어디까지나 가소적(可塑的)인 환경에 있어서 다양한 사고의 사건과 주체가 여러 가지 접힘의 결과, 나(인칭)라는 주름을 생기시킨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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