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삼체 삼체 1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고호관 감수 / 단숨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어쨌든 여전히 중국 문학에 빠져들고 있는 시기다. 중국서적을 뒤지던 중 서평이 대단한 책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류츠신 작가의 「삼체」. 읽어보니 "아 왜 삼체 삼체 하는가 알겠네." 싶은 기분. 인류와 외계인의 조우를 세기말적인 공포와 상실감을 뒤섞어 표현해낸 스릴 넘치는 SF 작품이었다. 

주인공 '왕먀오'는 나노 물질을 연구하는 응용과학자인데, 느닷없이 군인에게 인솔되어 비밀스런 군부 작전 회의에 참가한다. 군인들은 왕먀오에게 일부 과학자들 모임인 '과학의 경계'의 목적과, 회원 '양둥'의 자살에 대해 아는 바를 추궁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왕먀오는 스창의 도발에 이끌려 '과학의 경계'의 동향을 살피는 스파이(?)가 되고. 집에 돌아와 취미로 사진을 찍는 왕먀오의 눈에 별안간 이 세계의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숫자가 찍히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놀란 왕먀오가 '과학의 경계'의 유능한 여과학자 '선위페이'를 찾아가 기이한 현상의 이유를 아는지 묻고, 그녀는 "나노 입자 실험을 중지하세요." 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한편 선위페이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삼체'라는 첨단 VR 게임에 접속한 왕먀오. 태양의 운동법칙을 찾아 생존을 모색하는 '삼체' 문명인이 되는 가상현실 게임 속에서 왕먀오는 몇 개의 문명이 멸망을 반복하는 것을 보며 삼체 게임의 진실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새벽에 난데없이 왕먀오를 끌고간 군부가 '세계종말'을 암시하며 급박히 움직이는 모습, 기적적인 현상을 보고 우왕좌왕하는 왕먀오. 미스테리적인 요소들 덕에 전반부는 매우 흡입력이 높다. 과학 발견과 법칙들이 나오며 전문적이고 다크한 오라를 풍기는 것이 마치
「링」 시리즈의 어두컴컴했던 분위기가 생각나기도 한다. 삼체라는 게임을 디테일하게 설정하고 과학 법칙을 문장 속에 녹여낸 부분이 인상적이다. 삼체 초보자 왕먀오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삼체 세계는 독자에게도 놀라운 인상을 준다. 과연 "정말 류츠신의 삼체가 현실에 있는 이론인 건가?" 하고 고민해보게 할 정도. 과학 이야기는 점점 더 자주, 그리고 폭넓게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하며 류츠신의 철저함을 엿보이게 한다. 왕먀오의 나노 물질을 이용한 대형 작전(!)은 지식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가니란 감상. 한편 예원제(양둥의 어머니)의 전기와도 같은 중반부. 우주와 인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개인의 인생을 깊이 묘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인류의 존망이 분노 서린 인간의 선택에 의해 큰 위기를 맞게 되다니! 이런 드라마틱한 연출이 소설의 문학성과 재미를 동시에 잡지 않았나 싶다.  

「삼체」는 류츠신의 '지구의 과거' 시리즈의 한 편이다. 「삼체」를 다 읽고보니, 어딘가 미완성적인 결말 부분도 연작 소설의 특성이란 생각이 든다. 전반부에 풀리지 않던 미스터리들이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모두 이해되기 시작하니, 명쾌한 것도 말할 게 없다. 다만, 소설 맨 앞으로 돌아가 다시 상기하지 않으면 '아 그랬었지 참' 하게 될 정도로, 이야기가 길고 장면 전환이 꽤 많았는데. 현실 세계, 삼체 게임 세계, 예원제의 과거 등을 연달아 배치했던 것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삼체-2」 도 출간이 되었다는데. 「삼체」랑 이어지는 내용일까? '지구의 과거'는 어떤 작품인 걸까. 류츠신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건가 하는 등. 하아. 정말 여지껏 읽은 중국 소설은 실망할 여지가 없었어...... 이만 좀 다른 작품들에 눈을 돌려볼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하지 않아. 


"우주의 보편적인 물리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리학은...... 물리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문명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기본 구조를 밝히는 데 성공해 삼체 문명은 첫 번째로 도약해 게임은 제2단계로 들어간다. -제 2단계의 삼체로 로그인하십시오."

"만일 삼체 문명이 인간 세계에 들어온다면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이곳에 오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이 세계를 얻는 것을 돕겠습니다. 우리 문명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최종 이상은 주를 구원하는 것이다. 주의 생존을 위해 인류 세계를 어느 정도 희생시킬 수 있다."

