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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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꽃이 피는 정원에서 결실한 '땅의 예찬'
정원의 철학자가 전하는 땅을 향한 갈망과 사랑의 노래


저자 한병철은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비평가이다. 독일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투명사회≫ ≪타자의 추방≫ 헤겔과 권력 등 예리하고 독창적인 사회 비평서와 철학 책을 썼다. 
그가 ≪땅의 예찬≫으로 정원의 철학자가 되어 돌아왔다. '비원(비밀의 정원)'이라 이름 지은 자신의 정원에서 세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보내며 식물을 가꾸고, 땅과 호흡한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땅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한 정원사의 일기이며, 자연을 향한 기도이자 찬가이다.

책은 비밀의 정원에 대한 저자의 애정으로 가득하다. 사랑을 담아 식물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른다. 각각의 생김과 색과 향기에 대해, 그 아름다움에 대해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정원에서 자연과 깊이 교감하며 사랑을 주고받는다. 온몸으로 땅과 빛을 느끼고 시와 음악을 노래한다.

섬세한 묘사 때문일까, 책을 읽다 보면 눈앞에 그의 정원이 펼쳐진다. 그 싱그러운 생명의 기운과 아름다움이 책장 너머까지 전해져 온다.
 책은 자연의 향기로 가득하다. 책장을 한 장 씩 넘길 때마다 흙과 풀과 꽃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저자는 정원에 대한 애정을 통해 땅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땅은 아날로그의 감각을 많이 담고 있다. 촉각이나 향기, 색깔과 같은. 그러나 우리는 땅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자꾸만 디지털화되어간다. 그는 '세상의 디지털화란 완벽한 인간화 및 주체화라는 것과 같은 뜻으로땅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다'(p.28)고 말하며, 우리에게 땅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인간Human은 후무스humus, 곧 땅으로 돌아간다. 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우리의 공명 공간이다. 우리가 땅을 떠나면 행복도 우리를 떠난다. ... 디지털화는 결국은 현실 자체를 없앤다. 또는 현실은 디지털 내부에서 현실성을 빼앗기고 하나의 창이 된다. 머지않아 우리 시야는 3차원 디스플레이와 같아질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진다." (p.147~148)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디지털 세계를 비판하며 오늘날 우리가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음을 꼬집는다. 그리고 정원에서의 특별한 시간 감각을 이야기한다. 바로 '느림'이다. 저자는 정원에서 일한 후로 시간을 다르게 느끼게 되었다. 시간이 훨씬 더 느리게 흘러가는 것이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 가을크로커스와 봄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 정원은 강렬한 시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p.23~24)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


무엇이든 빠른 것이 미덕이 되는 오늘날, 효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안한 많은 현대인에게 정원은 전혀 다른 시간 개념을 제시한다. 정원에서는 시간을 두고 하나의 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희망으로 차오른다. '희망하기는 정원사의 시간 방식(p.180)'이다. 땅은 불확실한 기다림, 참을성, 느린 성장이 요구되는 곳이다. 이러한 땅의 시간 감각은 오늘날 디지털 세계에서 점점 더 잃어가고 있는 현실감과 몸의 느낌을 저자에게 되돌려주었고, 현실을 되찾게 해주었다.

땅에선 시간이 획일화되지 않는다. 땅에 사는 생명들은 고유한 시간을 갖는다. 저마다의 상이한 성장 속도가 자연스럽고, 모두에게 같은 시간 기준이 요구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렇듯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식물들을 키우며 흙을 만지고 땀을 흘렸다. 그 모든 자연의 활력을 몸으로 직접 느꼈다. 온몸으로 땅과 호흡하면 땅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감각을 주기에, 그 안에서 존재의 살아있음 또한 느꼈으리라.




"어린 시절에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꽈리의 속을 비워서 작은 풍선 모양으로 만들었다. 입안에서 그것을 굴리고 소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나는 정원에 한 조각 어린 시절을 두고 있다." (p.182~183)


돌아보니 내 어린 시절의 한 조각도 어느 정원엔가 머물고 있었다. 풀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친구와 나누어 끼던 일, 민들레 씨를 불어 날리며 즐거워하던 일, ... 떠오른 기억들이 무척 아름답고 싱그러워 행복해졌다. 이렇듯 자연의 향기는 두고두고 꺼내 보아도 시들지 않는다. 오히려 흙과 풀과 꽃의 향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진다.
때로 빠르지 못한 나의 삶에 불안과 조급함을 느낄 때면, 바쁘게 달리느라 숨이 가쁠 때면, 잠깐 멈추어 지난 날의 또 다른 한 조각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시간이 나를 쉬게 해주고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따금 밖으로 나가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 그곳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수많은 땅의 생명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주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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