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 토로.대니얼 크라우스 지음, 김문주 옮김 / 온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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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도 모양도 다양한 사랑을 위하여"


우리 사회는 여러 정상 규범을 만들어 거기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구분한다. 다르다는 이유로 구별 지어진 비정상들은 마이너리티가 된다.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러한 세상의 수많은 다른 존재들을 위한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다양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피부색, 언어, 생김새, 사랑하는 방식 등이 다른 인물들을 통해, 다름과 다양한 사랑의 가치를 전달한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미국 항공 우주 연구소 비밀 실험실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엘라이자는 우주 개발에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잡혀온 괴생명체인 물고기 인간과 사랑에 빠진다. 지금까지 언어장애인 엘라이자를 이용해 몸을 취하기만 했던 여러 남자들과는 다르게 괴생명체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다. 말 못하는 청소부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감이 없었다. 물속의 물고기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일 뿐이었다. 


그는 진짜 그녀를 보았다. 연구소의 남자들처럼 못 본 척하지도 않았고 볼티모어의 여자들처럼 그냥 지나쳐 가지도 않았다. (p.138)


괴생명체 또한 마찬가지다. 겉모습이 다를 뿐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소통할 수 있는 한 생명은 연구소에서 그저 '그것'으로 취급된다. 누군가에겐 해쳐도 상관없는 짐승 혹은 괴물일 뿐이지만 엘라이자에게는 그것이 아니라 '그'다그가 괴물이라면 자신도 괴물인 거라고, 사람이 아닌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음악과 몸짓으로 소통하고 마음을 나눈다. 그걸로 충분하다. 서로의 다름은 사랑에 장애 요소가 되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방식으로 대화하기 위해 수화를 배운다. 그녀는 그의 방식으로 호흡하기 위해 물속에 들어간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온전한 존재가 된다. 


그 순간 둘은 현재도 과거도 아니고 인간도 짐승도 아닌, 여자와 남자였다. (p.158)


1960년대, 흑인, 여성, 언어장애인, 동성애자와 같이 사회의 '정상' 범주에 들지 못하고 배척되던 존재들과 괴생명체로 일컬어지는 물고기 인간이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여러 '다른' 존재들을 대변한다.책에는 엘라이자와 괴생명체 간의 사랑 외에도, 이처럼 사회로부터 차별받는 존재들이 차별 없이 나누는 사랑(우정)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엘라이자의 흰 손가락이 젤다의 갈색 손가락을 감쌌다. 두 손은 서로 색은 달랐어도 늘 함께하며 같은 일을 해 왔다. ... 꽉 쥔 손가락이 말했다. '너와 나는 해낼 수 있어.' (p.341~342)


만약 네가 변종이라면, 나도 마찬가지일 거야. ... 나 같은 변종은 어느 세계에나 존재해. 그렇다면 변종은 언제쯤 변종이길 그만두고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너와 내가 우리 종족의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 종족의 처음이라면 어떡하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타난, 더 나은 종족의 시초라면 말이야? 우리는 그런 바람을 가질 수도 있어. 그렇지? 우리가 과거가 아닌 미래라는 바람 말이야. ... 

자일스는 생각했다. 자일스와 괴생명체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자일스 역시 그에게 어울리는 빛 아래에서, 그에게 맞는 물에 잠길 수 있다면 아름다울 것이 분명했다. (p.332~333)


백인이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고아 엘라이자, 말을 할 수 있고 가족이 있지만 흑인인 젤다, 백인이며 말도 할 수 있지만 혼자 살아가는 노인 동성애자 자일스, 그리고 물고기 인간. 이들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다름을 배척하지 않는 다른 이들 간의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세상엔 전한 존재도, 완전한 사랑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형태도 모양도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 간의 다양한 사랑만 있을 뿐.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 : 물의 형태), 투명해서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물처럼 저마다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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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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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최신 단편 <버스데이 걸>은 스무 살 생일을 맞은 한 여성의 이야기다. 독일의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시크와 함께 작업한 소설X아트 프로젝트로, 일본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된 작품이다.