"예원제는 몰랐지만 바로 그 때 지구 문명이 우주로 발사한 첫 번째 목소리가 들을 수 있는 지저귐이 되어 태양을 중심으로 광속으로 우주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삼체 함대는 오랜 항해를 하는 동안 항성 사이에 있는 먼지 지대를 두 개나 넘으면서 겨우 절반가량만 태양계에 도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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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미스터리 박스 1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권일영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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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름도 왠지 공포스러운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단편 모음집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을 읽었다. 이미 「남의 일」에서 한번 히라야마 스타일에 꽤 충격을 받았었는데, 훨씬 이 전에 출간된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도 과연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될 듯하다.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한 자가 나락으로 빠지고 지위와 목숨을 잃는 데는 예기치 못한 느닷없는 사건이 관여하는 법이다. 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약한 자가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안이함을 깨닫고 다시 절망하게 되기도 한다. 모두 '상실'과 연관되고, 이걸 그로테스크한 묘사와 이어주면 실감나는 '호러'가 된다.  「오메가의 성찬」, 「오퍼런트의 초상」, 「괴물같은 얼굴을 한 여자와 녹은 시계 같은 머리의 남자」에는 자기 분야에서는 꽤나 '성공'했거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자들이 나온다. 그들이 타락해 가는 이야기는 꼭 스릴러 영화를 보는 느낌을 들게 한다.  「니코틴과 소년」, 「소녀의 기도」엔 지독한 이지메를 당하는 약자와 끔직한 폭력이 등장한다. 「오메가의 성찬」과 「끔찍한 열대」에는 어두운 사회에 빠져들어 존엄도 가치도 잃은 자들이 나와 비인간적인 행동들을 한다. 위와 아래의 인간들이 지위를 다양하게 조합하여 8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남의 일」은 이미지에 의존해 감각적인 호러를 주는 단편들이 많았는데,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은 정황과 플롯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더 이성적인 호러에 가깝다.

히라야마 유메아키는 일본에서도 꾸준히 여러 호러 단편들을 써내고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된 단행본이 아니라 괴담 모음집 정도인지 아쉽게도 국내 번역 출간책이 더이상 없다. 이젠 히라야마 원본까지 사서 봐야하는 건가 싶은 막연한 답답함..... 


1. 에그 맨
범죄자 에그 맨과 여성 수사관 카렌의 심리 싸움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 살해 현장에는 반드시 달걀 껍데기를 남긴다고 해서 에그 맨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정치적, 사상적 대화를 통해 카렌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동시에 옆방에 수감된 덜떨어진 겁쟁이 죄수를 덤덤한 말투로 파괴시켜 나간다. 이윽고 옆방 죄수를 심리적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몰아세우는데... 정신 없는 얼토당토한 정치 이야기는 딱히 흥미로울 것도 없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을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작품. 

2. 니코틴과 소년-거지와 노파
부잣집 도련님 '타로'는 학교에서 근거 없는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사장님인 아버지는 마을의 권력가로, 모두가 아버지와 타로에게 친절하다. 아버지는 '미움을 받는 데는 미움을 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타로는 어느 날 호숫가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노인에게 친절을 베푸는데, 어느 날 밤 노인의 신체적 특징을 엿보게 되고 그 사연이 궁금해진다. 억압받는 취약계층들에게서 '핍박 받는 이유'를 갈구하고 자기를 돌아보고자 한 타로가 진짜 무차별 무근거 폭력을 마주했을 때 변모해 버리고 마는 것이 여러가질 생각나게 한다.

3. 오메가의 성찬
'나'는 수학가로서의 재능과 꿈을 포기하고 한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조직엔 서커스 단체에서 사들여온 거구의 남자 '오메가'가 있다. 오메가는 조직에서 죽인 시체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고, '나'는 오메가의 건강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오메가의 특별한 능력은 그가 죽은 자를 지식을 그대로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학생 시절 동료 '데바'를 만나고 그가 '리먼 정리'를 다 풀어낼 것이란 말을 듣는다. '나'는 오메가에게 '데바'의 지식을 흥정하고, 오메가 역시 거래 조건을 내건다. 냄새나고 그로테스트하지만서도 블랙 코미디 요소가 돋보이는 결말이 인상적. 

4. 소녀의 기도
'후미'는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집에선 의붓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한다. 어머니는 신흥 종교에 빠져 후미를 외면할 뿐이다. 동네에 연쇄 살인마가 나타나 여러 성인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엔 후미에게 몹쓸 짓을 했던 동네 남자도 들어있다. 후미는 연쇄 살인 피해자들이 발견된 장소를 돌며 미친듯이 살인마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살인마가 갑자기 백마 탄 왕자로 둔갑하는 괴랄한 소설이 여기있다.

