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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평점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에세이
박완서 작가의 글에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시대상을 솔직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마주보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느끼게 하며,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 책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는 2002년 출간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리커버한 특별판으로, 미출간 된 <님은 가시고 김치만 남았네>을 포함하여 46편의 정겹고 따뜻한 글들이 담겨있다.
책머리에 새겨진 작가의 말처럼, 초판본이 1977년이라 지금 읽어 보면 '아, 그렇게 살았던 적도 있었구나' 하며 그 낯설은 감정에서 오는 설렘도 오히려 정감있게 다가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어도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하는 묘사가 너무 아름다웠다.
작가 개인의 흔적임과 동시에 작가로 통과해 온 70년부터 80년대, 90년대 그 삶의 궤적들이 고스란이 느껴지는 문장들은, 여전히 나즈막히 숨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켜내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딱 요즘 다시 부모로서 마음가짐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었다. 조금 더 여유롭고 자유롭게 날개짓을 하도록 기다려주고, 넘어지면 따스하게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세상 누구보다 가장 편하고 안정감이 느껴지게 깊이있는 부모, 자식 관계를 차곡차곡 쌓아가야겠다고 다짐해보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 마지막 몇 달을 철없고 앳된 시절의 감동과 사랑으로 장식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찬탄을 보내고 싶다. (...)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이 허락해 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 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계절마다 사연 없는 계절이 없었다던 작가가 남편의 수술로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온갖 잡념 끝에 마지막 계절을 상상하며 쓴 글이다. 남편과 다시 한번 태초의 남녀같은 철없는 사랑을 나누고 싶은 찬란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때가 가을이었음 하고 바라는 모습이 너무 낭만적이고 아름다워 몇 번이고 되뇌인 문장이다. 작가는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가셨을까? 하고 반문하는 시간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마라톤이란 매력 없는 우직한 스포츠라고밖에 생각 안 했었다. 그러나 앞으론 그것을 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은 조금도 속임수가 용납 안 되는 정직한 운동이기 때문에.
또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찌 주자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승자에게 환호와 박수 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작가는 생전 처음 마주한 정직하게 고통스럽고 고독한 푸른 마라토너의 얼굴을 보며 부디 그가 우습고 불쌍하다고 스스로 느끼고 포기해 버릴까봐 겁이 밀려왔다고 한다. 불현듯 미신적인 연대감마저 느끼며 열렬하고 우렁찬 환영의 박수 갈채를 보내며 작가 자신도 전혀 새로운 희열과 감동을 느꼈다고 이 글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려져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그 마라토너의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겨낸 참뜻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어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박완서 작가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보편적인 일상의 모습과 삶의 이면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놓치지 않고, 포착해 내는 능력이 탁월함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특유의 진솔함과 명쾌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글에서부터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글까지, 올곧은 시선과 날카로운 혜안, 따뜻한 인정, 희망을 잃지 않길 바랐던 깊은 그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에세이이다.
언제 어디서나 다시 읽어도 마음 깊이 스며드는 작가의 글맛을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통해 다시 마주해 보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