막 스무 살이 된 여성이 있다. 그날은 그녀의 생일이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생일을 보내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사귀던 남자친구와 최근 다투었기 때문에, 또 당일에 근무를 바꿔주기로 한 친구가 갑자기 몸이 아프게 되었기 때문에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게 된 것이다. 정작 본인은 '스무 살 생일이라고 딱히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p. 9)'라며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그녀의 스무 살 생일은 딱히 무엇도 없이 끝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 스스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는 노인이 나타난다.


스무 살 생일이라는 건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것이야. 그리고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네, 아가씨. (p. 34)


노인은 스무 살의 생일날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재차 강조하며 여러 번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생일 선물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마치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누군가가 보낸 마법사처럼, 어떤 소원이든지 한 가지만 이야기해보라고. 그렇게 그녀는 소원을 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일 년 중에 딱 하루, 시간으로 치면 딱 스물네 시간, 자신에게는 특별한 하루를 소유하게 된다.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유명한 사람도 무명의 사람도, 키다리도 땅딸보도, 어린이도 어른도, 선인도 악인도, 모두에게 그 '특별한 날'이 일 년에 딱 한 번씩 주어진다. 매우 공평하다. 그리고 사안이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공평하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이 아닐까. (p.61) 작가 후기 중에서


당신이 누구든 일 년에 딱 하루, 당신만을 위한 특별한 날이 있다. 그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특별하다. <버스데이 걸>은 스무 살 생일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를 통해 하루키는 우리가 살면서 거쳐가는 모든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별한 하루를, 특별하게 보내지 못하는 우리 중 누군가를 위하여 노인의 모습을 한 하루키가 등장한다. 반복되는 생일은 특별할 것도 없다고 애써 생각하는 삶에 되풀이해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생일 선물로 소원을 말해보라고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내가 존재함을 축복해주고 선물을 주겠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날 하루는 매우 특별해진다. 그 자체로 선물이 된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이름 없는 사람에게도 세상에 태어난 날은 똑같이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노인은 되풀이해 말한다.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아도 별 볼 일 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도 우리의 삶은 소중하고 특별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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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희의 밥과 숨
문성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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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필요한가? 숨 쉬는 것 외에, 배고픔을 면하는 것 외에, 살아 있음을 감지하는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p. 021)



  # 밥   


먹는 것이 단순해지자 사는 것도 단순해지고 가벼워졌다. 몸이 가벼워질수록 생의 찬미도 쉬워졌고 삶의 이해도 깊어졌다. 나는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p. 090)


저자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한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그저 먹고 숨 쉬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먹기와 숨쉬기 외에 모든 것은 삶에 부수적이다. 
요리 학원을 하며 화려하고 멋진 요리에 몰두해왔던 저자는 어느 날부터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 먹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번잡하게 느껴지고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 몸이 단순하게 먹기를 원했다. 그래서 채식을 시작했다. 채식을 통해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맑고 가벼워짐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은 삶의 다른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는 것, 소유하는 것, 나아가 관계에 이르기까지 단순함과 가벼움을 추구했다. 입던 옷을 비롯해, 오로지 생존하는데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물건들을 버렸다. 그리고 너무 많이 알지 않고자 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물론이고 책, 텔레비전, 신문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요가 수련과 명상으로 채웠다. 채식과 요가 수련, 명상을 통해 오직 내 몸과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야말로 미니멀 라이프다. 먹는 것이 단순해지자 마음이 단순해졌고 삶 전체가 단순하고 가벼워졌다. 



   # 숨   


갖지 않고도 삶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이다지도 많다니. 가난은 결핍이 아니었다. 

나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이미 하늘이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숨을 쉰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존재함이 있기나 한 것일까? 지금 이 순간 그저 숨 쉬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p.102)


저자는 문명의 의존도를 최소화 한 자기주도적 삶을 살고자 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주도적 삶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내가 직접 만드는 것이다. 내가 먹을 음식, 입을 옷, 사용할 물건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손수 만든다. 불필요하게 소유하지 않고, 외적인 것이 아닌 나의 내면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에게 물건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을 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명상의 시간이다. 한 땀 한 땀 꿰어낼 때마다 내면에 집중하며 숨을 가지런히 고른다. 내게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며 숨을 쉬고, 그 숨이 나를 채운다. 그렇게 나는 존재한다.