5. 오퍼런트의 초상
시대는 스키너의 '종으로서의 인간은 실패한 생물이다' 라는 사상과 오퍼런트(일종의 세뇌적 교육)에 의해 돌아가는 미래. '나'는 인간의 오퍼런트 이수를 감시하고 예술을 음유하는 시민을 적출해내는 '스키너부'의 엘리트 요원이다. 어느 날 '나'는 이단으로 의심되는 카논이라는 여자의 감시를 맡게 된다. 그리고 뻔하지만서도 '나'는 카논에게 점점 이끌리기 시작하고... 사이언스와 호러가 적절히 접합되어 있다.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가장 적은 이야기. 

6. 끔찍한 열대
가게를 열기 위한 계약금을 사기당한 '히로'는 어린 시절 헤어진 끔찍한 아버지 '도부로쿠'를 만나 그의 '사람을 죽이러 가자'란 제안에 응한다. 둘은 필리핀 근처 어딘가의 열대 정글에 도착하는데, 끔찍한 식인 동물들이 득실거릴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의 게릴라전이 한창인 사나운 장소이다. 도부로쿠는 '고'라고 하는 조직의 배신자를 찾아 처단하면 현상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현지인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고가 세운 왕국으로 침입하던 그들은 고의 부하들의 습격을 받고. 정신 차린 히로의 눈 앞엔 주지육림같은 미개하고 잔인한 정글 원주민의 생활이 드러난다. 제목처럼 끈적 거리고 습한 이야기. '희망'이란 없다는 메세지가 느껴지기도.

7.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유효 투영범위와 왜곡 정도를 특정하게 조정한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 시점의 이야기다. 지도의 주인은 연쇄 살인마로, 죽여서 처리한 시체들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지도 역시 그에게 '적당한 장소'를 제공하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느 날, 주인이 가져온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를 그려넣은 사람 가죽이 나(지도)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고, 지도는 사람 가죽에 대한 질투와 주인에 대한 분노를 품기 시작한다. 살인마의 심리는 최대한 배제하고 지도의 덤덤하고 웅변적인 말투가 주를 이룬다. 길과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지도의 의지에 영향을 받는다는 기발한 상상에 의거한 이야기. 

8. 괴물 같은 얼굴을 한 여자와 녹은 시계 같은 머리의 남자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잔인하고 완벽한 고문 전문가 '엠시(MC)'. 파트너 '타타르'가 자살하자 보스 '돈'은 엠시에게 '한푸'라는 전직 의사였던 남자를 조수로 붙여준다. 엠시에게 주어진 다음 고문 대상자는 '코코'라는 여자로, 쓸모없어진 매춘부라 조직에서 처리하려고 엠시에게 넘겨졌다. 엠시는 코코를 고문하고는 잠시 의자에 등을 대고 누워 잠을 청하며 꿈 속에서 안정을 얻는다. 다시 고문을 시작했는데, 끔찍한 고문 속에서 코코가 엠시에게 '꿈' 속 내용을 암시하는 말을 건넨다. 동요한 엠시. 꿈을 완벽히 자기 뜻대로 조절하는 엠시의 능력이 코코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신체 개조, 파괴에 대한 지나치게 사실적인 묘사 때문에 다른 이야기에 비해 가장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 기본적으론 오메가의 성찬과 비슷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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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주인
레지 드 사 모레이라 지음, 이희정 옮김 / 예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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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이 갖는 신비성과 그 책을 다루는 북 마스터인 책방 주인이란 얼마나 멋진지. 생각만 해도 책쟁이의 어떤 로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런 낭만을 꿈꾸고 레지 드 사 모레이라의 「책방 주인」을 폈다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것을 읽고 말았다. 원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책방에서 자신이 읽어본 책만 파는 책방 주인」이란 긴 제목의 책인데. 이 제목에서 나는 손님의 사연에 맞춰 적절한 책을 추천하고 인생에서의 교훈을 일깨워주는 인자한 책방 주인이 나올 거라 기대했건만. 「책방 주인」에 나오는 중년의 책방 주인이야말로 오히려 따스한 치료가 필요한 인간이 아닌가 싶다.

