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요한복음 - 개정판
장길섭 지음 / 창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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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더 초즌 : 선택받은 자〉를 보았었는데, 여기서 요한복음을 일게 되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시즌 5까지만 나왔지만 예수의 제자 유다에게 배신당한 예수가 끌려간 이야기에서 끝난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져 버렸다. 성경 책을 또다시 읽기에는 벌써부터 답답함이 올라와서, 나는 창세기 이전을 좋아하지 이후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소설 요한복음>을 봤을 때 너무 반가웠다.

회개하라는 말은 옛날의 잘못을 뉘우치라는 반성이 아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본래 존재의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시공간에 얽매인 육적 존재가 내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인 영적 존재인 것을 알라는 말이다.

소설 요한복음 中

어릴 적부터 기독교를 다녔지만, 기독교를 다닌 신자들 중에 친구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자기보다 나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악랄하게 구는 걸 보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한 모습들이 보기 질려서 교회를 안 나가게 되었다. 엄마 말로는 우리가 4대째 기독교 집안이고, 내 남동생이 목사이기 때문에 교회를 가야 한다느니 강요를 끊임없이 해와서 더욱더 내 마음은 거절과 불신, 불만으로 가득 차 믿음이 사라졌었다.

잘 못을 한 사람은 회계를 하면 하느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말에, 나는 그럼 범죄자들도 살인 지르면서 기도하면 용서해 주겠네? 또 범죄 일으키고. 무한 반복이라고 엄마한테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폭력으로 맞고 자라서, 아빠와 엄마가 이혼해달라고, 고통 좀 끝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빌며 울었으나 몇 년이 지나도 그 문제는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나 엄마와의 관계에 있어 꼬인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남은 건 언제나 상처뿐이었다.

그런데 엄마도 회개의 뜻을 잘 못 알고 있던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나. 성경 책을 그리 열심히 들여다보고 하시는 분이 그 참된 뜻을 모른다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애를 낳고 성인이 되었는데도 교회 가라고 질리도록 말하고, 기독교 여한 다고 다른 종교는 안돼라는 무조건적 강요에 내가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기독교는 나에게 그런 불편함의 대상이 되었다. 저 말에 반박할 말은 반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성경 책을 과학으로 풀어서 신랄하게 비판해 줘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가서 기도하라는 말에, 예를 들어서 청소년기의 나의 답변은 이러했다.

“엄마가 하는 건 강요야. 누굴 위해서 자꾸 강요하는 거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 욕심 채우고자 강요하는 거잖아. 강요에 의해 교회 가서 기도하면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교회는 자꾸 강요하고 불필요하게 간섭하는데 누가 가고 싶겠어? 엄마나 많이 가세요.”

최근 들어서는 엄마한테 하나하나 따져댔다.

“지금 엄마가 하는 건 바리새인들이나 하는 거야. 자기 욕심 채우고자. 예수님이 그러는데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다고 했어. 성경 책 읽으라 할 때 제대로 안 읽었지? 불필요하게 감정 낭비하고 싶지 않아. 엄마가 자꾸 그러면 난 절에 갈 거야. 아니면 귀신을 믿던 할 거라고.”

난 하면 한다는 성격이라서 그런가, 최근 들어 기독교 이야기는 잘 안 하신다. 내가 교회에 ‘교’ 짜만 들어도 발작 증세까지 왔으니까 더는 날 건드리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에 눈에 가고, 가고 싶고 그럴듯한 마음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기도는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다고. 꼭 교회 안이 아니어도 된다고. 이 책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너희들은 내가 어째서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을 택했나 하고 나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택한 것이다. 내가 택한 것은 좋은 사람만 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쁜 자도 택한다. 물론 그 가운데는 나를 반역하는 자도 있다. 그중에는 나를 배반하여 팔려는 자도 있다.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믿고, 믿을 수 없는 사람도 믿는다. 나는 누구나 다 믿는다.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는가. 나는 악마도 믿는다. 그놈들이 왜 악마가 되었던가? 누구도 믿어주지 않아서 결국 악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악마였던 것은 아니다. 잘 해보려고 하다가 어느 날 의심받고 냉대 받다 보니 그냥 악마가 되고 만 것이다. 칡넝쿨이 아무리 번져도 산 전체를 덮을 수 없고, 아무리 독수리가 높이 난다 해도 하늘을 넘어설 수 없고,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지구 전체를 물로 덮을 수는 없다. 악마가 아무리 간교하고 힘이 있다 해도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아가 마를 이기는 것은 싸워서가 아니다. 대들어서도 아니다. 사랑해 주고, 믿어주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놔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법 아니겠는가.

소설 요한복음 中

눈먼 자의 눈을 고치고, 다리를 고쳐주고, 다양한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다니는 예수가 유다에게 배신당하는 걸 알면서도, 제자의 발을 씻겨주어 가슴이 먹먹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심정으로 제자의 발을 닦았을까. 예수에게는 엄청난 갈등도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한결같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나의 과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택의 시련 아닐까 하는 것. 과거의 여러 과정이 있었고 늘 의심하고 경계하면서 이겨나갔기에, 성경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지금 아이를 혼자서 잘 키울 수 있었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알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든든하게 살 수 있었던 아니었을까.

아직도 기억난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그동안 바쁘게 살아갔으며 교회에 나간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것만큼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소설 요한복음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해주는 책이며,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조언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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