나를 둘러싼 것들, 외부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내 존재에 집중하는 것. 이러한 삶의 방식을 통해 저자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삶 자체를 선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것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내 안을 들여다보며 밥과 숨 만으로 차곡차곡 채우는 것. 생존에 있어 근원이 되는 밥 그리고 숨으로 나를 구성함으로써 존재는 깊은 뿌리를 내린다. 이것이 온전히 나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충분히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그에 만족하기보다는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할 때가 더 많다. 그럴 때면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마음을 채우는 일은 늘 어렵기에 자꾸만 다른 것으로, 다른 사람으로 그 틈을 대신 메꿔보려는 것이라고. 오늘은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르고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쉬는 숨이 나를 채우고, 그렇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나를 채우는 힘은 분명 내 안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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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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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올해로 백수白壽를 맞이한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저자 김형석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물음을 던진다.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이 질문은 백세 철학자에게도 평생 고민해온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질문의 주어는 ‘나’가 아니라 ‘우리’로 확장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저자의 고민의 기록이자 삶의 기록이다. ‘그래도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저자가 담담히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산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잃어감에 관하여 _ 상실론  


"그러나 나는 외롭다.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같이 외롭다. 

... 외로움을 잊으려고 애쓰면 더 큰 외로움이 찾아들곤 한다. ...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동행을 요청할 수도 없다. 외로움은 밖에서 찾아드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p. 041~042


백 년을 살아오며 저자는 많은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어머니를, 아내를, 친구들을, 심지어는 후배들과 제자들까지도. 반복되는 상실로 세상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 속에서도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에게 고독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고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자리에만 차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롭지 않은 순간에도 찾아오고, 아름다운 예술이 자아내기도 하며, 한 인간으로서 나라는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때로 우린 고독을 갈망하기도 한다. 그는 고독은 우리 마음과 더불어 자라나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평생에 걸쳐 숱하게 찾아오는 고독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공허함이 느껴질 때면, 늘 내 밖에 있는 것들로 구멍을 메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아무리 채워 넣어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공허해지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고독이 내 마음과 더불어 자라나는 것이라면, 너무 두려워 말고 마음의 일부로 대하는 법을 익혀보기로 했다.


  살아간다는 것 _ 인생론  

"우리는 밤의 암흑을 몰아내기 위해 촛불을 켠다. 초는 불타서 사라지고 만다.초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초는 빛으로 바뀔 수 있어야 그 빛이 우주에 영원히 남을 수 있다. 그리고 암흑은 그 힘 때문에 자취를 감춘다."

p. 077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완성으로 이끌어갈 의무가 있고, 이를 위한 노력이 삶의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느냐는 중요하다. 어떤 생애를 살았느냐와 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문제의식은,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고민이 깃든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삶 자체는 하나의 공동체이기에. 따라서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나아가 그에 용기와 책임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내 삶의 의미가 나라는 개인을 넘어, 이웃과 역사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일 때 비로소 우리 삶의 의미가 채워지고 우리는 삶을 완성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현재가 최상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통해 행복을 찾아 누리려는 신념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p. 006


백 세,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더 많은 나이.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백 세 철학자가 들려주는 살아감에 대한 이야기가 읽는 내내 묵직한 울림과 감동을 준다. 그 깊은 통찰과 사유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삶에서 방향을 잃을 때마다 두고두고 꺼내 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마음에 한가득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상의 오늘을 위하여,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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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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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꽃이 피는 정원에서 결실한 '땅의 예찬'
정원의 철학자가 전하는 땅을 향한 갈망과 사랑의 노래


저자 한병철은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비평가이다. 독일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투명사회≫ ≪타자의 추방≫ 헤겔과 권력 등 예리하고 독창적인 사회 비평서와 철학 책을 썼다. 
그가 ≪땅의 예찬≫으로 정원의 철학자가 되어 돌아왔다. '비원(비밀의 정원)'이라 이름 지은 자신의 정원에서 세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보내며 식물을 가꾸고, 땅과 호흡한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땅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한 정원사의 일기이며, 자연을 향한 기도이자 찬가이다.