자격지심이나 큰 상실감을 비뚤어진 우월 의식으로 포장하고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무례를 드러내는 옹졸한 인간상을 여러 작품에서 보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그게 병이라는 걸 직시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도피해 '고상한' 집착 대상을 만든다. 책방 주인에게 있어 책이 그런 대상인 듯하다. 이성과의 친밀한 관계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책에 대한 애정을 쌓고 그 안에서만 안정을 얻는다. 그런데 사실 그가 직시 하지 않다 뿐이지, 책은 애증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책 읽다가 나체의 여인의 환상을 보며 욕정을 느낀 후에는 또 다시 맹렬하게 책에 열중하려는 증상을 보인다. 책은 그에게 있어서 도피처인 동시에 실은 벗어나고 싶은 도착 대상일지도 모른다. 책에 대한 그의 애정이 순수해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밀폐 공간 에서 계속 손님 드나드는 '뿌득뿌득'하는 문 소리에 신경쓰는 그의 심정이란 어떤 걸까. 그야말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기엔 결핍된 부분이 너무 큰 인간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 함축된 의미를 간결한 묘사 속에 숨겨 놓고 마치 철학적인 질문과 사색을 하게 만드는 게 프랑스 소설의 특징이라는 선입견을 남긴다. 읽던 책의 한 페이지를 찢어 형제 누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책방 주인의 이상심리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의 과거 속 세 여인들은 누구며, 그녀들의 '마지막 페이지 집착증'은 무얼 의미하는가. 저승사자를 연상시키는 낫을 든 검은 손님. 끊임없이 책방을 찾아오는 여호와의 증인. 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꽃집 여주인. 고풍스러운 남작부인들은 누구인지. 꼭 생 텍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특정 대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들이 생각난다만. 대체 이 괴상한 손님들의 의미하는 바가 뭔지 쉽게 캐치되지 않는다. 이미 의미를 찾을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샤를 단치의 글을 읽고 알게 되었지. 이 시대 명작가들 중 일부는 문장 속에 자기만 알아볼 수 있을 법한 비밀과 환상을 숨겨놓고는 명작 행세를 한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프랑스 소설에는 익숙해지지 않을 거야. 프랑스 작가들 중 일부는 일부러 퍼즐과 수수께끼를 만들어놓고 자기 세계를 이해할 뮤즈가 나타나기를,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자기와 함께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게 아닐까. 나에게 이런 류의 소설은 엠마뉘엘 베르네임이 마지막이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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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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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호평을 자아내는 「13.67」 을 읽고나서 홍콩 작가 찬호께이의 이전 작품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읽었다. 이 제목도 특이한 소설은 제 2회 시마다 소지 추리상 수상작으로 시마다 소지가 21세기형 본격추리소설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 작품이다. 

쉬유이 형사는 한 부부가 집 안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장면을 꿈 속에 보고는 깨어난다. 그것은 그가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둥청 아파트 살인사건의 장면이다. 두통을 느끼며 깨어나 경찰서에 출근해보니 아는 동료들은 모두 없어지고, 심지어 날짜는 둥청 아파트 살인사건이 일어난지 6년이 지난 2009년이다. 그제서야 쉬유이는 자신이 6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기억 상실증에 걸렸단 사실을 깨닫지만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 때 경찰서에 '쉬유이 형사와 약속을 하고 왔다'고 말하는 여성 기자 아친이 나타난다. 쉬유이는 둥청 아파트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온 아친과 함께 다니며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들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피해자 유가족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둥청 아파트 살인사건의 모순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소설을 읽으며 그 스토리 전개 방법이나 편집 방식이 굉장히 참신한 것은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이 기억을 회상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하는 장치를 사용한 이전 작품들을 몇 개나 예로 들 수 있다. 굉장히 두껍고 치밀하게 구성된 작품도 아니다.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가 트릭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쓰여져 있는 것이 긍정적인 효과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어렵다. 기억 상실, 해리 등의 소재가 아주 참신하고 생소하여 독자에게 신선함을 줄 수 있는 과학적 소재가 아니라는 점이 트릭의 임팩트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인 작가가 정해진 짧은 분량으로 출품하기 위해 쓴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적어도 「13.67」에서 홍콩 사회를  깊능숙히 추리 소설 안에 녹여내는 찬호께이의 필력에 감탄하고 난 후에 읽었을 때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비교적 가벼운 단편이다. 그런 「기억나지 않음, 형사」가 시마다 소지의 격찬을 받으며 당선작이 된 것은 역시 시마다 소지가 말한대로 찬호께이가 '21세기 본격 추리소설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찬호께이는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투고하면서 21세기 본격추리 창작의 조건에 대한 글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 조건은 
첫째, 미스테리는 환상성을 갖춰야 한다. 둘째, 새로운 방법론에 기반하여 미스터리를 설계하거나 전통적 관념을 전복시켜야 한다. 셋째, 21세기적 새로운 과학지식으로 작품을 지탱하거나 심지어 그런 과학적 원리를 주제로 삼아야 한다. 시마다 소지는 찬호께이가 21세기 추리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그러한 작가의 관점을 그대로 실현시킨 작품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극찬하고 있다. 만약 찬호께이의 덧붙이는 글이 없었다면 이 작품이 당선되었을까 하고 궁금해지기도 한다. 작가 잔홍즈는 이 책의 환상성, 비현실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잔홍즈나 찬호께이가 의미하는 환상성에서 내가 기대한 환상성을 보지는 못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느끼는 현실의 미세한 오류들에 '환상'이란 단어가 붙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21세기 과학지식으로 작품을 지탱해야 한다는 생각이 「13.67」에서는 "뇌파 장치로 뇌사 환자와 대화한다"라는 설정으로 발전한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13.67」의 시간 역순의 플롯전개나 여운을 남기는 엔딩장면도 새로운 방법론에 기반한다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여운 있는 엔딩은 」기억나지 않음, 형사」에서도 맛볼 수 있다.) 시마다 소지의 평처럼 '무한대의 재능'이 앞으로 더 기대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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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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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화려한 네온 사인이 가득한 시내 거리. 다닥다닥 붙은 기이한 구조의 다세대 빌딩이 즐비한 뒷골목. 홍콩 특유의 도시 색깔을 영화나 관광책에서 볼 기회는 많았지만 문학 작품에서 보기란 드문 일이었다. 중문학이 그다지 많지 들어오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홍콩 작가 찬호 께이가 쓴 「13.67」 이란 형사 소설이 번역 출간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13.67」은 후기가 참 많이도 작성되어 있는데, 직접 읽어보니 '과연 그러하군' 하고 이해가 되었다.

