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진다는 것

미움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용서의 계곡도 가까워진다.


나같이 마음이 뚱뚱한 사람들에겐
내려가는 길이 더 멀고 힘들다.


울룩불룩 균형이 안 잡힌 마음의 관절이 자그락거려계곡을 바로 앞에 두고 곧잘 주저앉는다.


까치처럼 가난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벼워진다는 것이리라.
마음에 구멍이 많아진다는 것이리라.
- P23

가을 텃밭

햇볕 알갱이에 버무려 심은 무와 배추가
초등학생처럼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습니다
세상이야 시끄럽든 말든
망아지처럼 살이 오르고 있습니다
때늦은 파종인데도
기름진 가을빛에 흠뻑 젖어
윤기가 자르르 돌고 있습니다
배추흰나비들이 아침 햇살 속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비뚤비뚤거리며
제 갈 길 찾아 잘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 P45

보헤미안 랩소디

개미동굴만한 지하방에 세 들어 산다.
가을빛이 피곤하고 우울해
지네처럼 숨어 지낸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도
그의 시들어가는 감각을 깨우지 못한다.
안으로 걸어 잠근 마음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세상이 저만치 따로 굴러간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도 못되고,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짱돌도 되지 못하고
밟히면 부스러지고 마는 부스럭돌이 되고 말았다.
담배냄새 짙게 밴 이불 속에서 모가지만 빼들고 있다.
깡그리 싸질러버리고 싶은 분노도 삭아져버렸다.
창 한 번 휘둘러 찔러보지도 못하고
모비딕 아가리 같은 세상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 P82

그냥

풀어진 듯 잘 조여 있는 말이다 무심코 툭 던져오는 말,그냥은 보리차처럼 따뜻하게 흘러들어오는 말이다 막걸리같이 풀어지게 하는 말이다 말들의 싸움으로 삐걱거리는 세상에 윤활유 같은 말이다. 적선하기 좋은 천 원짜리지폐 같은 말이다. 이냥 저냥도 아닌 그냥‘은 거추장스런옷을 다 벗어버린, 옷을 다 벗어버리게 만드는 말이다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는 말이다 무장해제 시키는 말이다 앞뒤좌우 아귀도 없는데 앞뒤좌우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말이다.
- P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