책은 비밀의 정원에 대한 저자의 애정으로 가득하다. 사랑을 담아 식물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른다. 각각의 생김과 색과 향기에 대해, 그 아름다움에 대해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정원에서 자연과 깊이 교감하며 사랑을 주고받는다. 온몸으로 땅과 빛을 느끼고 시와 음악을 노래한다.

섬세한 묘사 때문일까, 책을 읽다 보면 눈앞에 그의 정원이 펼쳐진다. 그 싱그러운 생명의 기운과 아름다움이 책장 너머까지 전해져 온다.
 책은 자연의 향기로 가득하다. 책장을 한 장 씩 넘길 때마다 흙과 풀과 꽃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저자는 정원에 대한 애정을 통해 땅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땅은 아날로그의 감각을 많이 담고 있다. 촉각이나 향기, 색깔과 같은. 그러나 우리는 땅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자꾸만 디지털화되어간다. 그는 '세상의 디지털화란 완벽한 인간화 및 주체화라는 것과 같은 뜻으로땅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다'(p.28)고 말하며, 우리에게 땅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인간Human은 후무스humus, 곧 땅으로 돌아간다. 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우리의 공명 공간이다. 우리가 땅을 떠나면 행복도 우리를 떠난다. ... 디지털화는 결국은 현실 자체를 없앤다. 또는 현실은 디지털 내부에서 현실성을 빼앗기고 하나의 창이 된다. 머지않아 우리 시야는 3차원 디스플레이와 같아질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진다." (p.147~148)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디지털 세계를 비판하며 오늘날 우리가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음을 꼬집는다. 그리고 정원에서의 특별한 시간 감각을 이야기한다. 바로 '느림'이다. 저자는 정원에서 일한 후로 시간을 다르게 느끼게 되었다. 시간이 훨씬 더 느리게 흘러가는 것이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 가을크로커스와 봄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 정원은 강렬한 시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p.23~24)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


무엇이든 빠른 것이 미덕이 되는 오늘날,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안한 많은 현대인에게 정원은 전혀 다른 시간 개념을 제시한다. 정원에서는 시간을 두고 하나의 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희망으로 차오른다. '희망하기는 정원사의 시간 방식(p.180)'이다. 땅은 불확실한 기다림, 참을성, 느린 성장이 요구되는 곳이다. 이러한 땅의 시간 감각은 오늘날 디지털 세계에서 점점 더 잃어가고 있는 현실감과 몸의 느낌을 저자에게 되돌려주었고, 현실을 되찾게 해주었다.

땅에선 시간이 획일화되지 않는다. 땅에 사는 생명들은 고유한 시간을 갖는다. 저마다의 상이한 성장 속도가 자연스럽고, 모두에게 같은 시간 기준이 요구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렇듯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식물들을 키우며 흙을 만지고 땀을 흘렸다. 그 모든 자연의 활력을 몸으로 직접 느꼈다. 온몸으로 땅과 호흡하면 땅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감각을 주기에, 그 안에서 존재의 살아있음 또한 느꼈으리라.




"어린 시절에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꽈리의 속을 비워서 작은 풍선 모양으로 만들었다. 입안에서 그것을 굴리고 소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나는 정원에 한 조각 어린 시절을 두고 있다." (p.182~183)


돌아보니 내 어린 시절의 한 조각도 어느 정원엔가 머물고 있었다. 풀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친구와 나누어 끼던 일, 민들레 씨를 불어 날리며 즐거워하던 일, ... 떠오른 기억들이 무척 아름답고 싱그러워 행복해졌다. 이렇듯 자연의 향기는 두고두고 꺼내 보아도 시들지 않는다. 오히려 흙과 풀과 꽃의 향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진다.
때로 빠르지 못한 나의 삶에 불안과 조급함을 느낄 때면, 바쁘게 달리느라 숨이 가쁠 때면, 잠깐 멈추어 지난 날의 또 다른 한 조각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시간이 나를 쉬게 해주고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따금 밖으로 나가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 그곳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수많은 땅의 생명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주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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