「13.67」는 주인공인 형사 관전둬의 형사의 수사극을 역시간 순으로 쓴 소설이다. 관전둬는 영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천재적인 추리 능력을 보여주며 승진을 거듭한 천재 탐정으로, '천리안 관전둬'라고 불린다. 이야기는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는 관전둬에게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뤄 샤오밍 독찰이 사건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몸이 성치 않은 형사의 모습은 마치 '본 콜렉터'에서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링컨 라임을 연상시키기도 해서, 독특한 '핸디캡'을 가지고 있어 더욱 범상치 않은 천재 탐정 캐릭터가 등장한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역시간 순으로 쓰여져 있어 뒤로 갈 수록 관전둬는 젊어지는데, 이러한 구성이 '천리안 관전둬'라는 인물의 천재성과 비범함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작가의 의도는 추리소설 속에 홍콩 사회 자체를 녹이고 싶어서 중요 정치적 사건이 있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이라 한다.)

이 소설은 '홍콩이기에 가능한' 형사물로서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홍콩 삼합회, 마피아 조직, 대부호, 마약상, 부패 경찰 등 홍콩 느와르 물을 연상시키는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한 부정과 부패가 돈이로 모두 인정되고마는 홍콩 사회에 있어서 정의롭고 융통성 까지 갖춘 관전둬의 모습은 마치 '영웅'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비열한 범죄자들은 천재적 추리 능력과 가차없는 카리스마로 대치하고, 동료 경찰들은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인성으로 독려해준다. 인재를 알아보고 아군에게 빚을 지게 하는 그는 어벤져스의 '캡틴 아메리카'의 정의로운 심성과 '아이언맨'의 유머와 모험가 기질을 갖춘 노련한 형사라고 하겠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신비로운 홍콩 권력 세계, 뒷 세계에 대해 읽다보니 홍콩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한 '나라'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추리 소설이 있었던가? 홍콩의 독립 등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홍콩 사회에 대한 작가의 노련한 시선을 느껴볼 수 있는데, 단지 그런 사회파 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추리 소설 그 자체로서의 철두철미한 구성력도 잘 갖추고 있는 소설이었다. 자칫 "이런 전개는 너무 넌센스한데?" 하고 생각되었던 것 조차 심지어는 사건에 있어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또 인물의 심리상태에 근거해 사건의 근거를 추리해내는 과정들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아, 최근 읽은 추리 소설들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강한 것 처럼 생각되었다. 

평론가들의 평을 보면 "정치, 사회적으로 격변을 겪어온 홍콩과 그 속에서 경찰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란 말이 나온다. 사회파 소설이면서도 정통 추리소설의 요소를 고루 갖춘 이야기. 홍콩이기에 가능했고, 홍콩에 대해 더 알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제목이 「13.67」이 아니라 「67.13」이었다면 후속작을 기대해봤을 수도 있을텐데. 찬호께이의 다른 작품을 통해 작가의 매력을 좀 더 느끼는 수 밖에는 없겠구나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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